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후원하기

활동가의 편지

자원활동가들이 전하는 ‘내게로 사랑방이 왔다’

계영 님은 꿈꾸며 일하는 출판노동자입니다.
‘인권’은 대략 알 듯해도 ‘운동’은 뭔지 몰랐던,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대학생이었습니다. 공익적 일이나 부조리에 맞서는 일에 막연한 로망(?)은 있었지만, 활동가나 운동 단체의 ‘전문성을 의심’하는 등 선입견이 컸지요. 그러다 첫 직장이던 소위 ‘진보’적인 책 펴내는 출판사에서 상상도 못한 낙하산 인사 뒤 부당해고를 겪으면서, 마음과 머리가 복잡해졌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백수 기간 조심스레 시도한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인턴 경험, 마침 그해(2007년) 하반기 터져 나온 차별금지법 의제를 계기로 온갖 종류의 ‘반차별’ 활동가들을 한자리에서 만났지요. 활동가들의 진면목이라는 종합선물세트를 선물 받은 마음이었어요. 그렇게 사랑방 반차별팀에서 자원활동을 하게 됐습니다. 2008년 촛불 때도 개인으로 시작했다가 좀 더 밀접해지는 계기가 됐고요. 비무장 시위 참가자에게 물대포를 쏘고 무력을 행사하는 ‘초현실적’ 일이 시위 현장에선 흔하다는 것도 그때 처음 들어 알았답니다.
느낌, 생각, 말, 행동이 가능한 한 일치하는 삶을 꿈꾸는데, 사랑방에서 바로 그렇게 운동, 삶, 관계, 말과 행동을 가능한 한 일치시키고 조화를 이루려 하루하루 애쓰는 사람들을 만났고, 이젠 각자의 영역에서 때때로 만납니다. 생활인이자 활동가인, 바닷소금 같은 사람들! 차별이라는 의제는 깊고 넓어 망망대해를 헤매는 기분이었고, 지금도 ‘운동’라는 것의 답은 모르지만, 사랑방에서의 관계와 시간은 저에게 끊임없이 스스로 더 질문하게 하고, 다른 숨겨진 측면들을 보게 하는 하나의 중요한 잣대와 열린 시각을 안겨줬습니다. 처절한 분노와 아픔의 역사 속에 움트면서도 세상 한구석을 밝히는 즐거운 운동, 계속해 소수자의 책을 만들며 살고 싶은 제 삶의 앞으로도 종종 나누고 함께하겠습니다. 사랑방 스무 살, 고마운 마음으로 축하드립니다.

 

김성 님은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신부입니다.
2005년 겨울, 인권운동사랑방의 문을 두드리고 나니, 조금은 걱정이 되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사랑방에서도 그랬다고 한다. 갑자기 가톨릭 수도자가 전화를 걸어서 자원봉사를 하고 싶다고 하니 좀 당황스러웠나보다. 그래도 돌이켜보면 그 시간이 참 좋다. 선한 가치를 위해 헌신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나는 내 삶이 어떠해야하는지 구체적으로 깨닫게 되었고, 인권 감수성(아직도 요원하지만)이라는 개념 속에서 인간에 대한 배려가 어떻게 드러나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지금도 가끔 시국미사나 집회에서 아는 분들을 만나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나도 사랑방 출신이야’ 하고 으쓱하는 마음이 들곤 한다. 내 외모가 좀 우락부락하여 다음해에 소개해서 간 얌전한 후배 수사를 보고, “진짜 수도자 오셨다”는 말을 전해 듣고 좀 서운하기도 했지만, 뭐 그래도 사랑방은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자본이 사람을 물건으로 둔갑해 버리는 세상에 인간을 위해, 선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는 이들의 존재는 내겐 늘 신성(神性)을 만나는 순간이다. 사랑방 2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그리스도의 평화와 축복을 청한다.

