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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이야기

노동에 대한 찬양과 경시 사이에서 노동윤리를 고민하다.

명숙

벌써 노동과 노동윤리에 대해 사회권팀 자원활동가들과 세미나하고 인터뷰한 지 1년 반입니다. 물론 그 1년 반이 아주 꽉 찬 것은 아니지만요. 몇 번 엎치락뒤치락 하다 보니 이렇게 활동이 늘어져버렸네요. 처음에는 ‘노동과 노동권’을 풍부히 해보자는 취지로 일하지 않을 권리에 대한 고민을 했어요. 2008년에 노동권을 정리하면서 추상적으로 노동권을 보장하는 것은 노동하지 않을 권리도 보장하는 것이라는 선언을 했었기에 노동하지 않을 권리를 구체화해 보고픈 욕심이 있었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노동에 갇힌 노동에 대한 정의나 그러한 노동만을 상정하는 것을 벗어나려면 노동하지 않을 권리도 보장되어야 한다는 추상적인 생각이었지요. 사실 권리를 거절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으면 사실상 권리는 강제가 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지요.

노동하지 않을 권리에서 노동윤리로 넘어오다

그래서 ‘여가’와 ‘노동시간 단축’, 노동권의 역사, 노동거부를 정리하기 위해 "일 중독 벗어나기", "게으를 수 있는 권리", "8시간 노동 대 6시간 노동", "일과 여가", "노동사회 비판과 문화사회의 이론적 지도" 등을 공부했어요. 노동을 다룬 영화도 보고요. 우리 사회에서 노동은 어떤 위치에 있고, 노동에 대한 생각은 뭔지 생각하는 기회였어요. 그러면서 드는 고민은 신자유주의의 불안정노동과 실업이 일상이 된 사회에서 과연 우리가 일하지 않을 권리를 핵심으로 하는 것은 현실과 많이 떨어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노동에 대한 태도-노동윤리를 인터뷰해서 자본주의 초기에 있었던 노동윤리와의 차이나 공통점 등을 정리해보기로 결정했지요. 노동윤리라는 말이 많이 낯설지만 ‘노동을 강조하는 가치체계’나 ‘노동에 임하는 태도’ 등을 말하는 것이에요. 그 유명한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노동윤리가 기독교정신과 만나 강조되고 있지요. 자원활동가들과 함께 읽은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를 보면 자본주의 초기와 지금은 노동의 신성함을 유지하며 성실함을 강조하는 큰 맥락은 비슷하지만 ‘열정’이나 ‘창의력’까지도 노동에 대한 태도도 있는지를 따진다는 면에서 다르지요. 물론 그만큼 어려워진 것이지요.

개별 사람들이 일하면서 노동윤리를 어떻게 내면화하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인터뷰를 했어요. 되도록 다양한 연령대와 성별, 여러 직종이나 다른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인터하려고 했지만 쉽지는 않았어요.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 프리랜서 미디어교육활동을 하는 사람, 노점상, 오랜 기간 공장에서 일해 중견급이 된 사람, 대기업 노동자, 노숙인과 장애인 등을 인터뷰했습니다. 특히 대기업에서 정규직으로 오래 일한 노동자를 찾는 일이 쉽지 않았답니다. 대부분 노동에 대한 기대와 가치 부여가 많기도 했지만 인터뷰한 노숙인은 노동이 아닌 다른 가치 있는 활동을 하는 것에 대한 기대가 있었어요. 노동윤리에 갇히거나 노동에 강박당한 경우가 많기는 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점에서, ‘노동에서 벗어나기’의 가능성을 보기도 한 것이지요.

노동에 강박당하지 않으면서 포획된 노동이 자본에 저항하기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표현을 빌자면, 자본주의가 탄생하면서 강조된 노동하는 인간의 상이기에, 노동에 한정되지 않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인권을 넓히고 노동권을 넓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노동이 아닌 행위, 교환가치나 임금으로 환원되지 않은 인간 행위에 대한 이해로 확장하기 위한 고민을 하고 있지만, 지금의 현실에서 노동하는 인간-노동자가 경시되는 현실에서 이러한 고민이 현실과 동떨어진 것은 아닌지 반추하게 됩니다.

얼마 전 어떤 대학교에서 청소노동자들을 어머니로 부르지 않고 노동자라고 표현하자는 제안을 했더니, 그것은 청소하시는 분을 낮추는 게 아니냐는 걱정 어린 반응이 있었다는 일화에서 보여지듯이 노동자는 노동의 신성화와 정반대로 경원시되고 있는 현실이니까요. 가까이는 대한문에서 싸우고 있는 정리해 고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 울산 송전탑에 있는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들, 모두 존중받고 있지 못하니까요.

그러면서도 취업하지 못한 20대의 청년들이나 일터에서 쫓겨난 사람들이나 노숙인들을 ‘노동에서 미끄러져 나온 사람’이라는 이유로 무능력자, 쓸모 없는 사람들로 취급합니다. 노동을 하지 않는 인간은 사회에서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어쩌면 노동을 사회구성원의 의무로 상정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를 위해서 ‘노동’을 신성시하고 ‘노동’을 유일의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요.

그러니 저의 머리에서는 노동에 강박당하지도, 자본에 포획당하지도 않으면서 자본권력에 맞서는 것은 가능할지 언제나 의문부호가 떠오릅니다. 그렇다보니 아직 글로 정리되지 못했고, 아직 인권오름에 연재할 기사로 작성되지는 못 했어요. 그래도 노동에 대한 고민을 해왔던 것이 중심활동팀을 하면서 많이 도움이 되는 거 같아요.

좀 더 집중해서 자본에 저항하는 노동의 확장을 고민하면서 노동윤리 기사를 쓰도록 노력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