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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이야기

국회 동의 필요없는 상비군을 만들자고?

지난해 6월 이라크 저항세력에 붙잡혀 절규하던 김선일 씨의 1주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신들의 생명이 소중하듯, 내 생명 또한 소중합니다. 죽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그의 절규는 파병군 철수 투쟁으로 이어졌으나 지난해 말 파병연장 동의안은 결국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국민 다수가 반대하는 이라크 파병이 국회에서 저지되지 못한 현실은 대의제의 실상을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다음 투쟁을 준비하고 있는 반전운동 진영에 또 다른 도전이 닥쳐왔습니다. 이제는 정부 입장에서 '번거로운' 국회 동의절차를 아예 거치지 않고 '상비파병군'을 만들겠다는 논의가 제기되고 있는 것입니다. 유엔 PKO(Peace-Keeping Operations, 평화유지활동) 상비군을 창설해 유엔의 요청에 따라 언제든 파병할 수 있는 부대를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한국은 이미 1993년 소말리아에 252명의 공병부대를, 1995년 앙골라에 공병부대 198명을 PKO로 파견한 바 있습니다. 지금도 한국은 1994년부터 서부사하라에 의료지원을 명목으로 의료부대 20명을, 2003년 11월부터는 아프가니스탄 재건지원을 핑계로 참모요원 1명을 파견해두고 있습니다. 또 휴전·정전 감시를 이유로 △인도·파키스탄(1994년부터) △그루지아(1994년부터) △라이베리아(2003년부터) △부룬디(2004년부터) 등에 한국군이 파견되어 있습니다.

4월 21일 김명자 의원(열린우리당)은 '한국의 유엔PKO(평화유지활동) 참여 활성화 방안'을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습니다. 방효복 국방부 정책기획관은 'PKO 상비부대'를 “기존의 부대를 지정하여 평시 PKO 기본교육을 실시하다가, 파병요청 접수 후 부대통합 및 추가적 교육훈련을 실시하여 2개월 이내에 파병가능한 부대”로 규정하고 △특전·공병·의무·수송·통신·육군헬기·헌병 등 육군(약 800명) △경비(해병)·해상수송·해난구조·폭발물처리 등 해군(약 300명) △항공수송·폭발물처리 등 공군(약 100명)으로 구성하는 안을 발표했습니다.

외교통상부 천영우 정책실장 또한 현재 파병절차의 문제점으로 △국회의 사전동의가 필요하고 △신규파병은 물론 기파견 부대의 증원 및 파병기간 연장시에도 별도의 국회 동의가 필요해 △파병요청으로부터 실제 파병까지 6개월∼1년의 장기간이 소요되며 △임무기간 연장이나 규모조정시 신속대응이 불가능함을 들었습니다. 외통부는 “국회의 동의권은 존중하되 특별법을 제정, 파견규모, 기간, 성격 등 일정한 범위 내에서 행정부의 재량을 허용하자”며 △일정한 병력 상한선 내에서 유엔PKO 참여와 해외 긴급재난구조를 위한 해외파병에 한해 국회에 사전·사후 보고하고 국회의 반대, 철수 결의로 파병철회, 철수가 가능하도록 하거나 △정부가 파병결정을 국회에 통보한 후 일정 기간 내에 국회의 반대가 없는 경우 파병할 수 있도록 하고 국회의 명시적 반대가 없으면 파병 승인이 이루어진 것으로 간주하는 안을 제안했습니다.

아직 법안 초안이 나오지 않았지만 비슷한 법안이 지난 16대 국회에서 발의된 적 있어 윤곽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2003년 김용학 의원(한나라당)이 대표발의한 '평화유지활동 목적의 해외파병을 위한 상비군 창설 법안'(아래 김용학안)은 △2개연대의 상비군을 창설해 △부대는 자원병(일반병사 포함)으로 구성하며 △정부가 파병요청을 하면 국회는 3일 이내에 "최우선적"으로 동의안을 처리하도록 했습니다. 김용학안은 법안 취지에서 “(여러 나라들이) 전투 목적의 참전이 아님을 감안하여 국회 동의절차를 생략하고 행정부 결정만으로 신속히 파병할 수 있도록 제도화”하고 있다며 “일단 법을 제정하여 PKO 활동을 담당할 부대를 2개 연대 규모로 사전에 창설하여 훈련하는 등 상시적으로 운용하다가” 유엔이 요청할 경우 “국회로 파병안을 이송하여 동의절차를 얻는 즉시 1개 연대급 병력을 파병”하고 “교대시기가 다가오면 대기 중인 1개 연대를 교대하게 하여 파병”하며 “귀대한 부대는 새로 재편하여 다음 임무를 위하여 훈련”하도록 했습니다.

