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후원하기

활동가의 편지

선거 단상

#1. 
사무실에 츄리닝을 입고 나온 적이 있어요. 전형적인 츄리닝은 아니지만, 집에서 편하게 입기에 최적화된 옷이라고 볼 수 있죠. 물론 저는 집 밖에서 못 입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입고 나왔고요. 사무실에서 몇 명이 잠시 쉬면서 떡도 먹고 수다도 떨고 있었어요. 한 활동가가 제 옷을 보더니 “너 그거 입고 지하철 타고 왔어?”라고 물었어요. “응! 나 홍대 사는 여자야~” 

#2. 
원래 지난달 상임활동가 편지를 제가 쓰기로 했었어요. 갑자기 박래군 활동가가 출소하게 돼서 편지를 급 양보했죠. 편지를 쓰려고 만들어둔 파일에 저는 이런 메모를 남겨뒀더군요. “터키 - 선거” 아마도 안식주 동안 다녀온 터키 이야기와, 선관위의 적극적인 정치로 우리들의 정치가 실종되고 있는 선거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든! 연결시켜 보려고 했나 봐요. 

#3. 
투표 전날 묵직한 봉투에 담겨있는 선거 공보물들을 모두 꺼내서 하나씩 봤어요. 서울시장이나 교육감으로 누구를 뽑을지 정도는 마음을 정해뒀는데, 구청장 구의원은 영 하나도 모르겠더라고요. 꾸역꾸역 보기는 했는데 눈에 잘 들어오지는 않더라고요. 나름 홍대 ‘사는’ 여자였는데, 내가 살고 있는 마포구에 구청장이나 구의원이 누가 되는지가 피부에 와닿지 않았던 것이지요. 

#4.
고등학교 1학년 때였어요. 3월에 반장 선거가 있었지요. 만난 지 열흘도 안 된 50여 명의 사람들이 누군가를 장으로 뽑는 자리였지요. 어쩌다가 후보로 선거에 나가게 되었어요. 나름 유세랄까, 후보들의 말을 한 마디씩 듣는 자리에서 제가 무슨 얘기를 했는지 다 기억나지는 않아요. 다만, “제가 반장이 되면, 다리가 날씬해 보이는 스타킹 색깔을 알려드리겠습니다.”라는 말을 했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있어요. 그리고 저는 반장이 되었어요. 스타킹 색깔 덕분이었을까요? 

#5. 
올해 지방선거를 보면서 굉장히 불편했던 말이 “투표하자”였어요. 투표, 해야죠. 그런데 왜 해야 할까요? 선관위는 그것이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인 것처럼 이야기했어요.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며 찬양하기도 했고, 투표하지 않는 사람은 마치 개념 없는 사람인 것처럼 희화화한 패러디 포스터들도 많이 떠돌아다녔어요. 하지만 올해 지방선거를 보면 선거처럼 민주주의를 갉아먹는 게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선관위는 4대강이며, 무상급식이며, 모두 공정선거에 위배된다며 입도 뻥긋 못하게 호들갑을 떨며 표로 말하라고 했어요. 민주당이나 유권자 운동을 펼치는 많은 이들도, 이명박을 심판하자며, 표로 말하자고 했지요. 왜 입을 두고 표로 말해야 하죠? 

#6. 
얼마 전부터 <인권오름>에 [이 주의 인권수첩]이라는 꼭지가 실리기 시작했어요. 일주일 동안 있었던 인권 관련 소식들을 모아보고 주요한 흐름을 정리하면서 짧은 논평(촌철살인을 꿈꾸지만 늘 미끄러지는)을 덧붙이는 꼭지예요. 이걸 준비하면서 매일 신문과 인터넷 매체들을 모니터링해요. 그런데 지방선거가 가까워질수록 온통 선거 얘기로 가득 차, 인권 관련 소식들이 잘 보이지 않더라고요. 물론 선거 자체가 인권과 무관한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후보들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나 품평들, 지방선거에 대한 훈계들 자체가 인권소식은 아닌 듯해요. 어느 순간, 월드컵이나 올림픽으로 중요한 인권 사안들이 묻히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금메달을 몇 개 땄는지나, 민주당에서 몇 명이 당선됐는지나. 

#7. 
지방선거 결과에 대해 말들이 많아요. 선거가 끝나면 언제나 그랬지만, 이번 결과는 여론조사로 예측됐던 것과 많이 달라서 그런지 여기저기서 머리를 굴리는 소리가 바스락바스락 분주합니다.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한나라당의 패배, 민주당의 승리겠지요. 이게 인권의 승리라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이 조건에서 한국 사회의 인권 수준을 높이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시작해야겠지요. 그런데 그리 많이 조건이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요? 특히나 민주당의 분위기가 그런 우려를 높입니다. 이만큼의 결과를 얻은 데에는 민주당 자체보다 이명박 싫어!의 힘이 더 큰 것이 분명합니다. 결국 선거 결과는 이명박에게 여전히 붙들려 있는 셈이지요. 이명박이 덜 싫어지면 의미없어질 결과라는 말입니다. FTA나 평택, 새만금 등 과거사를 굳이 끄집어내지 않더라도, 민주당이 어떤 정치를 할지, 어떤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큰 기대가 되지 않아요. 한명숙이 서울시장이 못돼, 진보신당이 뭇매를 맞고 있다는데, 정말 반성해야 할 것은 민주당 아닐까요? 

#8. 
홍대 근처에 살고, 서울에 살고, 한국에 살고 있는 나는, 4대강 사업도 막고 싶고, 무상급식도 되면 좋겠고, 동네 골목에 재활용 쓰레기를 모아놓는 곳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작은 투표용지에 담기에는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요. 민주주의는, 정치는, 그 이야기들을 펼쳐낼 장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투표보다, 나의 정치, 우리의 정치를 더욱 열심히 고민해 봐야겠다고, 저부터 반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