 

예니 님은 법학을 공부하는 대학원생입니다.
안녕하세요, 사랑방 자원활동가 예니입니다! 아, 제 소개. 저는 지금 법학을 공부하고 있고요, 공부해서 다 같이 행복하게 사는 사회를 만드는 일? 그게 뭔지는 정확히 잘 모르겠지만. 그런 일을 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만 하고 있는, 철이 덜 든 대학원생입니다.
사랑방이 벌써 20주년이 되었네요. 그 동안 우리 사회의 인권을 위해서 열심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력해 주신 활동가님들께, 그리고 사랑방에게 감사해요. 제가 사랑방과 인연을 맺은 것이 어느덧 2년이 넘었어요. 사랑방에 뭔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인연이었는데.. 안타깝게도 도움 될 일만한 일을 한 것은 없네요.^^;; 송구스럽습니다. 앞으로는 뭔가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언젠가 김장은 꼭 함께 할 거고요. (사랑방 김장 날에 대한 뼈아픈 추억이! 아직도 가끔 쑤시네요.) 2년 동안 사랑방에 정이 많이 들었어요. 활동가 분들도 뵐 때마다 정말 반갑고, 더 친해지고 싶습니다. 그런데 활동가분들 항상 바쁘셔서 간혹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해요. 본인들의 인권도 잘 챙기셔서 행복하게 활동하셨으면 좋겠다는 천진난만한 희망을 말씀드려 봅니다. 화이팅이에요.
그나저나 요즘 뉴스를 보면 한숨 나는 일이 유난히 많아요. 사랑방에서도 할 일이 더 많아질 것 같은 예감이 드네요. 이런 수상한 시절에는 모두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겠지요. 서로 연대하면서요. 모두들 힘!
아무튼, 해질녘에 대한문에서 만나서 '밤마다 자유를 그리워~♬' 합창도 하고 신나고 뜻 깊은 기념회를 계획 하고 계시다고요? 흐흐흐 기대됩니다. 책상 달력에 9월 28일 "사랑방" 이라고 빨간 글씨로 크게 표시해둘게요.
앞으로도 사랑방, 부탁드려요.

 

박종식 님은 <한겨레> 사진부 기자입니다.
인권운동사랑방의 20주년을 축하드립니다. 2003년 여름, 제대하고 처음 찾아갔던 곳이 인권운동사랑방이었습니다. 혜화동 시절 사랑방에서, 학보사를 했다는 이유로 인권하루소식 제작에 투입(?)돼, 3개월 남짓 하루소식에서 취재 및 기사 쓰는 일을 했습니다. 당시 사랑방 누님들과 형님들은 까까머리 경상도 청년의 훌륭한 상담자들이셨습니다. 진로상담에서 연애고민 해결까지 다양한 영역을 아우르며 저의 멘토가 돼줬습니다. 사랑방의 자원활동을 마치고 복학을 앞둔 저에게 선물해주셨던 책에 남겨주셨던 말들을 지금도 되뇌이곤 합니다. 특히 배경내 누님이 남겨준 ‘생각한대로 살아가지 않으면, 살아가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라는 글귀를 떠올리며 첫 발걸음의 각오를 되새기곤 합니다. 여전히 생각한데 살아가고 있지는 못하지만, 오늘도 살아가는 대로 생각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짧지만 제 인생의 거름이 되어준 인권운동사랑방이 꾸준한 모습으로 뚜벅뚜벅 걸어나가기를 기원합니다.

 

김경태 님은 출판사 클 대표입니다.
90년대 말 사회권위원회에서 일하면서 『인간답게 살 권리』라는 책을 만들었다. 추운 겨울이었는데 버스를 타고 조언을 들으러 학자, 전문가 분들을 만나러 다니던 기억이 난다. 한 챕터씩 나눠서 쓴 필자들이라야 당시 사랑방 활동가들 아니면 나처럼 자원활동을 하는 대학생들이었는데, 제법 튼실한 내용의 조사와 집필이 이루어졌다는 게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그때의 경험이 바탕이 되어 나는 자연스럽게 출판편집자를 직업으로 삼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그때의 인연들이 이어지고 있는 걸 보면 당시 자원활동을 하면서 가장 소중했던 것은 재미였던 것 같다. 함께 모여 공부하던 재미, 함께 모여 일하던 재미, 함께 모여 웃고 떠들었던 재미. 앞으로도 인권운동사랑방이 자원활동가들이 스스로 함께 모여 재미를 만들어갈 수 있는 사랑방이 되었으면 좋겠다.

