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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농부가 되는 ‘숑’

 2000년 무렵이었던 것 같다. 그가 사랑방을 처음으로 찾아온 건. “숑입니다”. 숑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의 수줍은 듯한 표정 뒤에는 어떤 단호함이 감춰져 있는 듯이 보였다. 그것이 그의 첫 인상이었다.
 이후 숑은 사랑방 청년 후원자들의 모임인 ‘꿈꾸는 사람들’에서 활동을 하면서 사랑방의 이런저런 행사에 얼굴을 내밀었고, 언제나 뒤에서 그 일을 도왔다. 그는 전기기사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였는데, 3일에 한 번씩 밤을 꼬박 새야 하는 노동 조건에서도 언제나 사랑방에서의 활동에 열심이었다. 밤새 근무를 마치고 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사랑방 전기 공사를 하러 와주기도 했고, 매향리 집회, 평택 반전평화집회, 주말 서울 도심에서의 집회에도 함께 달려갔다. 혼자서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집회에 참여하기도 하고, 인권 보장을 요구하는 가슴띠를 만들어 단 채 마라톤을 뛰기도 했다. 그런 모습이 사랑방 식구들에게 작은 감동을 준 것은 당연했다.
 그러는 사이 숑은 믿음직한 자원활동가로 우리 곁에 다가서 있었다. 지난해 인권영화제 기간 동안에는 장애인 접근권을 보장하기 위한 제반 시설을 갖추는 일을 도맡기도 했고, 매달 ‘반딧불’ 때도 장비를 체크하고 관객들을 반응을 세심하게 살피고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겸손이 지나치다 싶을 만큼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숑이 이제 농사를 지으러 강원도로 내려간다. 유기농 농사짓는 법도 배우고 공동체 마을도 일구어볼 생각이란다. 자동차를 소유하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더니, 집 앞 작은 텃밭을 일구는 재미를 자랑하더니, 땀 흘려 생산하는 사람보다 중간에서 유통하는 사람이 더 많이 가져가는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더니, 이제 본격적으로 생태적인 삶을 찾아가겠다는 것이다. 다행히도 그의 선택을 가족들도 지지해주는 모양이다. 다만 시골 내려가 살더라도 결혼은 꼭 해야 한다던 어머니의 당부가 비혼으로 살기로 결심한 그를 부담스럽게 하는 모양이지만.
 사랑방의 입장에서 당장 생각하자면 정든 식구 하나를 멀리 떠나보내는 일이기도 하고, 소중한 일꾼 하나를 잃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좀더 장기적으로 생각하면 사랑방의 뜻을 강원도 한 작은 마을에서도 실천하는 일이고, 그가 선택한 생태주의적 삶의 방식으로부터 사랑방도 배울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이다. 그가 자리잡은 마을로 ‘반딧불’이 찾아가기도 하고 그의 농업철학이 우리를 감동시키고 도시에서의 우리 삶까지 변화시킬 날이 조만간 오지 않을까 즐거운 상상도 해본다. 그래서 섭섭하지만 그의 귀농을 진심으로 축복해주고 싶다.
 지난해에도 교육실에서 오래 자원활동을 하던 은관이가 전라도 장수로 귀농했다. 그리고 서울 도봉산 자락 아래에서는 사랑방 초창기 멤버였던 규홍 선배가 대안학교를 만들고 생활협동조합까지 꾸릴 실험을 하고 있다. 이들의 삶과 운동이 사랑방의 운동과 더 많이 소통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아마도 자신의 이야기를 쓴 이 글을 읽고 드러내기를 좋아하지 않는 숑은 얼굴을 붉히겠지. 그래도 숑의 소중한 발걸음을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도 간절해서 욕 먹을 각오하고 쓴다. 숑 미안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