고작 3일간의 동의안 처리 기간은 파병의 타당성 여부를 검토하는 국회 동의권을 사실상 무력화시키는 것입니다. 또 구체적인 직제와 병과(보병, 공병, 의료 등)는 대통령령으로 정하도록 해 전투병·비전투병 파병 논의를 무의미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평소에는 비전투병으로 치장하다가 대통령령을 수정해 병과를 바꾸기만 하면 언제든 전투병을 투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 “(PKO 파병이) 단순한 도덕적 차원의 기여를 넘어 우리 국익의 극대화와도 직결”되고 “국제무대에서 국가입지를 강화하고…전후 복구현장에서 우리기업의 진출여건조성 등 국익을 적극적으로 증진시키는 기회가 된다”며 ‘PKO 상비군'이 '상시 파병군'임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김용학 안에서는 사전에 국회동의절차를 거치도록 했지만 김 의원 주최 토론회에서 발표된 외통부와 국방부의 안은 이마저도 생략돼 “국회는 선전포고, 국군의 외국에의 파견 또는 외국군대의 대한민국 영역안에서의 주류에 대한 동의권을 가진다”는 헌법 제60조 2항에 명백히 위배됩니다. 사안이 긴급하고 중대할수록 국회동의절차와 국민적 논의 과정 중요하며 사안이 일상적인 것이라면 국회동의 절차를 생략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 상비부대의 필요성으로 '국위선양', '청년실업 해소, 취업' 등을 들고 있는데 이는 파견 명분이 궁색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일 뿐입니다. 이에 대해 반전운동 진영은 적극 반대운동에 나설 태세입니다. 지난 5월 6일 파병반대국민행동은 '(가칭)해외파병법 대응을 위한 내부워크샵'을 열고 대책 논의에 나섰습니다. 참석자들은 국회동의절차를 생략하고 해외파병을 추진하려는 흐름에 대해 “위헌 소지가 명백하고 국민반대가 심각해 정부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망하면서도 유엔 PKO가 △유엔의 요청이라는 외피를 쓰고 있고 △평화유지활동이라는 긍정적 이미지를 표방하고 있어 반대운동의 장벽이 될 것이라는 점에도 공감했습니다. 워크샵에서는 먼저 외통부와 국방부의 안이 유엔 PKO와 다국적군(또는 지역기구) 주도의 PKO의 차이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는 점이 지적됐습니다. 적대행위가 종식되어 평화가 회복된 국가에 정전감시 등을 위해 파견되는 PKO의 일부인 PKF(Peace-Keeping Force, 평화유지군)와는 달리 다국적군(MNF)은 이해관계가 있는 국가들이 적대행위의 개연성이 높은 지역에 파견하며, 유엔의 승인을 받지만 직접 지휘·통제하에 있지 않고 비용도 참여국들이 부담합니다. 91년 걸프전은 이라크를 쿠웨이트 영토에서 철수시키는 것에 한정된 안보리 결의687호와는 달리 미국 주도의 다국적군이 이라크 북부와 남부를 점령하는 등 전쟁을 계속해 유엔 결의를 위배했습니다. 게다가 이번 이라크전쟁의 경우처럼 아예 유엔의 승인조차 받지 않은 전쟁 또한 있습니다. 결국 “다국적군을 PKO의 이름으로 눈가림하여 국회 동의 없이 파병하려는 속내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2004년 국방백서에서도 이라크에 파병된 서희·제마부대와 자이툰부대를 아무런 성격규명 없이 국제 평화유지활동의 일환으로 다루고 있기도 합니다.