 

정석 님은 구로에 있는 청소년지역아동센터에서 사회복지사입니다.
제 삶의 멘토인 인권운동사랑방의 20살 맞이를 진심으로 축하드려욧!! 잉여인간으로 오랜 시간을 살면서 세상살이에 온통 불만만 가득한 투덜이 스머프였던 제가 ‘인권감수성’을 알아가면서 ‘사람’을 보고 ‘사회’를 보며 내가 생각하는 ‘삶’을 살아 갈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사랑방의 멘토링이 있었기에 가능했었지요. 사랑방과 함께했던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오래전 ‘하루소식’을 우편으로 받을 때 연애편지 마냥 기뻐했던 일이나 감옥인권을 활동을 위해 온통 긴장해서 난생 처음 교도소를 방문했던 일등 두서없이 추억들이 떠오르며 마음이 설레이네요. 늘 함께하지는 못하지만 일하면서 가끔 마음이 힘들 때 사랑방에서 보내준 ‘사람사랑’과 ‘인권오름’을 찾아서 읽는데, 현장에서 투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어느새 마음 조각들이 하나둘씩 맞춰지고 기운이 솟는 것 같아요. 인권운동사랑방!! 앞으로도 오래오래 제 삶의 멘토로 남아 ‘너의 인권감수성은 안녕하니’라고 물어봐 주시길 바래요 !!!

 

인복 님은 안산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입니다.
모두들 무탈하고 안녕하시죠? 매사 서툴다보니 간다는 말도 제대로 못 전하고 동네를 옮긴 자유권팀 인복입니다. 저는 경기도 시흥에서 공장에 나가고 있어요. 내려와서 2년을 넘기고 있는데 그동안 사랑방에 얼마나 무심했는지. 사무실을 옮긴 것도, 사랑방 짜임새가 바뀐 것도, 올해로 20주년인 것도 몰랐네요. 이런 무심한 녀석도 축하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어요. 돌이켜 보니, 첫 회의 때 앞이 컴컴했던 기억이 먼저 떠오르네요. 모아 찍기한 안건지와 여러 장의 별첨을 들고, 무슨 이두향찰이라도 해독하는 양 눈만 끔뻑거렸던 회의들. 설명하고, 듣고, 눈을 빛내다 또 이내 컴컴하고. 그렇게 다소 컴컴한 상태로 인권침해감시활동이나 불심검문 반대, 집회의 자유 캠페인을 했는데, 그래도 순간 순간 배웠고 거리에서 돌아오면 항상 뿌듯했어요. 한 번은 광화문에 1인 시위를 나갔어요. 솜털 벗은 노루새끼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뛴 탓에 집에 돌아오는 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시위를 했는데 무용을 한 것도 같구나.’ 우습지만 너무도 벅찬 가슴으로 1인 시위를 한 탓에 그만.
생각해보면 저 말고도 다른 많은 활동가들의 기억들이 사랑방의 스무 해를 빼곡히 채우고 있지 않나 싶어요. 과거에 도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활동가들 하나 하나가 즐겁고 신나게 사랑방을 만들어 나갔으면 좋겠어요.
인권운동사랑방 20주년 다시 한 번 축하드려요.


정인


거리에서 본 깃발이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 어정쩡하게 인권운동사랑방 자원활동을 시작했어요. 사랑방에 처음 가본 날, 맛 나는 밥을 얻어먹고는 활동하기로 마음을 더욱 굳혔던 기억이 납니다. 사람들은 또 어찌나 그리 시크하고 매력적이던지. 그렇게 사랑방과 맺은 연이 5년이 다 되어가네요.
활동은 겨우 일 년 조금 넘게 했던 것 같아요. 그래도 사랑방 엠티 오락시간 MC도 한 번 해봤네요. 사랑방 자원활동 하면서 경직법, 국보법 공부도 해보고, 우리 물 지키겠다 밀양도 가보고, 인권오름에 기사도 써보고, 용산이나 평택… 현장에 가볼 때면 무력감에 어찌할 바 모를 때도 있었죠.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름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었어요. 아무튼 무지 게으른 저에게는 다이내믹한 날들이었답니다.
어느 날 사랑방 동료 활동가와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정말 만약 혁명이 일어나면 인권활동가들이 제일 먼저 다 죽을 것 같다’고. 진실과 정의를 위해서라면 몸을 불살라버리니까~ 착하니까~ 제가 만난 사랑방, 영화제, 들 사람들은 차분하고 강한 사람들이었어요. (아, 집회 때는 목청이 참 커지긴 해요 ㅋㅋ) 인간적인 세상을 위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그대들을 보며 ‘사람이 희망’이라는 믿음이 더 강해졌어요.
사랑방의 과거사는 술자리에서 들은 게 전부인데요. 20년이라니. (제가 살아온 시간과 비슷하네요^^;;) 한 단체가 20년이라는 시간을 지나오기 위해서는 고비도 많았을 것 같고, 또 그 만큼 즐겁고 의미 있는 일들도 많았을 거에요. 인권운동사랑방은 아마 한국 인권운동의 산역사? 아닐까요. 아하하. 이 땅의 진보를 위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앞으로도 지금처럼 든든하게 우리 곁에 있어주길 바랍니다.
활동할 때도 활동보다 술만 열심히 먹으러 다녀서 그런가 언제나 미안한 마음이 한가득이지만, 사랑방과 함께한 날들을 생각하면, 살아있는 느낌, 그 느낌적인 느낌!이 떠올라요. 언젠가는 다시 돌아갈 겁니다. 자꾸 자원활동 시기를 미뤄도 괜찮겠죠? 인권운동사랑방은 쭈욱 건재할 테니까~
자 그럼, 응원은 이쯤하고, 20주년 축하기념 술 한 잔 해요~^^

