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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읽는 세상

트랜스젠더가 정말로 위협하는 것은

트랜스젠더 ‘군인’과 ‘대학 지원자’의 등장 소식이 전해지며 이들의 여군 전환, 여대 입학을 반대한다는 여론이 거셌다. 마치 여성들만의 공간에 남성이 침입한 것처럼 여기며 불안해하거나, 트랜스젠더를 ‘가짜’ 여성으로 규정하며 ‘진짜’ 여성들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식이었다. 언론은 불안을 매개로 트랜스젠더 혐오를 ‘타당한 의견’처럼 전파해댔다. 성별 전환은 개인의 선택인데 군인과 여대생이라는 ‘자격’까지 원하는 건 이기적이라거나, 왜 하필 군대와 여대냐고 물으며 다른 곳으로 가라는 목소리도 나왔다.

 

그런데 트랜스젠더가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지 않고 일하거나 공부할 수 있는 곳이 있기는 한가.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트랜스젠더는 없거나 보이지 않는 존재로 여겨졌고, 가끔씩 등장할 때는 비정상적이거나 성적인 이미지로만 취급되어 왔다. 문제는 트랜스젠더의 존재가 아니라, 트랜스젠더와 함께 살아갈 준비를 하지 않는 사회다. 트랜스젠더의 존재가 가시화된 지금, 우리는 어떤 고민을 이어가야 할까.

 

트랜스젠더가 던지는 질문

 

한국 사회에서 군대는 철저하게 남성의 공간으로 여겨져 왔다. 여군의 비율은 간부 중 6%에 불과하며, 사병을 포함하면 그 비율은 현저히 낮아진다. 여군을 위한 제반 시설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경우도 많다. 징집을 위한 신체검사는 ‘건강하고 정상적인 남성’을 가르는 과정으로, 군 복무 기간은 ‘진짜 사나이’가 되는 시간으로 이야기된다. 최근 국방부는 음경과 고환 상실을 이유로 트랜스젠더 군인에게 강제전역 결정을 통보했다. 당사자가 복무해온 전차 조종 보직을 유지하는데 미치는 영향이 없다거나, 함께 복무해온 동료들의 지지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트랜스젠더 군인은 군대를 통해 규정해온 정상적 남성의 규범을 흔들고 위협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여대의 경우는 어떨까. 여성의 진학률이 남성에 비해 턱없이 낮았던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해 여대라는 여성고등교육 기관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성에 따른 차별을 개선하기 위한 공간에서, 특정 학생의 성별을 의심하고 부정하는 폭력적인 상황이 펼쳐졌다. 학교는 트랜스젠더 학생을 향한 모욕과 폭력에 대해서 침묵으로 일관했고, 결국 당연했던 입학을 스스로 포기하게 했다. 두 사건은 각기 다른 공간에서 서로 다른 양상과 구도로 드러났지만, ‘특정 성별을 위한 공간’을 지키려고 했다는 점에서 맥락을 같이 한다. 트랜스젠더 군인과 여대생의 등장은 ‘남성의 공간인 군대’, ‘여성의 공간인 여대’라는 신화에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군대와 여대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변화하는 대신, 질문하는 존재들을 배제해버렸다.

 

무엇이 여성을 불안하게 만드나

 

트랜스젠더를 배제하는 사람들은 ‘진짜 여성이 느끼는 불안’을 이야기한다. 누군가는 여성 차별이 옛 일이라고 말하지만, 여전히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불법 촬영을 비롯한 각종 성범죄에 노출되거나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있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강력 범죄 소식은 끊이지 않으며, ‘OECD 국가 중 남녀 임금격차 1위’라는 수치가 보여주듯 성별에 따른 불평등 역시 심각한 수준이다. 차별과 폭력이 만연한 현실, 여성의 권리와 안전이 지켜지지 않는 부조리한 사회에서 여성들은 각자 살아남는 법을 찾아야 했다. 그러한 방법 중 하나는 여성이라는 동질성에 기대는 것이었다. “여자는 여자가 돕는다”는 구호에서 보이듯, 여성들은 서로에게 기대고 서로를 도우며 현실을 살아냈다.

