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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읽는 세상

블라블라블라~ 어쩌구저쩌구~ 기후변화당사국 총회(COP)는 이제그만

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가 영국 글래스고에서 한창 열리고 있다. 한 달 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청소년기후정상회의에서 그레타 툰베리는 정치 지도자들이 지난 30년 동안 국제회의장에 모여 “녹색경제, 더 나은 재건 블라블라블라~만 반복하며 거짓 약속을 하며 행동하지 않았다”고 일갈했다. 이번 당사국총회는 다를 수 있을까?

당사국총회(COP)는 1995년 처음 열린 뒤 매년 개최되어 왔지만, 이번 회의는 2015년 체결된 파리협약이 발효되는 첫 해에 열리는 회의이다. 지난 몇 년 사이, 세계적으로 기후변화에 따른 피해가 확산되고 위기감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파리협약에 따라 각국이 온실가스 배출량을 얼마나 줄일 것인지를 전 세계에 처음 밝히는 자리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혹시나 했던 기대감은 역시나 하는 익숙한 실망감으로 바뀌고 있다. 국제기후회의에서 26년째 반복되는 이 지긋지긋한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이제 진실을 직시해야 한다.

 

감축계획에도 늘어만 가는 온실가스 배출량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은 지난 9월 ‘파리협정에 따른 국가별 온실가스 감축목표(NDC) 종합보고서’를 발표했다. 191개국 중 164개국이 제출한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분석한 결과, 2030년 온실가스 배출량은 2010년 대비 16.3%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절망적인 결과다. 지구 평균 기온 상승을 1.5도 이내로 묶어두기 위해서는 2010년 대비 최소 45% 이상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여야 한다는 IPCC 특별보고서의 권고와는 정반대로 가고 있는 것이다. 감축 계획을 모았는데, 오히려 예상 배출량이 늘어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흔히 유럽과 미국 중심으로 보도되는 온실가스 감축목표치의 상당량이 중국, 인도, 브라질과 같은 개도국들에게 전가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번 당사국총회에 인도(연간배출량 3위)는 감축목표치 제시를 거부했고, 중국(연간배출량 1위)은 2030년 전에는 감축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반면 영국은 1990년 대비 68% 감축안을 내며 가장 큰 폭의 감축안을 냈는데, 이는 금융, 서비스업 중심으로 경제를 재편하면서 상품 대부분을 개도국에서 수입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상품을 엄청나게 소비하는 서울에 공장이 없다고 해서 온실가스 배출의 책임이 없는 건 아니다.

 

또한 세계 인구의 35%를 차지하는 중국과 인도의 경제성장은 고스란히 온실가스 배출증가로 이어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의 1인당 배출량은 미국의 1/8 수준이다. 이러한 개도국들의 탈탄소 사회 전환을 위해 2009년 COP15에서 선진국들이 개도국에 지원하기로 한 전환비용은 작년까지 1조 달러가 모여야 했지만, 현재 770억 달러에 불과하다. 오히려 미국, 호주와 같은 국가들은 막대한 양의 화석연료(석탄, 석유, 천연가스)를 수출하기에 바쁘다. 그렇다고 개도국이 발전권을 내세우며 온실가스 배출을 정당화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기후재앙’의 문턱을 넘는다는 1.5도 온도상승이 임박했기 때문이다. 이미 기후변화의 파괴적 영향은 남반구를 중심으로 한 개도국들에 집중되고 있다.

 

국가 간 경쟁 구도가 가리는 세계 자본주의 질서

 

국제정치의 기본단위이자 행위자인 국가를 중심으로 COP26이 보도되고 분석되는 건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이, 1990년대 이후 가속화된 경제 질서의 지구적 통합은 온실가스 감축 실패를 단지 미-중 패권 경쟁, 선진국-개도국 갈등의 결과로 볼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한다. 1989년 냉전 종식 이후 소비된 화석연료의 양이 그동안 인류가 사용한 화석연료의 절반에 달한다. 끊임없이 성장하고 이윤을 남겨야만 살아남는 자본주의 질서 속에서 인류는 지금껏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수준의 광물과 자원을 추출해 에너지를 만들고, 노동력을 착취해 재화를 생산하면서 ‘경제성장’을 이뤄냈다. 그 결과가 기후위기와 불평등이며 파헤쳐지고 폐기물로 가득한 자연이다. 국가 간 구도를 넘어, 바로 그 이윤과 권력을 축적한 계층과 계급의 분할 선과 온실가스 배출량의 차이는 정확히 일치한다. 옥스팜(2020)에 따르면 1990~2015년까지 상위 10%(6억 3천만 명)의 소득계층은 전체 탄소 배출량의 52%를 차지했다. 최상위 1%는 15%를 차지했으며 하위 50%는 7%에 불과했다.