유엔헌장은 개별국가의 무력행사를 금지(제1장 2조 4항)하면서 분쟁이 일어났을 경우 “분쟁 당사자는 우선적으로 교섭, 심사, 중재, 조정, 중재재판, 사법적 해결, 지역적 기관 또는 지역적 협정의 이용 또는 당사자가 선택하는 다른 평화적 수단에 의해 문제를 해결하도록 해야 한다”(제6장)고 규정해 분쟁해결의 평화적 방법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국제적 평화와 안전의 유지 또는 회복에 필요한 공군, 해군 또는 육군에 의한 시위, 봉쇄 및 기타의 행동을 포함시킬 수 있다”(제7장)고 규정해 무력적 방법 또한 규정하고 있습니다. 유엔 PKO는 5대 원칙으로 △분쟁 당사자의 정전 합의 △당사자의 동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으면 분쟁의 한쪽 당사자에게 유리하게 행동하지 않는 중립성 △5대국 및 이해관계국의 군대는 원칙상 제외하고 조건이 깨질 경우 철수 △요원의 생명·신체의 방어 또는 임무수행을 방해하는 기도에 대한 저항을 제외한 무력 불사용의 원칙 등을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PKO는 이런 원칙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라크·쿠웨이트 감시단(UNICOM:1991∼2002)은 이라크의 동의 없이 미국·영국이 참여했고 제2차 유엔 소말리아 PKO(UNOSOM II:1993∼1995)는 유엔헌장 제7장에 근거한 평화강제활동 권한을 부여받아 무장세력의 무장해제에 착수했습니다. 당시 미국은 7천명의 부대를 추가로 파견해 아이디드파와 대결하는 등 독자적인 작전을 전개하다 미군 병사가 사살되면서 국내에서 철수여론이 일기도 했습니다. 결국 안보리는 UNOSOM II를 조기 철수시켰습니다. 이처럼 PKO는 분쟁발생요인을 줄이고 완화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분쟁발생요인을 증가시키는 강대국의 행태를 그대로 둔 채 분쟁이 발생한 경우 사후대책을 중립국이나 약소국에 분담시킴으로써 강대국 지배체제를 담보해주는 활동에 불과하다는 평가마저 있습니다.

2대 사무총장 함마슐트가 “PKO의 유엔헌장 상의 근거는 제6.5장”이라고 말한 것처럼 현실의 유엔 PKO는 유엔헌장 상의 근거를 갖지 못한 관행적 개념입니다. PKO는 유엔의 이름을 내걸더라도 전적으로 정당화되지는 않으며 오히려 그 정당성을 개별 사례별로 주의깊게 봐야하는데도 이를 명분으로 '국회동의 없는 해외파병'을 추진하는 것은 결국 국회 논의과정에서 분출하는 국민들의 반전여론을 피해가려는 속셈일 뿐입니다.

워크샵에서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의 고영대 연구원은 바람직한 PKO 활동 참여기준으로 △당사자의 동의와 무력불사용 원칙 등 PKO 활동의 원칙이 지켜질 수 있어야 하고 △어떤 경우에도 분쟁 한 당사자와 교전하게 되는 다국적군으로의 파병은 안되며 △미국 등 강대국의 요청이 아니라 자주적인 참여결정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반해 PKF가 포함되는 PKO는 군사적 조치로 어떤 경우에도 분쟁방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김 의원실에 준비하고 있는 법안은 늦어도 10월에는 나올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유엔의 이름'으로, '평화유지'를 핑계로 상시 파병체제가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김수열 시인은 김선일 씨의 죽음에 항의하는 파병반대 집회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너를 부여안고 눈물 흘린다 한들 / 풀 한 포기 키워내겠느냐 / 꽃 한 송이 피워나겠느냐 / 그러니, 시여 / 차라리 죽어버려라" 국민 다수가 반대하는데도 국회가 파병동의안을 통과시키는 이 어이없는 상황에 시인은 '시의 죽음'을 선언하며 절규합니다. 이제 그나마 있던 국회 동의 절차마저 생략하게 된다면 '국익'을 빙자한 파병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됩니다. 그때 죽는 것은 '시'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