 

씨애틀에서 윤찬식
안녕하세요.
인권운동사랑방이 출범한지 20주년이 되었습니다.
아끼는 사랑방 후배의 귀뜸이 아니었다면 모르고 지나갈 뻔 했습니다.
사랑방은 최고의 가치인 보편적 인권을 지켜내기 위해 험한 길을 걸어왔습니다.
당연히 가슴이 뭉클한 적도, 가슴이 무너진 적도 많았습니다.
20년의 시간을 관통하는 과정에서 온갖 고난과 질곡이 많았으나, 밟히면 밟힐수록 뻗어가는 민초(grassroot)처럼 사랑방은 모든 것을 품고, 견디고, 뚫고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뜨거운 축하를 보내고 싶고, 자랑스럽습니다.
차별철폐, 평등, 구조적 평화, 약자에 대한 가중적 고려, 복지, 사회적 연대 의 가치를 꿈꾸고 실천하는 사랑방은 우리사회의 값진 자산입니다.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으로, 또는 발로 뛰는 운동으로, 인권에 대한 사회적, 구조적 창을 활짝 열어 제쳤습니다. 가장 예리하고 선명한 인권의식으로, 인권운동과 패러다임을 주도하며 제자리를 굳건히 지켰습니다.
그 역사성, 대표성, 활동성을 기억하고 평가하며, 지난 20년을 바탕으로 또 다른 20년을 헤쳐 나가는 세계 속의 사랑방을 기원하고 응원합니다.

 

현주

제가 사랑방과 함께 한 시간은 이 년 남짓인데, 사랑방은 벌써 20년이 되었네요. 학교가 아닌 공간에서 활동하겠다고 마음먹으면서 처음 문을 두드린 곳이 사랑방이었습니다. 사랑방에서 꾸준히 활동을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연락이 닿고 간간이 얼굴을 보게 되고, 책도 나오고 이렇게 20주년 글까지 쓰고 있습니다. 저는 원체 살갑지도 못하고 먼저 다가가지도 않는 사람인데, 가끔 만나면 반갑게 맞아주는 사랑방 사람들이 있어 항상 고마운 마음을 한켠에 두고 살아갑니다. 제가 처음 사랑방과 인연을 맺을 때와 비해 사랑방의 조직구성도 사랑방 건물 위치도 달라졌지만, 사람들도 사랑방도 여전히 이곳에 있어 함께 내일의 꿈을 꿀 수 있다는 사실은 변함없네요. 인권이란 이름으로 만난 이 소중한 인연들과 함께 그려갈 ‘내일’이 수도 없이 많아 기쁩니다. 함께 한 두어 해의 시간이 더 긴긴 시간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남희
지금은 따로 활동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사랑방이 충정로에 있던 시절 북인권팀도 에너지 넘쳤던 때가 있었죠. 달랑 세 명밖에 없던 팀이지만, 뭔가 북적북적 큰 포부를 갖고 시작한 다큐 제작이나 백서제작 등. 머리를 함께 모았던 석진씨, 아해씨. 기억나죠? 그때의 활동들이 참 그립고 아쉽고 그래요. 북인권팀 다시 안 모이나요? ^^
제게 사랑방은 따뜻한 밥상이에요.
돌아가며 당번을 정해 차려서 같이 먹던 밥상. 특히 미류 씨 밥상이 기억에 많이 남네요. 밥 먹고 가라고 잡아주면 냉큼 앉아서 밥 한 그릇 떠다가 둘러앉아서 나눠먹던 밥상. 아직도 반짝반짝 빛나는 기억이에요.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홍대로 이사 간 사랑방에는 몇 번 못 가봤네요. 밥 먹으러 갈게요. 곧.

