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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중국에서 만난 나 - ‘인문학적 여행’을 꿈꾸다

2003년 청소년 공부방을 새로 담당하게 되면서 “인권교육”을 접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인권교육에 대해 보면 굉장한 인연이란 생각이 지난 3월 중국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사랑방에서 맞이한 첫 안식월을 위한 나의 선택인 셈입니다. 왜 ‘중국’이냐구요? 아마도 중국과 맺은 저의 인연을 여전히 버리지 못해서였던 것 같습니다. 대학 시절 우연한 계기로 중국 관련 학과에 입학한 후에도 중국은 나와 여하한 인연을 맺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래도 졸업은 해야겠다’는 생각에 부랴부랴 중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났습니다.
중국-베이징에서의 6개월간의 생활. 중국에서의 6개월이라는 시간은 4년의 대학 시절과도 맞먹는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모든 익숙한 것을 벗어난 새로운 공간에서의 홀로서기. 마치 민물고기가 바다로 나간 것과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6개월이라는 시간 내내 중국은 나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장을 내밀었고, 결국 그것은 6개월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복학한 이후에도 그 경험들은 나의 머리 속을 휘저었고 분명 나의 삶 일정한 부분에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방에서의 첫 안식월에 ‘중국여행’을 선택한 것은 어쩌면 나에게 재론의 여지가 없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안식월’이라는 것의 존재를 알게 된 바로 그 순간부터였는지도 모릅니다. 마치 ‘통과의례’처럼 나는 그 무언가에 이끌려 ‘무작정’ 중국여행의 첫발걸음을 내딛었습니다.

  3월 13일

    선상에 올라가봤다. 바다 한가운데. 이렇게 깊숙이 있는데도 바다는 여전히 파도가 넘실대고 있구나. 바다 한가운데는 파도도 고요할 줄 알았더니 그렇지도 않네. 마음 한가운데, 깊은 곳도 고요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겠구나. 마음의 고요는 깊은 곳을 찾음으로써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구나...

  3월 15일 취푸(曲阜)에서

    공자의 묘에 왔다. 무슨 묘가 무지하게 크다. 크고 오래된 건물들과 멋진 기둥들, 멋지게 뒤틀린 오래된 나무들, 딱따구리, 그리고 부실한 내용. 공자의 가르침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단지 돈냄새만 진동할 뿐… 공자의 후손들은 조상을 잘 둔 덕에 대대로 황실의 특별대우를 받으며 귀족으로 지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공자의 묘 바로 옆에는 공자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았던 ‘공자의 집’이 있다. 이놈의 집이 얼마나 큰지 담을 따라 걸어도 한참을 걸어야 한다. 마침 이 집 안에는 간혹 일어나는 농민봉기에 대비해 몸을 피신하기 위한 종탑이 있었다고 한다. ‘공자’라는 것이 지배계급에게 얼마만한 ‘프리미엄’인지, 또한 그것이 민중들과 관계맺는 방식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것같아 씁쓸함을 지울 수 없다.

    여기서(曲阜) 멀지 않은 곳에 맹자의 묘도 있다. 그런데 맹자의 묘는 이렇게 크지도 또 유명하지도 않다. 그래서 몇몇 중국인들에게 물어봤더니 대답이 영 신통치 않다. 별로 생각을 안해봤다는 게 더 맞지 싶다. 솔직하게 “모르겠다”고 말한 사람들도 있었으니. 몇몇 사람들은 “공자가 맹자의 스승이기 때문에 ‘공맹사상’이라고 부르는 것이고 제자가 스승보다 나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라고 했다.(‘청출어람’은 중국에서 온 말이 아니던가?) 과연 그런 이유 때문일까? 맹자가 공자의 문하생이긴 했지만 둘은 동시대의 사람이 아니다. 맹자는 공자의 2세대 후대인이다. 살아생전에 그다지 빛을 보지 못했던 공자의 사상은 맹자 대에 와서야 비로소 이름을 꺼낼 수 있는 정도가 된다. 맹자는 당시로서 ‘희대의 논쟁가’였다고 하니 이는 맹자의 능력 덕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당시 논쟁에 있어서 맹자의 ‘주적’은 묵가였다고 한다. 묵가 사상이 당시의 시대적인 주류 사상이었고 그 상대편에 도가가 있었다고 한다. 묵가 사상이 시대사상이 될 수 있다니… 그 인본주의에 놀랄 따름이다!) 이렇게 유가가 그나마 한 자리라도 차지할 수 있게 한 것은 맹자의 ‘맹활약’(그래서 ‘맹’활약인가? ^^;) 덕분일 텐데도 맹자는 여전히 찬밥 신세일 뿐이다. 왜 그럴까?

