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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밑거름이 되길 바라며

밑거름이 되길 바라며

지은 (자원활동가)


만약 사랑방에 있는 분들이 저를 보고 ‘저거 뭐하는 놈이냐’라고 생각하신다면 전적으로 내 탓이며, 먼저 죄송한 마음부터 밝힙니다.

사랑방을 처음으로 찾아오고 지금까지 두 달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처음 사랑방을 방문했을 때는 연줄이나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일단 무작정 찾아와 잘 부탁드린다고 말하고는 거의 한 달 동안 찾아오지 않다가, 인권영화제 시작되기 며칠 전에야 겨우 기웃거리며 나오기 시작하여 영화제가 끝나고 6월 한 달 동안 2주 안되게 사랑방을 나왔습니다. 한 주 동안 전혀 사랑방에 나오지 않기도 하고 아무런 얘기 없이 무작정 빠졌던 날들과 더불어 부적절한 행동을 사과드립니다.

비록 자원활동가라고 하지만 인턴 같은 입장으로 일을 배우기로 마음먹고 들어온 건데 그런 식으로 빠진 것은 스스로가 진지하게 임하지 못한 이유가 컸습니다. 씨도 안 먹힐 정도의 변명을 하면 나 자신이 적극적이지 못했고, 혹여나 아무 일도 안하고 두려움에 지레 겁먹었습니다.

아직 열아홉 십대의 끝물에 아슬아슬 걸쳐있지만 아직 한 번도 ‘알바’조차 해보지 못한 초년병이 경험한 제대로 된 ‘사회생활’은 상상했던 것과 달랐습니다. 처음에는 커피를 타거나 복사를 하고 청소와 기타 잡일로 밑바닥부터 시작하면 되는 줄 알았지만 이게 웬 걸 이곳은 모두가 평등하고 존중받는 곳이었으며, 제가 생각했던 것처럼 다른 윗사람의 지시를 받고 일을 하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활동가분들은 (사적인 것 없이) 모두 자신의 의지로 자립적인 인간처럼 일을 하고 계셨고, 사랑방 안에서는 차별이나 강요 같은 것 없이 인권의 취지를 이미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이런 자유로운 분위기에 저는 작아져버렸습니다. ‘강요’와 ‘강제’가 없으니 스스로 생각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하므로 일을 잘 찾지 않은 저의 존재가 진지하게 일을 임하고 있는 다른 활동가 분들에게 폐만 끼치고 사랑방의 분위기를 흐리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 자책하며, 그만큼 사랑방은 성숙한 분들이 모여 자립적으로 꾸려가니 저도 그에 맞춰가야 합니다.

지난 5월말 인권영화제를 상영하는 동안 최은아 활동가님과 대화하면서 제가 아직 정말 진지한 각오로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이는 스스로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었으며 부끄러웠습니다.

가장 기본으로 돌아가 사랑방을 찾아온 연유를 고민해 보니 사람들이 쉽게 꺼려하는 (돈을 위해서가 아닌) 일이지만, 소금같이 꼭 있어야만 하는 일하는 곳에 찾아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온실 속의 꽃으로 컸다는 자부심(?)으로 나를 아껴주고 키워준 사람들로부터 받은 은덕을 다른 의미있는 일을 위해 바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저의 태도가 다시금 진지하지 못했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 전에 몇 번씩 빠지던 것은 변명을 할 수 없지만 앞으로는 스스로가 책임을 맡을 사람이 되기 위해 저의 개인적인 일상부터 계획할 겁니다. ^^

조금 다른 이야기도 6월 16일 정규직, 비정규직 노동자 부당해고에 연대 파업을 지지하는 행진대회가 열린 날, 준비팀으로 정록씨, 초코씨와 쌍용노동자 분향소에서 행진대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날은 경찰의 방해로 행진대회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여 아쉬움이 진하게 남고, 답답한 마음이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분향소로부터 가까운 곳에 느닷없이 분위기가 소란스러워졌고, 초코씨와 함께 그곳으로 갔을 때 경찰이 갓길에 가까이 놓여있는 쓰레기봉투더미들을 인도 쪽으로 몰아내려 하였고 다른 활동가 분들이 경찰들에게 항의하고 있었고, 초코씨가 앞장서서 항의하였습니다.

그때 평소 착하고 고운 사람이 그토록 맹렬하게 화를 내는 것은 저에게서는 매우 뜻밖이었습니다. 대개 저 같은 사람은 자신의 이익에 결부될 때는 화를 내지만 남이 부당한 처사에 처했을 때 몸을 사렸고, 비슷한 사람들의 경우도 많이 봐왔지만, 남을 위해 특히 자신보다 더 고통 받는 사람을 위해 화를 낼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보기란 매우 드물었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약자를 위한 마음과 앞장설 수 있었던 용기가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사심 없는 사람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분노보다 강렬하였고 때 묻지 않은 순수함으로 그럴 수 있었던 초코씨가 부러웠으며 동경되었습니다.

스스로의 이기적이었던 행동을 반성하고 나보다도 더 약한 사람들을 위해 행동할 때, 세상이 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것을 깨닫게 해준 사랑방에 감사한 마음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