 

영훈

2006년 5월 14일에 있을 10회 인권영화제 ‘황새울영화제’를 위해 13일 저녁 몇몇 관련활동가들과 함께 기자재를 가지고 먼저 평택 대추리에 도착했다. 그동안 그 곳에서 보아왔던 모든 것이 변해있음을 깨달았다. 얼마 전까지 아이들과 함께 뛰어놀았던 대추분교는 철거되어 폐허가 되어버렸고, 헬기소리, 그 헬기에서 울려 퍼지는 ‘애국가’, 마을을 휘젓고 다니는 경찰들의 군화소리와 고함소리들이 평범했던 농촌마을의 새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영화제 당일, 경찰의 예고대로 모든 길은 봉쇄되었고 결국 아무도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못하는 고립된 섬이 되었다. 대추리 마을 주민들의 목소리는 방송하지 않을 방송국의 카메라만이 담고 있을 뿐. 눈으로 읽는 글자가 아닌, 피부로 직접 새겨지는 “봉쇄”, “단절”, 그리고 “절망”에 나는 무기력하게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마치 먹이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는 까마귀 같은 검은 옷의 경찰들이 그런 나를 멀리서 바라보고 있을 뿐. 그렇게 얼마나 오랫동안 있었던가. 봉쇄를 뚫고 달려온 인권영화제를 포함한 인권운동사랑방의 활동가들을 보자 나는 마음 속 깊이 울어버렸다. 그렇게 인권영화제는 무사히 끝날 수 있었다.
2013년 여름. 나는 인권과 영화와 상관없는 일을 하는 노동자가 되었다. 오늘을 살아내기도 버거운 그런 사람. 우연히 대한문을 지나갔다. 원으로 둘러싼 경찰과 공무원들, 그리고 시끄러운 듯 귀를 막고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 화단에 놓인 검은 실루엣의 영정사진들에 시선이 멈추어 선다. 그리고 그 곳에 서있는 인권운동사랑방의 활동가들의 변함없는 모습을 보며 문득 그 때를, 그리고 내일을 ‘기억’한다.

 

무동
안녕하세요. 신자유주의와 인권팀 자원활동을 했던 정정석(무동)입니다.
그때 함께 활동했던 이들과 서울역 노숙인들, 용산 철거민들, 쪽방 생활자들, 시설을 벗어나 독립생활을 시작하는 분들 이야기로 기사를 썼던 기억이 납니다.
생각해 보면 모두 인간답게 살 곳, 인간답게 살 권리를 말하셨던 것 같아요.
그러니 '함부로 하지 마'라고요.
그때 경험으로 논문도 쓰고 졸업하고, 지역활동을 하다가, 지금은 강원도 정선에 있습니다.
농사지으려 했는데 막상 먹고사는 게 걸려서 요새는 보건소에서 단기 방역 일을 합니다.
아마도 꽤 오랫동안 돈 버는 일과 농사를 같이 해야 할 것 같아요.
무턱대며 내려온 터라 뭘 하면서 살아야 할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무엇이든 바로보고 피하지 말고 살아야겠다 다짐해봅니다.
생각해 보니 사랑방이 그런 곳이 아닌가 싶어요.
함께 바로보고 피하지 않고, 함께 손잡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사람들, 마음들.
스무 살이 된 사랑방.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어도 지금 처럼 걸으시리라 믿어요.
고마워요 힘내세요~~!

 

