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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마지막 돋움활동가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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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철들어간다는 것이, 제 한몸의 평안을 위해 세상에 적당히 길드는 거라면, 내 결코 철들지 않겠다.”

한 번씩 생각나는 노래구절입니다. 오만하고 치기어린, 쉽지 않은 선언이지만, 제 맘 속 어딘가에도 이런 고집이 있었나봅니다. 고등학교 졸업할 즈음 일기장에, “나는 라면만 먹어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 거야. 세상에 지지 않을 거야.”라고 적어두었으니까요. 그게 무슨 뜻일지도 모르고 끄적였던 순진한 마음이, 세상에 무너지는 사람들, 사람들을 짓밟는 세상을 보고 얼마나 답답하고 분통이 터졌을까요.

그런 마음으로 이런저런 시간을 보내고, 사랑방 후원인이 되었다가, 바로 이 <활동가의 편지>들을 읽으면서 ‘여기, 괜찮은데?’ 싶어 자원활동을 함께 했고, 당시 활동가들의 꼬임에 넘어가 “인권운동사랑방의 돋움활동가”가 되었습니다. 최근 돋움활동이 조금 주춤하긴 했지만, 돋움활동가 입방을 위한 자기소개서를 쓴 것이 2007년 1월이니, 이제 조금만 더 지나면 만 15년을 꽉꽉 눌러 채우게 되네요.

그 15년 동안, 사랑방이 저의 모든 것이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조금 오글거리게도, ‘제 인생의 황금기를 함께 한 인권운동사랑방’이라고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몇 가지 골라서 적기 어려울 만큼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었기에, 힘든 일도 즐거운 일도 사랑방을 빼놓고는 생각하기 어렵고, 친구들도 대부분 사랑방 친구들이고, 아마 저의 성장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도 사랑방이었을 겁니다. “안녕하세요, 사랑방 아해입니다.”라는 것이 제게는 가장 뿌듯한 자기소개였고, 무엇보다 저의 가장 활발하고 기운 넘치던 시간을 사랑방과 ‘함께’ 보냈다는 것에, 고마움과 기쁨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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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랑방이 이제 전환의 시기를 맞게 됩니다. 멤버십을 정비하고 조직의 형태도 조금 달라지겠지만, 곧 다가올 시대에는 인권에 대한 어려운 도전들도 많을 것 같습니다. 원래 있던 전통적인 인권문제들도 그대로 쌓여있는 것 같은데, 거기에 또 새로운 도전들이라니요.

세계경제위기와 기후위기는 이제 저로서는 도저히 답을 모르겠습니다. 아마 기존의 인권문제들은 심화되고, 인권목록들 사이의 충돌도 격렬해지고, 새로운 인권문제들도 생겨나겠지요. 이런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 같아 무섭습니다.

우리나라 농촌과 공장에서는 이미 이주노동자 없이 생산이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오래된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처럼 말하면, “생산을 이주민에게 넘길 때, 우리들은 그 의미를 더 진지하게 생각해야 했다”. 타자화된 인권개념으로는 조금 모자란 것 같은데, 그렇다고 우리가 이주민을 온전히 동등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 같지도 않습니다.

태어났을 때부터 스마트폰과 인터넷을 경험할 수 있었던 세대 - 저는 스마트폰/온라인공간의 즉각적인 응답속도와 그 안에서의 본인의 강한 영향력을 경험하고 정체성을 갖게 되는 방식으로 뇌가 조직된 세대, 그래서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현실과의 갭을 크게 경험하는 세대라고 생각합니다만 - 는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인권문제를 드러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여성혐오는 아예 다른 차원으로 발전할 수도 있을 것 같고, 자살률은 계속 올라갈 것이고, 코로나 같은 감염병은 반복될 것이고, 지방/수도권/서울 간의 차이는 점점 더 벌어지고, 이런 속에서 남북관계와 국제적인 문제들은 또... 아무튼 너무 어렵기만 합니다. 저는 곧 30주년을 맞는 인권운동사랑방이, 이런 도전들 속에서도 “진보적 인권운동”은 어떠해야 하는지, 앞으로도 계속계속 날카롭게 벼려나갈 것이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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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역시, 돋움활동가 멤버십을 정리하면서 새로운 전환을 준비합니다. 

세상의 여러 변화와 어려움 속에서, 앞으로는 사람들이 겪을 고통들도, 정말이지, 새롭고 신선하게 엄청 늘어만 갈 것 같습니다. 사랑방이 인권운동으로써 이 고통들을 막고 극복하고자 하는 거라면, 저는 사람들이 고통을 버텨내는 것에 도움이 되어보려고 합니다.

당연히, 사랑방도, 사회운동도, 새로운 세대도, 인간의 존엄한 삶을 위한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세상의 너무 큰 고통이 그 노력을 압도하지 않도록, 고통을 버티는 힘을 키우는 것이 또한 필요해 보입니다. 힘을 키우는 저의 키워드는, 불교/요가/명상. 몸은 요가로, 마음은 명상으로, 큰 틀에서는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 가르치는” 불교의 가르침으로, 앞으로 덮쳐올 괴로움들을 함께 버티어 낼 수 있도록 준비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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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마디 말 아닌, 우리의 삶으로, 기꺼이 보여주리라.”

처음에 언급했던 노래는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저도 사랑방도 이렇게 살아나가기를 바라며, 마지막 인사를 드립니다. 인권운동사랑방이 지금 이 자리에 이렇게 든든하게 서있을 수 있게 한 모든 선후배 활동가분들, 그리고 후원인분들, 여러분께서 제게 인생의 큰 선물을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我海, 45r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