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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헌 결정으로 도마 위에 오른 주민등록번호, 어떻게 바꿔야 하나

12월 21일, 갑작스러운 연락이 왔다. “헌법재판소에서 23일에 주민등록번호 변경에 관해서 위헌 여부 결정한답니다.” “네? 모레요? 지난 달에 공개변론 했는데, 이번 달에 결정한다구요?” “헌법재판소 홈페이지에 떴어요. 일단 기자회견 준비합시다”
다음날 사무실에서 사람들과 들떠서 이야기를 나눴다. “이기겠죠?” “느낌이 좋아요.” “네. 이겼으면 합니다.” “내일 기자회견 한다고 보도자료 냅시다” “아. 그래야죠.”

헌법재판소가 주민등록번호 변경 규정을 두지 않고 있는 주민등록법을 위헌이라고 결정을 할 것은 당연하다 생각했다. 전 국민의 주민등록번호가 다 유출되었는데 변경조차 못한다는 게 말이나 되나?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 헌법재판소와 법원에서 깨지는 것을 여러 번 봤다. 불안하다.
그간 도움을 주셨던 분들에게 전화했다. 지고 나면 차마 전화를 못할 것 같아서였다. 내일 결과가 어떨지 모르겠지만, 지든 이기든 함께 싸워서 감사하다. 기대와 불안, 감정의 온탕과 냉탕을 계속 오가면서 그렇게 밤을 지새웠다.

필자가 속한 진보네트워크센터는 주민등록번호제도를 바꾸려 십 년 넘게 싸웠다. 이젠 국회도 주민등록번호 변경을 전제로 논의 중이다. 만에 하나, 헌법재판소가 주민등록번호 변경 규정이 없어도 합헌이라고 결정하면 그간 싸움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이긴다면, 탄탄한 디딤돌이 된다.

헌법재판소 결정이 있던 지난 12월 23일, 오후 2시 40분 재판관이 주민등록법 위헌 여부에 대한 결정문을 읽었다. “주민등록번호 변경에 관한 규정을 두고 있지 않은 주민등록법 제7조가 헌법에 합치되지 아니하고…”

2015년 12월 23일 헌재 결정 직후 열린 기자회견

▲ 2015년 12월 23일 헌재 결정 직후 열린 기자회견


국민 통제 수단으로 도입된 주민등록번호제도를 기억하며

주민등록번호 제도는 40년 넘게 유지되었다. 이 제도가 헌법에 부합하는지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첫 결정이다. 주민등록번호 변경 규정을 두지 않은 주민등록번호 제도는 위헌이라고 했다. 40년이 걸렸다. 공고히 유지되어온 체계에 균열을 냈다. 국민 통제 수단으로 도입하였던 절대적 식별번호인 주민등록번호의 아성을 무너트렸다.

헌법재판소의 결정 취지에 따르면 주민등록번호가 유출된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민등록번호를 변경할 수 있어야 한다. 주민등록번호 변경 대상자의 폭은 확대될 것이다. 번호 변경이 폭넓게 가능해지면 주민등록번호의 절대성이 흔들린다. 주민등록번호 하나에 의존하던 한국 사회 식별번호 시스템을 재구축하는 작업이 진행될 것이다. 이미 모든 국민이 다 유출된, 앞으로 어디서 어떻게 유출될지 모르는, 그리고 그것 때문에 변경될 수 있는 주민등록번호에 의존하는 것보다는 각 분야별 식별번호를 도입하는 것이 안정성이나 비용 측면에서 유리하게 된 것이다. 주민등록번호로 대표되는 개인정보의 집중과 연결 고리를 끊는 것은 정보인권적 측면에서 필수적이다. 주민등록번호 체계 변경을 위한 첫발을 확실하게 디뎠다. 그러나 이제부터 시작이다.

헌법재판소는 ‘주민등록번호 변경 규정을 두지 않은 것’에 대해서만 심판하였다.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번호를 부여할지는 우리의 몫이다. 정부도 2014년 12월 31일 주민등록번호 변경이 가능한 주민등록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정부안은 주민등록번호 변경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게다가 기존의 주민등록번호 부여 체계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헌재 결정 덕분에 주민등록번호 변경에 대한 고민은 줄었다. 지금 그리고 이후 싸움의 핵심은 ‘주민등록번호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이다. 현행 주민등록번호는 생년월일, 성별, 출생지, 출생신고순서로 구성된다. 기본적인 개인정보를 바탕으로 주민등록번호를 부여한다. 달리 말하면 물건의 생산연도, 종류, 생산지, 생산순서다. 사람이 물건인가?

국가가 국민에게 복지, 행정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하여 식별 번호는 필요하다. 하지만 현행 주민등록번호는 아니다. 개인 식별을 위해서 번호 안에 그 개인의 기본적인 개인정보를 담을 필요가 없다. 카드번호, 통장번호를 개인정보로 구성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주민등록번호는 개인식별 기능만 하면 충분하기 때문에, 나이, 성별, 출생지 등의 개인정보를 기반으로 만들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한국 사회에 나이, 성별, 출생지에 대한 차별이 만연해 있다. 주민등록번호에 개인정보가 담겨 있기 때문에 이러한 차별이 발생했다고까지 주장하기는 어렵지만, 주민등록번호를 통해서 나이, 성별, 출생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차별이 강화, 확대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너 몇 살이야? 민증 까봐” “남자네?” “전라도 출신이야?”

단순 변경을 넘어 개인과 주민등록번호를 분리해야

주민등록번호 변경을 위한 행정소송과 헌법소송을 진행하면서 주민등록번호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 나이, 성별, 출생지 문제로 고민하는 분들과 직간접적으로 만나고 사례를 수집했다. 문제의식은 있었지만, 현실적인 내용까지 깊숙이 파악하진 못했다. 이번 헌법소송의 심판 대상은 주민등록번호 변경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주민등록번호의 번호 부여 방법은 주요 쟁점이 아니었다. 이제 이 부분에 집중해야 한다. 변경을 넘어 개인과 주민등록번호를 분리시켜야 한다.

자유는 비밀로부터 출발한다. 비밀이 없으면 자유도 없다. 숨기고 싶다. 당연한 욕망이다. 누구나 자유롭고 싶어 한다. 개인의 모든 사생활이 어딘가 기록된 사회, 그리고 누군가는 그 모든 기록을 볼 수 있는 사회에서는 자유를 꿈꿀 수 없다. 지금껏 주민등록번호를 중심으로 개인의 모든 정보가 엮였다. 행정 편의성, 비용 절감 등이라는 명목으로 우리의 자유가 억눌리고 있었다. 한발씩 나아가자. 변경 가능해졌다. 주민등록번호에서 개인정보를 빼자. 그리고 주민등록번호를 축소시키고 각 분야별로 다른 분야와 연결되지 않는 별개의 식별번호를 도입하자.

국가와 기업의 통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주민등록번호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이것 역시 시작점에 불과하다. 한국 사회는 빅데이터, 사물인터넷 등으로 나아가려 한다. 전 세계적인 방향이기도 하다. 이런 와중에 개인이 국가와 기업에 예속되지 않고 자신의 공간을 지키면서 자유로운 존재로 있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싸워야 한다. 한국 사회가 제일 앞에 서 있다. 이 지구 그 어디에도 답이 없다.
덧붙임

신훈민 님은 진보네트워크센터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