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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인 인터뷰

종횡무진 자신의 삶을 누비는

날라 님을 만났어요

이번 달 후원인 인터뷰에서는 ‘도대체 저 많은 것들을 언제 다 할까?’ 궁금증이 들 정도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날라 님을 만났습니다. 늘 에너지 넘치는 몸짓과 표정이 주변 사람들에게도 활기를 전해주는 날라 님, 사랑방과도 천천히 친해지게 되길 바랄게요♡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날라입니다. 제가 자기소개가 쉽지 않은 게, 하는 활동이 너무 많아서…. (웃음)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에서는 교육나눔위원회 위원으로, 비혼지향생활공동체 공덕동하우스 구성원으로, 아랫마을 홈리스야학에 합창교실 교사로, 그리고 지금 비온뒤무지개재단에서는 상근활동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활동을 한꺼번에 다 하고 계시다니 놀랍네요. 상근활동을 하는 비온뒤무지개재단에서는 주로 어떤 일을 하시나요?

비온뒤무지개재단(rainbowfoundation.co.kr)은 상근활동가가 3명인 작은 조직이라서 이것저것 하고 있는데요. 재단 홍보와 비정기적인 캠페인들도 맡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저는 다양한 성적소수자 인권운동을 지원하는 지원사업을 운영․관리하는 일을 주요하게 하고 있어요. 재단의 지원사업은 활동지원, 단체응원, 문화/학술, 활동가복지, 특별지원까지 총 5개 영역이 있습니다.

2021년 11월 차별금지법제정연대가 처음으로 국회 앞 농성에 돌입했을 때에도 비온뒤무지개자단의 ‘특별지원’을 받았던 기억이 나네요. 비온뒤무지개재단에서 활동을 시작한지 2년이 다 되어 가시는데, 재단의 활동은 어떠세요?

재밌어요. 일단은 재단의 담당자와 지원사업의 선정자로 만나는 관계이긴 하지만, 사업지원을 신청하는 분들이 하고 있는 다양한 활동들을 알게 되는 것이 즐겁죠. 지원신청서를 받으면서 정말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다양한 방법으로 성적소수자 인권 활동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는데, 그런 활동들을 나누고 소통하는 과정을 저는 재밌어하는 편인 것 같아요.

최근 재단에서 지원했던 사업이나 활동, 모임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게 있으세요?

재단에는 ‘지역활동응원사업’이 있어요. 남원 산내에서 열리는 ‘산내 성다양성 축제’가 올해 3회를 맞이했는데, 너무 감사하게도 1~3회 모두 다 재단에 지원신청을 해주셔서 지원을 하고 있어요.

비온뒤무지개재단에서 지원한 산내성다양성축제를 담은 기사 [한국일보] 이토록 작고 평온한 지리산 산골마을의 퀴어 축제

재단은 성적소수자의 인권향상을 위해서 모금을 진행하고, 이에 동의하고 응원하시는 분들이 내주시는 기부금으로 다양한 활동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성과나 기여가 있었는지를 재단에서도, 또 지원하시는 분들도 상호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해요.

예를 들어, 산내 성다양성 축제는 축제를 즐겁게 하자는 지향이 강하고 산내에서 퀴어페미니스트들이 이 축제를 시작한 이유도 자신들 스스로가 즐겁게 놀고 싶어서이기도 하거든요. 그런데 지원사업 자체가 일-서류-일-서류 업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활동하는 사람들에게는 ‘일’이 되기도 하잖아요. 그 사이에서 지원사업 담당자인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했고, 감사하게도 동료 분들이 제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자신의 생각을 나눠주셔서요. 그 과정을 거쳐 정리한 건, 지금 재단이 할 수 있는 노력은 서류업무를 더 줄이는 것이 아니라, 제가 담당자로서 사업을 한 번 더 들여다보고 연락하고 어려움을 함께 고민하는 일이라는 것이에요. 재단의 지원으로 진행되는 사업이나 활동의 의미나 중요성을 더 잘 알리거나, 모금을 더 잘해서 더 안정적인 규모의 기금을 마련하는 등 다른 방식으로 힘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찾기도 하고요. 앞으로도 '일'과 '의미와 즐거움'에 대해 계속해서 고민해나가고 싶어요. 지원자 분들의 이야기도 더 많이 들어보고요. 그 과정에서 가끔은 다른 방향과 더 나은 길들을 발견하길 바랍니다.

