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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죽음의 죽음

 운명처럼 인권운동사랑방 홈페이지를 방문해서 자원활동가 신청란에 클릭을 했다. 요모조모 따지는 성격이 아니기에 그렇게 자원활동은 시작되었고, 자료실에서 이것저것 타이핑하고 분류하는 작업을 했다. 인권운동사랑방은 생각보다 따스했고(사무실 온도가 아니다) 조금씩 활동가들과 만나면서 이들의 속내를 훔쳐보려는 불순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사실 개인적인 덕을 쌓는 일과 정통 교리와 철학을 익히는 일에 치중해온 가톨릭의 수도자인 내가 사회적 관심 안에서 ?실천?과 ?논리?로 무장한 이들을 만나는 것은 참 버거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톨릭이 7-80년대의 사회운동을 견인하던 시대분위기가 한풀 꺾이고 도리어 교회의 고위층들은 더욱 수구화되는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권위주의의 메카라고 불릴 정도의 탄탄한 교계제도는 점점 더 예수님의 복음과는 거리가 멀어지면서 유럽 교회가 겪었던 불행한 흐름을 답습하는 듯하고 시대의 징표를 읽지 못하고 있다. 진정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편에 서기보다는 기득권과 손잡고 그들의 영적인 피난처로써 퇴보하는 건 아닌가 우려되기도 한다.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단지 인간의 정당한 권리에 대한 믿음과 평화와 정의에 대한 신념으로 불의에 맞서 싸우는 이들을 대하는 심정은 기대감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고 할까? 선배 수사님들은 가끔 원칙을 앞세우며 따지고 드는 나에게 우려 섞인 조언을 하시곤 한다. 인내를 요구하시는 그분들의 삶에는 그분들이 몸소 실천하신 무게가 실려 있기에 묵묵히 수긍하는 편이지만 늘 마음 안에는 왜 정당한 물음들이 전통의 권위아래 짓눌려야 하는가? 라는 고민이 웅크리고 있었다. 사회는 진보되어 나가는데 교회는 도리어 그에 반한 과거의 패러다임 속에서 인간에 대한 사랑을 더욱 꽃피울 수 있는 담론들을 무시하는 건 아닌가 하는 고민과 함께.

 인간에게는 늘 자신 안의 신비로운 모습을 바라보는 눈과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눈이 있다. 이 두 눈 중에 한 눈이라도 감으면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불의한 현실 앞에 눈 감고서 오로지 자신을 바라보는 한 눈만이 더 진실을 바라볼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이 또한 너무나 비합리적인 주장일 것이다.

 인권. 인간의 권리. 이 권리의 원천을 바라보는 시각은 나름대로의 차이가 있겠지만 인간 권리의 원천은 그리스도교 교리 안에서도 명백하다. 우리나라 현실을 볼 때 국가보안법이라는 시대의 슬픔을 머금은 악법은 물론이거니와 신자본주의 아래 희생되는 민초들의 생존권, 특히 정상이 아니라고, 약하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억압과 불평등을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했던 장애우, 어린이, 여성의 권리에 대한 시각은 새롭게 수정되어야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바람의 와중에서 분명한 것은 그 지향과 문제의식이 분명한 힘으로 집중되고 구체적인 활동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인권운동사랑방에 와서 놀란 것은 권위와 전통의 조직체계를 멀리하고 평등하고 독립적인 관계에 기반 한 운영이었다. 친구사이에서나 가능할 것 같은 관계가 공동체를 구성하고 힘을 결집해 내는 모습은 정말 고무적인 반향이었다. 그리고 가난을 서원한 수도자인 내가 부끄러울 정도로 물질에 초연하고 당당한 모습들. 도리어 활동가들 안에서 그리스도인 보다 더욱 복음에 충실한 이들의 모습을 본다. 인간에게는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드러나는 그 모습을 통해서, 그 선과 평화와 정의와 진실을 통해서 그 사람의 진정성이 설득된다고 믿기에.

 인권운동사랑방에 와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생각 몇 조각. 우선 질박함. 그리고 뚜렷함. 온실 안의 장미 향기가 아닌 들꽃에서 느끼는 소담한 향기. 그리고 올곧음을 위해서 뛸 수 있는 용기와 의지. 그러나 아직 대중화에는 이르지 못할 것 같은 아름다운 미숙함.
우리 창설 사부님의 말씀대로 부정의 부정이라는 영성적 표현인 ?죽음의 죽음?을 사는 이들을 만난 것은 나에게 큰 부끄러움이자 축복인 것 같다.
이 인연이 오래 지속되기를 간구해 본다. 모든 이에게 평화가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