    공자는 주공의 시대를 이상향으로 설정하며 ‘충忠’을 강조한 것으로 유명하다. 맹자 역시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특이하게도 ‘민중의 고통을 헤아리지 못하는 왕은 민중의 손으로 그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 있다’는 과격한 말도 서슴지 않았다. 바로 ‘역성혁명’의 정당성을 설파했던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현재적으로 보면 ‘공산주의 경제 구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정전제’를 핵심 경제정책으로 제안하기도 했다. 그 사이의 진실을 충분히 알지는 못하지만 이 지점이 바로 공자와 맹자의 사후 평가 혹은 현재적 평가를 180도 다르게 할 수 있도록 하는 지점이 아닐까? 어떠한 체제의 지배계급이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지도 사상으로 ‘(일반적인) 공자의 사상’만큼 매력적인 게 또 있을까?

  3월 17일 구이린(桂林)에서

    구이린에서 유명하다는 중씬광창에 와있다. ‘광장’이라는 것 외엔 별다른 게 없다. 관광도시답게 바로 옆은 ‘완전’ 번화가이고. 번화가 상업은 정말 번창했다. 서양식 펍은 물론이고 ‘한국식’을 표방하는 상점도 적지 않다. 이곳도 한국 관광객이 적지 않은 모양이다.
    그런데 중국에서 흔하디 흔한 마오쩌둥(毛澤東)을 이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보통 시내 중앙 광장에는 거대한 마오 동상이 있기 마련인데 여긴 없다. 심지어 베이징의 각 대학 정문을 나타내는 표식과도 같은 마오 동상도 이곳에 있는 대학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대학 안에는 다소 왜소한 모습으로 쑨원(孫中山)의 삼민주의 기념탑만 있을 뿐이다. 마오는 어디에 간 걸까? 마오의 중국 공산당 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애써 감추고 싶은 남방 특유의 정서가 반영된 것은 아닐까? 쑨원이 주도한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은 인정할 수 있어도 마오가 주도한 혁명은 인정하기 힘들다는 것의 투박한 표현은 아닐까? 생각해보니, 1992년 덩샤오핑(鄧小平)이 남순강화를 통해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흑묘백묘론을 펼친 것으로 유명한 장소도 이곳과 그리 먼 곳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번화가를 지나다가 드디어! 마오를 발견했다. 마오는 크고 화려한 식당 앞에서 ‘실사구시’라는 네 글자와 함께 웃고 있었다. 바로 옆에는 ‘마오의 가정식 요리(毛家菜)’라는 네온사인이 현란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아니! 마오가 언제부터 ‘실사구시’를 외쳤던가! 마오가 들었다면 무덤에서라도 뛰쳐나왔을 것 같다. 중국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이러한 ‘실수’가 사실은 ‘실수’가 아닐 것이라는 게 가뜩이나 머리 속이 복잡해진 나의 확신이다. 사실 크고 화려한 식당의 주인은 덩의 사진을 걸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런데 덩의 사진을 걸기는 아직 뭣하니까 중국 민중들에게는 길흉화복의 ‘신’과도 같은 마오를 내세우면서 덩의 ‘주의’를 슬쩍 끼워넣은 것이 아닐까?
    확실히 현대 중국은 덩의 승리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덩은 과연 웃고 있을까?