상근활동을 하는 재단 외에도 여러 활동이나 모임도 많이 하시잖아요. 아랫마을 홈리스야학 교사는 언제부터 어떻게 하시게 된 건가요?

홈리스야학 교사는 보통은 ‘뭔가를 하고 싶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 같아요. 저도 재단에서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글쓰기 교실 교사로 시작했는데, 반빈곤 운동을 한다는 마음보다는… 제가 가난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복잡한 생각과 경험들을 해석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개인적인 마음을 가지고 시작했어요. 지금은 합창교실에 있어요. 일주일에 한 번 2시간씩 수업을 하고, 한 달에 한 번 교사회 회의가 있고요. 아, 그리고 이번에 성평등한 야학 만들기 준비팀에도 들어갔네요. 하다 보니 2년이 넘었네요. 매 학기마다 ‘이번에는 못 한다’ 고민했는데… 그만둘 수가 없더라고요. (웃음)

그럼에도 홈리스야학 교사를 계속하게 되는 동력은 무엇일까 궁금해요.

여기에서 느낄 수 있는, ‘재고 따지는’ 것이 없는 공간에서 느끼는 해방감이 있어요. 제 관심사가 공동체와 돌봄이기도 한데, 우선 저도 홈리스야학을 공동체라고 느끼고 다른 교사들도 그곳을 공동체라고 느끼니까 신뢰에 기반한 관계와 소통이 즐거운 게 있고요. 돌봄에 대해서는 ‘약한 존재, 아픈 존재가 어떻게 돌볼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을 그곳에서 많이 풀어가게 되는 게 있어요. 홈리스야학에는 질병이나 장애를 가진 분들이 많이 계시지만, 그 분들과 있을 때 저는 돌봄을 받는다고 느껴요. 제가 너무 이곳 저곳에서 활동하고 있기도 하고 시간도 없으니까 ‘이번 학기만 하고 그만해야지’ 생각을 하다가도 같이 하고 있는 학생분들 얼굴이 떠오르면… 어느 순간 '계속 하겠다'고 말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인간다운 대접을 받기 위해서 필요한 자격을 ‘재고 따지는’ 게 없는 홈리스야학이 학생분들에게도 교사들에게도 소중한 곳이네요. 돌봄을 함께 고민하는 비혼지향생활공동체 ‘공덕동하우스’에도 함께 하고 계시잖아요. 지금은 구성원이 몇 분이신가요?

지금은 아홉 명이네요. ‘생활공동체’라고 하면 많은 분들이 주거를 함께 하는 것으로 전제하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기도 한데, 저희는 지금도 한 집에서 다 같이 살지는 않아요. 주거를 함께 하지 않아도 서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돌봄을 주고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생활공동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어요. 멀리 떨어져 있는 구성원도 있지만 같이 마을에서 살고 싶은 계획은 계속 가지고 있고요. 당시에는 공덕동에 살아서 ‘공덕동하우스’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지금은 홍은동에서 3.5인이 살아요.

얼마 전에는 ‘총회’도 하셨다고 들었는데, 생활공동체에서 총회를 한다는 게 재밌었나요?

네, 일 년에 네 번 총회를 해요. 공덕동하우스는 단체라기보다 약간 관계에 가까운데, 중간중간에 대화모임이나 팀을 운영하기도 하지만 뭐 바쁠 때가 많잖아요. 그래서 두 번의 총회는 1박 2일 워크숍으로 진행하며 긴 이야기를 나눠요. 실제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 어떤 방식으로 함께 하고 싶은지에 대해서요.

저는 혼자 살거나 1:1 관계로 사는 것보다 누군가와 함께 살 때 상상력이 훨씬 많이 펼쳐지는 사람이라서 셋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많은 사람들이 ‘혼자 살기는 싫은데, 혼자 살고 싶다’고 하잖아요. (웃음)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고, 혼자 사는 게 여러 불확실성들을 줄이는 방법이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저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자신과 잘 맞는 사람이랑 만나서 사는 경험을 누구나 해볼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이 사회에 그런 상상력과 경험이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같이 살기'에서 가장 중요한 건 집안일과 생활비를 나누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건 같이 있을 때 쾌적한지 불쾌한지 서로 감각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아, 이건 제가 한 말은 아니고 제가 좋아하는 일본드라마 <사랑할 수 없는 두 사람>에서 나오는 말이에요.

