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후원하기

활동가의 편지

회사를 그만두고 비로소 보이는

안녕하세요, 사랑방에 막 발을 들인 자원활동가 미린입니다. 저는 회사에 다니다 몇 달 전 그만둔 후에 자원활동을 시작했고, 지금은 반월시화 공단노동자 권리찾기 모임 《월담》에 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회사에 다닐 때 야근과 주말 출근이 유달리 잦은 부서에 있었습니다. 부서 분위기가 엄격한 데다 실무자로서 해야 할 일의 양도 많았습니다. 밤 12시를 넘겨서 퇴근하여 1시 조금 전에 집에 들어오고,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집을 나와 8시에 사무실 자리에 앉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금요일 밤늦게 집에 돌아와도 토요일인 다음날 또 출근해야 한다는 사실이 싫어서 울다 잠드는 밤도 있었고요. 블라인드를 꼼꼼히 내린 사무실에 온종일 앉아있으면 갇혀있는 느낌이 들어 화장실 창문을 통해서 햇빛 쏟아지는 먼 풍경과 구름이 지나가는 하늘을 바라보곤 했습니다. 차마 연차를 쓸 수도 없을 만큼 일이 많아서 차라리 무슨 사고가 터지거나 일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딱 사흘만 쉬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몸과 마음이 지쳤습니다.

 

버틸 힘을 얻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회사에 다니는 마지막 몇 달 동안 일종의 버킷리스트를 생각날 때마다 적어 내려갔습니다. 회사만 그만두면 그동안 막연히 하고 싶다고 생각만 하던 일들을 전부 다 해보고 말리라고 이를 갈면서요. 그 목록에는 친구가 재미있다던 드라마, 회사 선배가 추천해준 만화책 제목부터 시작해서, 재봉, 중국어 회화, 캘리그라피 배우기 등의 온갖 자질구레한 소망을 모았습니다. 인권운동사랑방에서 후원 이상의 활동을 하는 것도 꼭 하고 싶은 일 중 하나였습니다.

 

퇴사 후 지금은 이 목록에 적힌 일들을 하나씩 지우고 있습니다. 매일 타던 사당행 지하철을 타고 회사가 아닌 중국어 학원으로 향한 첫날, 정말 오랜만에 벅찬 행복감을 느꼈습니다. 여성인력개발센터에서 공업용 재봉틀 쓰는 법을 배워서 치마를 하나 만들었고, 캘리그라피는 퇴사 이후 지금까지 일주일에 한 번씩 배우는 중입니다. 버스를 탈 때면 화장실 창문으로 보던 풍경을 부러워하던 몇 달 전의 저를 떠올리며 가급적 햇빛을 많이 받는 쪽에 앉습니다. 여러 모로 복에 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어요.

 

한편으로는 이렇게 자문해보기도 합니다. 과연 지금 누리는 행복은 꼭 회사를 그만둬야만 누릴 수 있었나, 하고요. 제 근로계약서에 적힌 하루 근무 시간은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아홉 시간이었습니다. 정말로 오후 5시까지만 일하고 퇴근했다면 매일 햇볕을 쬐며 퇴근할 수 있었을 겁니다. 만화방에서 3시간 놀고도 10시 드라마 본방을 볼 수도 있었겠지요. 지금 듣는 캘리그라피 수업은 저녁 7시부터 시작하니까 그것도 퇴근 후에 들을 수 있었을 겁니다. 결국 근로계약대로 일하고 쉴 수 있고, 노동이 조금 더 존중받는 세상에 살고 있었다면 퇴사할 필요가 없었을 거라는 게 요즘 생각입니다.

 

월담 소식지를 드리러 간 공단에서 작업복을 입은 분들과 드럼통을 실은 트럭이 다니는 모습을 보면 회사 생각이 많이 납니다. 회사 다닐 때 전화로 이야기를 나누던 제조사업장 분들은 아마 지금도 이렇게 일하고 계시겠지요. 제가 속해본 어느 집단보다 성실하고 헌신적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야근으로 고통 받고 있을 같은 부서 분들도 생각납니다.

 

저도 회사를 견디지 못하고 도망쳐봤으니 어떤 것에 맞서고 그것을 바꾸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압니다. 그래서 사실은 소식지를 나눠드리면서도 공단 안의 삶이 당장 바뀔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다만 받는 분들이 소식지를 한 번씩 읽어보면서 자신이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꿈꾸고 누릴 권리가 있는 존재라는 생각을 한 번쯤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백 명이 되고, 만 명이 되고, 백만 명이 된다면 세상이 조금은 바뀔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 희망을 퍼뜨리는 과정을 힘닿는 데까지 열심히 돕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