 

역설적이게도 같은 시기에 기후변화가 국제정치의 공식 의제가 되었고, 리우협약, 교토의정서, 파리협약 등을 맺으며 국제기후정치는 작동해왔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온실가스를 감축하지 못했다. 매번 지금과 같은 기대와 환멸이 반복됐다. 오히려 기후정치는 자본주의 질서에 ‘지속가능한 성장’, ‘녹색 성장’이라는 거짓 환상을 더했을 뿐이다. 재생에너지는 늘어났지만, 화석연료를 대체하지 못하고 늘어난 에너지 수요와 경제성장을 뒷받침했다. 최대 산유국 사우디아라비아가 탄소중립을 선언해도 석유 수출은 규제는 할 수 없는 게 기후변화 당사국총회이다.

 

한국도 탄소중립위를 통해 결정한 ‘2030 온실가스 감축목표(NDC)’와 ‘2050 탄소중립 시나리오’를 들고 문재인 대통령이 글래스고로 갔다. 출발 전 탄중위 전체회의에서 그는 “우리 경제의 지속성장과 국가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국가의 명운을 걸고 탄소중립에 나서겠다며, 기업 혼자서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밝혔다. 온실가스 감축과 탄소중립/배출제로가 목적이 아니다. 경제의 지속성장과 국가경쟁력 제고가 목적이다. 다른 나라도 비슷하다. 이런 국가 정상 130여 명이 모였으니 뻔한 결과가 나온 것이다.

 

기후변화가 아니라 체제변화를

 

온실가스 감축은 정치인들의 진심과 선의, 혁신적인 녹색 기술로 가능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 전 세계 기후정의 활동가들이 이미 10여 년 전부터 ‘기후변화가 아니라 체제 변화를’ 외치기 시작했다. 올해도 어김없이 당사국 총회장 바깥에는 전 세계에서 모인 기후정의 활동가들이 꾸린 <기후정의를 위한 민중회의>가 열리고, 11월 6일에는 <글로벌 기후정의를 위한 행동의 날>이 글래스고를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진행된다. 그렇게 COP은 글로벌 자본주의 시스템의 부품이자 실행자일 뿐인 각국의 정치인들과 기업인들이 모인 공식 총회장에서 희망을 찾기보다, 이 체제를 변혁하기 위한 힘을 조직하고 연결하는 것만이 가장 현실적인 대안임을 확인해 왔던 기후정의운동의 역사이기도 했다.

 

창피한 줄도 모르고 ‘2030 온실가스 감축목표(NDC)’와 ‘2050 탄소중립 시나리오’를 들고 영국으로 간 한국 정부도 이제부터 온실가스 감축하겠다면서 뭐라도 하려고 할 것이다. 실제 온실가스 감축이 아니라 기업과 자본의 돈벌이 기회에 그칠테지만, 기후위기니 온실가스 감축이니 하면서 지금처럼 뻔뻔하고 당당하게 노동자와 농민, 지역주민의 생존권을 짓밟는 짓을 시작할 것이다. 석탄발전에 투자한 자본의 눈치를 보느라 탈석탄 선언에 동참하지 않았지만, 폐쇄예정인 발전소 노동자 해고에는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 지난 30년 동안 수입 농산물 시장 개방으로 농업을 고사시켜왔던 정부는 이제 농민에게 땅에서 나가라고 한다. 태양광 발전을 늘리겠다며, 사업자들에게 땅을 내주고 황금 들녘을 검은 들판으로 만들고 있다. 지역균형발전이라면서 전국을 공사판으로 만들면서 추진되고 있는 신공항 건설 계획들, 폐기물화력발전소, 송전탑 공사는 탄소중립이라는 가면 뒤에 가려진 정부와 자본의 진심이다.

 

‘기후변화가 아닌 체제변화’는 온실가스 감축이 아니라, 이윤축적과 경제성장이 목적인 저들에 맞선 싸움에서부터 시작한다. 공공이 주도하는 에너지 전환, 정의로운 전환을 석탄발전 노동자들이 요구하고, 수입 농산물 확대가 아니라 식량자급률을 높이는 친환경 농업 육성이 온실가스를 줄이는 길이라고 농민들은 주장하고 있다. 토건 자본의 배만 불리는 난개발 사업을 막는 게 기후위기 시대, 기후정의운동의 현장이라고 주민들은 생각한다. 멀게만 느껴지는 체제변화는 바로 이러한 운동들이 아래로부터 연결되고 조직되면서 시작된다. COP이 아니라, 그렇게 일국을 넘어 지구적으로 연결된 힘이 세계를 구하고 변혁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