한국사회가 제도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함께 사는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함께 살 때 필요한 역량을 쌓는 경험을 지지, 지원하는 문화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이런 ‘같이 살기’ 경험들을 계속 시도하는 게 날라 님에게는 어떤 의미인가요?

우선 저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진짜 좋아해요. (웃음) 그리고 같이 살면 사람이 단단해지거든요. 어딜 가도 어떤 일을 겪어도 나에게 돌아올 곳이 있다는, 그 관계가 있다는 것이 주는 안정감이 있어요. 사실 원가족이나 결혼 관계에서 그걸 느끼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있잖아요. 나에게 약간 무한한 애정을 주는 관계가 생긴다는 게 ‘같이 살기’인데, 사실 같이 산다는 것만으로 이런 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는 건 아니기도 해요. 물리적인 시간과 에너지, 관심과 애정이 투여되어야 하고, 여러 갈등 속에서도 서로를 이해하는 관계를 쌓아가는 경험 없이 절대로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니까요. 모든 관계라는 건 사실 갈등인데, 약간 스킬이 쌓이는 것도 있고요. 어쨌든 저는 안정감이 가장 좋은 것 같아요. 하루를 살고 나서 나의 하루 삶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사람이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 매일매일 약속을 잡지 않아도 그런 관계가 있다는 건 너무 좋은 것 같아요.

혹시 날라님이 언제 사랑방 후원인이 되셨는지 기억하시나요? 

네, 기억해요. 제가 재단 활동을 시작하고 나서 퀴어 이론이나 공동체의 역사에 대해서 잘 모르다보니 공부를 하려고 열심히 찾아다녔는데, 말과활아카데미에서 퀴어를 주제로 한 연속강좌가 있었어요. 그 중 한 강좌를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김대현 님이 한국 성소수자 인권운동에 대해 이야기해주셨는데, 그때 인권운동 단체들과 성소수자 단체들이 구체적으로 연결되었던 경험과 연대에 대해서 알게 되었어요. 지금은 무슨 내용이었는지 잘 기억도 안나지만 (웃음) 뭔가 굉장히 감동적이었고, 그 수업이 끝나자마자 사랑방과 장애여성공감 두 단체의 후원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성소수자 인권운동과 반차별 운동을 함께 해온 단체들의 후원을 시작하셨군요. 이후에 지켜본 사랑방 활동 중 인상 깊은 것이 있었다면 무엇일까요?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이요. 작년에 도보행진을 하셨잖아요. 저는 그게 가장 기억에 남아 있어요. 국회에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면서 도보행진을 하는 활동가들이 있다는 것이 힘이 되고, 그 도보행진을 응원하고 싶다는 마음이 직접적으로 들었어요. 그래서 당시에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의 ‘무지개 도보행진단’ 버스를 타고 청주에 가서 같이 걷기도 했었고요. 그때 정보라 작가님이랑 같이 걸었거든요. 저는 원래 정보라 작가님에게 SF글쓰기 수업을 잠깐 들어서 저에게는 ‘교수님’이었는데, 도보행진에는 비정규직 시간강사 노동자로 오셔서 리본 나누어주시고 했던 기억도 떠오르고요. 그렇게 저나 다른 사람들이 연대할 직접적인 기회를 주셔서 감사한 마음이 들었어요.

마지막으로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전해주세요.

저는 단체에 관심이 있어서 후원을 시작하기보다 후원인이 되고 나서 관심을 가지는 편인 것 같아요. 후원인이 되면 매달 연락을 주시는 거잖아요. (후원인 소식지 사람사랑을 통해서) 사랑방의 생각과 활동가들의 삶을 나눠주시는 거니까, 저는 후원이 단체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관계를 맺는 계기가 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일회성인 관계가 아니라 꾸준히 관계를 맺는 것이기도 하고요. 저는 천천히 친해지는 사람이라서 사랑방을 몇 년 동안 열심히 잘 알아가 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