사회진보연대 부설 노동자운동연구소에 연구원으로 있는 김동근입니다.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을 꿈꾸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고민하기를 바랍니다.
2007년 한 해 인권운동사랑방 자원활동을 한 인연으로 ‘인권운동사랑방의 어제의 기억을 되짚고, 내일의 꿈을 얘기하는’ 글을 쓸 것을 요청받았습니다. 거절 못하는 성격 탓에 덜컥 맡았지만, 사랑방 20주년을 맞이하여 글을 써달라는 말에 괜히 민망하고 주저하게 됩니다.
6년 전 자원활동했던 때를 생각하니 어쩐 일인지 점심식사를 준비했던 일이 떠오르네요. 무슨 메뉴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식사준비를 도우면서 괜시리 떨렸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지금도 제가 일하고 있는 다른 사무실에서 종종 점심식사를 준비하지만 그때의 기억은 뭔가 특별했던 것 같아요.
1년간 건강권팀에서 활동했었습니다. 당시 유시민 장관이 의료급여제도를 개악하려고 시도하던 때이기도 했고, 동자동에서 건강권팀이 활동하던 때이기도 해서 관련된 활동을 하면서 동자동 건강권 실태보고서를 작성했었습니다. 당시 작성했던 보고서를 확인할 수 없지만(파일을 찾아서 보니 암호가 걸렸는데 기억이 안나네요^^;;), 세미나를 하고 기획안을 검토하면서 준비했던 기억, 인터뷰를 다니면서 안타깝고 분노했던 기억, 보고서를 작성하고 회의하면서 다듬어나가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지금 저는 사랑방에서 활동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보건의료운동을 하고 있으니 사랑방 시절 고민했던 건강권이라는 문제의식이 고스란히 제 안에 남아있는 것이겠지요. 인권운동사랑방의 20년은 그런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20년도 그러하기를 기원합니다!!^^

 

달꿈 소개: 문화예술, 마을, 성소수자인권운동, 연대라는 키워드에 관심이 많습니다. 지금은 마을공부방 ‘토끼똥’에서 어린이들을 만나는 교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목표는 적당히 벌고 잘 사는 것이고, 이 생의 소기의 목적이라면 퀴어영화 한편 잘 만들어보는 겁니다.
인권관련 활동을 하는 시민단체에서 활동을 해보고 싶어서, 무작정 자원활동 신청서를 쓰고 당시 충정로에 있는 사랑방을 찾아가서 사회권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어느새 사랑방은 홍대로 둥지를 다시 틀었고, 여전히 편안한 분위기여서 좋았어요. 함께 공부하며 모임을 이어가는 것도 즐거웠어요.
사랑방 활동을 하면서 ‘인권’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투쟁적인 단어인지, 또 이렇게 간절한 단어인지 늘 되새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밌게도 사랑방에서 ‘인권’을 고민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건 늘 즐거워요. 지금까지 쉴틈 없이 달려온 사랑방! 20년을 잘 돌아보고 또 새로운 내일을 잘 계획하시길 바라요. 앞으로도 힘없는 사람들에게 소수자들에게, 존재만으로도 든든한 공간이 되어주세요! - 사랑방을 사랑하는 달꿈 드림

 

깡통
프랑코 만쿠조는 24개국 60여개의 광장을 분석한 책에서 광장의 기능과 사회문화적 의미들을 언급했습니다. 옛 시민과 새로운 시민이 만나 공동체적 동질성을 확인하고 형성하는 장소이자 사람들의 가치로 채워지는 공간, 끊임없이 사회적 행위가 이뤄지는 무대라고 했습니다. 광장은 기능적으로 개방되어 있기도 하고 분리되어 유기적으로 활용되며 무한한 가능성들로 채워집니다. 인권운동사랑방은 그 자체로 광장을 품고 있고, 도란도란 거리는 살가움이 있습니다.^^ 광장의 이슈를 사랑방으로 불러들이기도 하고, 사랑방의 고민들을 광장으로 끌고 나가기도 합니다.
어렵고 답답하기만 했던 인권이란 단어를 보통의 사람으로 곱씹고 나눌 수 있게 해준 인권운동사랑방이 벌써 20주년이라니 건강하게 광장을 품고 있음을 정말 축하합니다.


영화제 자원활동가 마토입니다.


수능을 갓 치고 난 한겨울 어느 날, 자원 활동을 하겠다며 인권운동사랑방 문을 두드렸던 제가 이제 어느덧 아홉수라고 하는 나이가 되었으니, 사랑방의 20년 역사에 나의 20대도 살짝 얹어도 되지 않을까요. 서투르고 의욕만 앞서던 저를 늘 북돋아 준 인권영화제. 그 덕에 오지랖 넓게 주변에 관심이 많은, 어떤 사람들의 목소리는 더욱 관심 있게 들어 보고 진심을 담아 세상에 전달하는, 편견 없이 열정을 가지고 사람들과 만나는 거제도의 유변이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저를 더 깊이 있게 벼려내어 주는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영화제가 되어 주세요. 항상 응원할게요!