 

문제는 동질성의 기준이다. ‘생물학적 여성이 진짜 여성이다’, ‘가짜 여성인 트랜스젠더가 성별 정정을 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은 트랜스젠더를 ‘여성 집단이라는 동질성을 위협하는 존재’로 여기며 배제를 정당화한다. 여성이 차별받는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만들어진 여대에서, 마찬가지로 차별받는 트랜스젠더 여성은 여성‘만’을 위한 공간의 침범자로 여겨졌다. 여성의 불안은 안전에 대한 위협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남녀공학 안 가고 굳이 여대냐”는 날선 반응은 여성의 자리를 빼앗길 수도 있다는 불안의 표출이기도 했다.

 

그러나 ‘생물학적 성별’을 기준으로 동질성을 찾고 여기서 벗어나는 사람들을 배제할 때, 남성 중심 사회가 규정해온 여성에 대한 규범은 더욱 공고해진다. 이러한 배제는 남성 권력이라는 구조를 건드리지 않은 채 비(非)남성 집단 내의 경합을 부추길 뿐이다. ‘진짜 여성’, ‘정상적 여성’을 찾으려는 노력은 트랜스젠더뿐 아니라 모든 여성에게 가해지는 굴레를 강화한다. 트랜스젠더가 위협하는 것은 ‘진짜 여성’이 아니라, 젠더에 따라 정상성을 구획하는 체계 자체다.

 

정상성의 굴레는 모두에게 씌워진다

 

신분증에서부터 화장실·목욕탕 등의 공간, 놀이문화나 일에 대한 적성까지 모든 영역이 남성과 여성으로 구획된다. 이러한 조건에서 트랜스젠더에게 모든 것은 ‘장벽’이다. 공중화장실을 이용할 때마다 마주하는 두려움으로 물 마시는 것을 자제한다. 선거 때 투표장부터 일상에서 우편물 수령까지 신분을 확인하는 매 순간 경계의 눈초리를 겪는다. “남자냐 여자냐”, “본인이 맞냐” 는 질문이 뒤따른다. 끊임없이 정상성을 의심받고, 이를 증명해낼 것을 요구받는다.

 

소위 ‘정상적이지 않은’ 트랜스젠더만의 문제일까. 어렸을 때 가슴이 작은 친구들은 여자 맞냐는 놀림을 받곤 했다. 결혼적령기를 지난 여성에게 가임 ‘능력’ 저하를 대비해 난자냉동을 권한다. 노인 여성은 성적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며 그녀들에 대한 성폭력을 문제로 보지 않는다. 나이에 따라 여성으로서의 ‘상품 가치’가 재단된다. 정상적인 여성으로서의 규범은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전 생애에 걸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이러한 규범은 개개인의 외형적 모습, 생식 능력, 성적 주체로서의 행위와 결정 등 모든 영역에서 영향을 끼친다.

 

다양한 용어로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설명하는 사람들에 대해 왜 그런지 궁금했던 적이 있다. 낯선 용어를 새로 접할 때마다 왜 이토록 스스로를 규정하고 싶어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은 내가 별다른 고민 없이 ‘여성’을 나를 규정하는 언어로 여겨왔기 때문이다. 낯설게만 보였던 용어의 등장은, 남성과 여성을 정상으로 규정해온 언어에서 배제된 사람들이 자신을 규정할 수 있는 말을 만들고 찾는 작업이었다. 젠더 규범에 기반한 폭력과 배제는 트랜스젠더뿐 아니라 모든 여성들에게 가해진다. 이러한 규범이 지배하는 공간에서는 누구도 자유롭고 안전할 수 없다.

우리 모두를 위한 길

 

남성과 여성으로 이분화된 체계가 우리 모두를 억압한다면, 체계 안에 편입될 것이 아니라 체계를 바꾸기 위한 고민이 필요하다. 어떤 몸으로 살아갈지, 스스로를 어떻게 정체화할지는 개인이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스스로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다양한 몸과 다양한 삶이 인정될 때, 모두를 억압하는 체계 역시 변화할 수 있다.

 

트랜스젠더 군인과 대학 지원자는 각각 강제전역을 당하고 입학을 포기했지만, 그럼에도 멈춰 서지 않았다. 군인으로서의 꿈을 지키기 위해, 법을 공부하고 싶었던 꿈을 이루기 위해 지금까지 내딛어온 걸음을 다시 내딛고 있다. 젠더로 구획되어온 규범, 성별로 모두를 억압하는 사회를 어떻게 바꿔갈 것인가? 이들이 온 몸으로 던진 질문에 답하기 위한 과제이다.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보여준 이들의 걸음을 응원하며 함께 길을 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