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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대다그대

내 인생의 신자유주의


10월에는 ‘내 인생의 신자유주의’을 아그대다그대 이야기합니다.

아해
"부르주아지는 자신이 지배를 확립한 곳에서는
어디서나 모든 봉건적, 가부장적, 전원적 관계를 종식시켜 왔다.
부르주아지는 인간을 '타고난 상하관계'에 묶어 놓는 잡다한 봉건적 끈을 가차없이 끊어버렸으며,
그 외의 모든 인간의 관계를 적나라한 이기심, 냉혹한 <현금지불관계>로만 만들어 놓았다.
또한, 가장 신성한 종교적 정열의 환희,
기사도적 열정의 환희, 세속적 감상주의의 환희를
자기중심적 타산이라는 얼음같이 차디찬 물 속에 빠뜨려버렸다.
또, 개인의 존엄성을 <교환가치>로 용해시켜 버렸으며,
결코 무효화될 수 없이 공인된 무수한 자유 대신 저 <자유무역>이라는
단 하나의 파렴치한 자유를 세워 놓았다.
한 마디로, 부르주아지는 종교적, 정치적 환상으로 가려진 착취를
적나라하고 후안무치하고 노골적이고 야수 같은 착취로 대체한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지금까지
존경과 경건한 경외심으로 받들어졌던 모든 직업으로부터 그 후광을 걷어냈다.
의사, 법률가, 성직자, 시인, 과학자를
자신이 보수를 주는 임금노동자로 전환시켜 버린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가족으로부터 그 감정의 장막을 찢어내고
가족관계를 <단순한 돈의 관계>로 만들었다."
- 공산당선언 中

돈,돈,돈...
내가 경험한 10년 남짓한 시간 동안에,
마르크스가 얘기했던 저 모양새가 한국사회에서
점점 확실하게 드러나는 꼴을 보고 있는 것 같다.
김대중, 노무현 때는 그나마 '은폐'라도 해보려는 분위기가 있었다면,
이명박 시절에는 정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 같다.
이런 세상은 쫌 무섭다.

돌진
#1. 1997년 IMF가 터졌을 때,
다행히 나와 우리 가족들은 큰 피해를 입진 않았지만 주변에 갑자기 가세가 기울어 어려워진
대학 친구, 선배, 후배들이 정말 많았다. IMF 이후로 대학문화도 많이 바뀌었던 것 같다.
#2. 2000년 초반 쯤 모든 사람들이 펀드, 펀드 했던 것 같다.
그때 한창 재테크라는 말도 유행했던 것 같고,
CMA니 뭐니 하며 처음 들어보는 말들도 쏟아졌던 것 같다.
내 주변에서 사회운동 하는 사람들 중에도 펀드 이율이 얼마라니,
얼마를 벌었다니 등과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3. 사는 게 빡세졌다.
돈을 그냥 저축하거나 가만있으면 왠지 손해 보는 것 같고,
예전엔 직장을 구할 때 정규직을 기대하는 게 기본이었다면
이젠 아예 비정규직이 기본이 된 것 같다.
집값이 너무 올라 사는 게 막막해졌다.
하지만 좀 일찍 취직해 악착같이 돈을 모은 친구들은
벌써 어디에 집을 샀는데 몇 천 만원이 올랐다더라, 하는 말이 들린다.
그냥 평범하고 정직하게 살면 왠지 도태되는 것 같다.
#4. 우리나라에 외국인이 많이 늘어난 것 같다.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들도 많이 늘었다고 한다.
그만큼 외국으로 나간 한국 기업이 많아졌기 때문이겠지?
난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벌 것을 고민하며 학교에 다니고 있다.
이런 것도 신자유주의의 영향인가? -_-^


신자유주의란 말은 "신자유주의 분쇄 투쟁"이라는 구호에서 처음 접했었다.
신자유주의, 자본의 세계화에 대한 여러 문제제기를 접하면서
신자유주의는 마땅히 분쇄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근데 그 놈을 어떻게 분쇄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얘기를 하지 않았던 것 같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신자유주의 분쇄"라는 구호를 외친다.
신자유주의가 활개를 치는 동안 신자유주의 분쇄를 외쳤던 우리의 영역은 얼마나 넓어졌을까.

미류
<신자유주의의 역사와 진실>을 비롯해
이런저런 책이나 문서를 읽으며 '신자유주의'라는 단어를 입에 바르게 된 건
아무래도 97년 IMF경제위기를 거치면서부터인 듯.
그 다음해인가, 목포에 있는 결핵병원이 민영화될 위기에 놓여
치료를 받던 환자분이 서울에 올라와 싸웠던 적이 있다.
한 명은 10대 남자 아이였는데, 지금은 건강하게 지내고 있을 런지.
민영화뿐만 아니라 정리해고, 노동유연화 등
책에 나온 내용들은 이미 현실에서 먼저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노숙인.
주위에 노숙인 진료활동을 하러 나가는 친구들이 몇 명 있어 따라 나가기도 했는데,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보면서 조금 더 다르게 보였던 것 같다.
그 전에는 '노숙인'이 있다는 사실도 잘 몰랐고
그저 거리에서 자는 술 취한 사람들 이 정도의 생각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그게 주거권의 문제이자
빈곤과 인권의 문제라는 걸 더욱 느끼게 되는 듯.

주거권 얘기하니 또 덧붙일 건,
이놈의 부동산금융상품들이 어찌나 복잡해졌는지,
제1은행권의 예금이나 적금도 헷갈리던 수준의 나에게,
빚을 팔아서 이윤을 남기는 온갖 영어약자로 쓰인 투자 상품들이,
일단 이해하기 어려워 짜증났던 기억.

그리고 직장 구하기 어려운 주위 사람들,
구해도 엄청 늦게까지 일하고, 봉급은 쥐꼬리, 이런 현실이 '신자유주의'가 다가오는 방식인 듯.

그런데 사실 이게 꼭 '신자유주의'라고 이름 붙이지 않더라도,
사람보다 이윤이 중요한 세상에서는 충분히 벌어질 일들일 텐데,
그리고 신자유주의 이전이라고 할 만한 사회보장 시스템을 누려본 적 없는 나로서는
일상보다는 정책으로 더 다가오는 듯하다.
유럽에서는 신자유주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사회주택을 팔아 치우기도 많이 했다던데...
어쩌면 차분히 삶을 돌아볼 시간도 누리지 못하고
여기저기서 터지는 현안들에 시달려야 하는
지금의 상황이야말로 피부로 느끼는 신자유주의? ^^;;

바람소리
신자유주의라는 말이 처음 횡행할 때 참 많이 논쟁을 했던 기억이 나네요~
한 15년 전쯤이지요.
당시에는 신자유주의도 자본주의인건 맞는데 그걸 꼭 특화할 필요가 있겠냐는 말들이 많았어요.
공공영역까지 이렇게 시장과 기업이 파고드는 것 뿐 아니라
사람들의 사고방식까지 바꾸어놓을 줄은 몰랐지요.

제가 신자유주의를 피부로 느낀 건 아마도 자원활동가들을 만나면서,
20대 대학생들의 고단한 삶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인 거 같아요.
어느 누구도 20대의 삶을,
학자금을, 경쟁적 수업 분위기를 벗어나기 어려우니까요.

그래도 그 틈에서 새로운 사회에 대한 꿈을 갖고
사랑방에 자원활동하러 오는 대학생들을 보면 가능성을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