 

대용
사랑방이 20년이나 되었다니!!!! 200년은 된 줄 알았더니 이제 겨우 시작이었군요. 훗ㅋㅋㅋ 장난이구요. 그래도 사랑방 들락인 게 5년이 넘었는데도 모르고 지낸 사람들 사건들이 많더라구요 20이란 숫자 자체의 의미라기 보단 이런 기념을 통해서  미처 몰랐던 15년 세월을 돌아보게 되네요. 들어본 적도 없는 사건들부터 관심을 갖고 지켜봐왔던 많은 이슈들에 인권운동사랑방이 의미를 만들기 위한 꾸준한 노력의 흔적들이 지금까지 이어져서 지금의 사랑방이라고 생각하면 새삼 나도 같이 활동하고 있는 놀랍기도 합니다. 괜히 나를 돌아보며 그런 난 뭘 했고 해야 할지 고민하게도 되구요.인권운동사랑방이 20주년을 맞이하여 대대적인 개편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한 발짝 멀리서 구경만 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단 생각도 하면서도 늘 고민을 하던 사랑방의 친구들을 보면 고생 같아 보였는지 알게 모르게 회피도 좀 많았던 거 같습니다.ㅋ 그런 일련의 회피의 5년간의 사랑방손님의 생활이 반성하게 만들고 있단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마 10주년 하고 20주년행사니까 다음 기념은 30주년행사겠지요. 그때까지 저와 사랑방 모두가 무사하다면 (그때라고해도 저는 제 고민 사랑방은 사랑방 나름의 고민이 있겠지만ㅋ) 그때는 지금보다 저와 사랑방과 우리가 사는 사회의 고민이 조금씩은 더 교집합이 많아지고 같이 고민하고 행동하는 와중에 맞이하는 30주년행사가 될 수 있길 미리부터 바라고 있겠습니다.

 

참세상 정은희 기자
누구였는지 생각나진 않아요. 하지만 사회운동에 대한 미약한 전망 속에 있던 저에게 사랑방 활동가들은 넘치는 일을 나누려는 어떤 도구적 활동 보다는 인권운동의 전망을 키워주려 했던, 먼저 존중해주셨던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이후 사회단체에서 활동하며 연대운동을 통해 만났던 활동가들도 비슷한 마음을 갖게 했고요. 고민을 나누는 말의 방식, 함께 하는 태도 속에서 위도 없고, 아래도 없이, 나란히 다양한 이들이 함께 하는 모습은 제 언어도 바꿔놓곤 했어요. 정세, 과제 등 현실을 바꾸기 위한 논의 뿐 아니라 투쟁하는 이들 자신의 문화를 만드는 일도 중요하지만 훨씬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인간적 권리를 둘러싼 20년간의 치열한 성찰 속에서 그런 문화도 피어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앞으로 어떤 활동을 하시든 기대하게 되는 이유도 이 때문인 것 같고요. 20주년 축하드리며 더욱 응원합니다!

 

오동

어제는 7년 만에 아버지와 벌초를 다녀왔다. 야산 중턱의 산소를 찾아 가는 길은 나무와 풀로 뒤덮여 어디가 길인지 도무지 분간을 할 수 없어 톱과 낮으로 기억을 더듬어 할머니 할아버지의 산소와 마주해야 했다.
사랑방과 나의 어제를 조우하는 일 역시 나무와 수풀을 헤치는 과정이 필요할 듯하다.
사랑방이 지금 어떤 사업을 하는지 나는 잘 모르고 호수를 떠난 겨울의 오리들처럼 연락이 끊어진 친구들이 많다.
나는 2002년 가을, 친구 대홍을 따라 '공공부문 비정규직 실태조사' 설문조사를 도와주는 일로 사랑방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사랑방보다는 사랑방과 주변의 사람들과 인연을 이어갔다. 2006년 대추리의 차력쇼에서 고무줄을 철조망처럼 씹어 끊었고 행정대집행 때는 망루에 몸을 묶고 있다가 똥꼬에 팬티가 낀 채 수원으로 연행되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 길지 않은 인연이었지만 20대의 나를 키운 것은 말 그대로 팔할이 사랑방과의 인연이었다.
사랑방이 20주년을 맞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확한 날짜는 모르지만 행사가 있다면 꼭 참석하고 싶다. 불러만 주시라! 톱과 낫으로 시간의 수풀을 헤치고 어제와 내일의 사랑방을 만나러 꼭 갈 터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