  3월 24일 상하이(上海)에서
    ‘중공 1차 전국대표대회 회의장(中共一大會場)’에 갔다. 중국 공산당 1차 전국대표대회를 한 역사적인 장소. 이 대회에서 중국 공산당은 공산당 강령을 제정하고 중국 공산당을 공식적으로 창당했다. 1921년 7월 23일, 전국의 공산당 소조 대표 12명과 코민테른 대표 2명이 상하이로 모였다. 지금 중국 공산당원은 4천9백만여 명에 달하지만 당시에는 공산당원이래봐야 56명(수치는 정확히 기억이 안나네…)에 지나지 않았다. 그 중 마오가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다지 이름을 들어본 사람들은 아닌 듯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탈당을 하거나 심지어는 나라와 당을 배신하고 ‘친일’로 돌아선 사람들도 몇 명 있었다. 물론 국공내전 와중에 전사하거나 옥사한 사람들도 있었다. 또 한 편에는 일찍이 탈당했다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에 당시 당원으로 가입한 한 부류도 있었다. 1차 전국대표대회는 대략 10일 정도 진행됐는데 마지막 날에는 경찰의 추적에 쫓겨 강에 배를 띄워 배 위에서 대회를 마무리했다고 한다. 정말 드라마틱하지 않을 수 없다. 드라마틱하지 않은 혁명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런데 회의장은 생각보다 별 내용이 없었다. 게다가 상당 부분은 건국 이후의(비교적 최근의) 중국 지도자들의 방문 내용을 전시하고 있었다.
    도대체 그게 여기에 왜 필요한 거지? 많은 학생들이 단체로 그곳을 관람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회의장이 현체제 유지용, 공산당 선전용으로 이용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고 하는 ‘맹랑한’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다. 중국 공산당 창당의 근본적인 문제의식은 현대 중국에서도 여전히 살아있어야 할 텐데 말이다.
    게다가 회의장 주변은 온통 서양식 술집으로 둘러싸여 있다. 회의장 건물은 원래 프랑스 조계지였다. 그래서 건물들조차 모두 서양식이다. 그렇게 똑같이 생긴 수많은 집들이 회의장 주변에 몰려있었는데 얼핏 보면 도대체 어느 집이 중국 공산당 1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린 장소인지 분간조차 해낼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아이러니컬하게도 다른 집들은 모두 서양식 바 혹은 필리핀 이주 여성들이 노래를 부르고 사람들은 술 마시며 춤을 추는 클럽으로 바뀌어 있었다. 소위 상하이의 ‘신천지(新天地)’라는 곳이었다. 그것도 서양 노래만 부르고, 서양 사람들이 많았다. 그 곳에 있는 중국인들은 마치 서양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인 것 같았다. 그곳 클럽의 생맥주는 한 잔에 무려 68원(1만원 정도!)이나 했다. 분명히 나에게도 부담스러웠던 그 장소가 중국인들에게는 어떻게 비칠까? 일기를 쓰는 와중에 방(유스호스텔)에서 청소하고 있는 종업원과 간단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신천지라고, 가봤어요?” “예. 친구랑 한 번인가 가봤어요.” “거기 맥주값 진짜 비싸대요. 어우~ 그렇게 비싼 맥주를 어떻게 먹어요… 근데 그런 거 보면 화나지 않아요?” “뭐, 별로 신경 안써요. 돈이 있는 사람은 그만큼 쓰면 되는 거고, 없는 사람은 수준에 맞게 쓰면 되는 거 아니겠어요?” 그렇다. 내가 있는 곳은 ‘자본주의보다 더 자본주의적’이라는 상하이, 바로 그곳이다.

결과적으로, 이번 여행을 통해서 ‘중국에 대한 환상’을 깰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중국이 나에게 있어 일종의 ‘도피처’였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여행을 통해 여전히 내가 발붙이고 있는 곳이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곳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게 됐습니다. 이제 도피처에 대한 환상을 툭툭 털고 일어나 이곳에서 더욱 단단히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현실을 즐겨야’겠습니다. 그냥,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단순하게 살다보면 어느 순간엔가 인생을 알아가겠죠. 지금, 내가 발 딛고 서있는 이곳은, 인권운동사랑방, 바로 그곳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