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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 책의 유혹

[책의 유혹] 소진을 견디지 않기

「우리는 왜 이런 시간을 견디고 있는가 - 삶을 소진시키는 시간의 문제들」, 노동시간센터 기획, 2015

처음부터 가슴에 콱 박히는 제목이었다. '견딘다'는 말과 '소진'이라는 단어가 나의 어딘가를 붙들고 슬프게 하였다. 어느 날 지친 몸을 억지로 추스리며 문득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라고 물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마치  일의 시작도 끝도 없이 다른 일들의 여러 연속만 있는 것처럼 정신없이 왔다 갔다 반복하다가 몸도 마음도 다 소진되는 느낌 때문에, 무엇보다 이러한 소진이 끝이 날 것 같지 않다는 예감 때문에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라고 아득한 질문을 던져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왜 이렇게 많은 이들이 이런 시간, 즉 삶을 소진하는 시간을 견디고 있는 걸까? 무엇이 우리의 삶을 소진시키며 이러한 소진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시간구조에 따라 달라지는 일상, 삶

이 책은 노동시간을 중심으로 한국 사회의 독특한 '시간구조'을 분석함으로서 이러한 질문에 답하고 있다. 개인에게 시간구조는 각자가 시간을 배치하는 방식과 그러한 시간에 대한 주관적인 경험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시간구조에 따라 일상의 풍경과 삶의 질이 달라진다. 각자의 시간을 채우는 다양한 활동 중 임금 노동은 시간구조의 모양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임금 노동을 하는 시간 자체가 일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을 뿐 아니라, 임금 노동을 하고 있거나 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그 임금 노동을 중심으로 다른 시간을 배치하기 때문이다. 아침 9시에 출근해서 오후 6시에 퇴근하는 사람과 저녁 7시에 출근해 새벽 2시에 퇴근하는 사람, 혹은 매일 출근하고 퇴근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출퇴근의 경계가 뚜렷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일상은 아주 다르게 구성된다. 먹고 자는 아주 기본적인 삶의 방식부터 다른 사람과의 관계, 매일 보게 되는 풍경까지 일상의 모든 요소가 달라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일상의 감각과 생각도 달라지게 된다. 

몸과 마음의 소진이 단지 몇 시간을 일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듯이, 시간에 대한 경험을 특징짓는 요소는 매우 다양하다. 임금 노동을 예로 든다면 몇 시에 출근하고 몇 시에 퇴근하는 것만큼이나 일의 내용, 어느 정도의 강도로 어떤 긴장과 위험 속에서 일을 하는지, 일 전반에서 얼마나 자율성을 행사할 수 있는지에 따라 개인의 경험은 달라진다. 따라서 시간구조와 그에 따른 일상의 경험은 개인의 계획과 결정뿐 아니라 근로기준법과 같은 노동법, 직장의 공식적이고 비공식적인 문화, 가족제도, 그러한 법과 문화, 제도를 뒷받침하는 사회구조 등 다양한 층위의 사회적 힘에 따라 결정된다. 이 책의 1장부터 8장까지의 내용은 바로 우리를 이토록 소진시키는 시간구조가 형성되는 방식을 분석하는 것이다. 1, 2장은 각각 부채와 디지털 모바일 기술이 노동시간과 비노동시간의 경계를 허물어뜨리고 개인이 삶을 구성하고 행동하는 모든 시간을 저당잡는 과정을 보여준다. 4장부터 6장은 각각 한국의 특징적인 시간구조로서 장시간 노동, 시간제 노동, 야간 노동이 자리잡게 된 과정과 그 문제를 짚고 있으며, 특별히 7장과 8장에서는 그러한 문제들의 귀결로서 노동자의 건강 문제를 다루고 있다.  각기 다른 저자가 쓴 8장의 글은 사례가 풍부하고 구체적이어서 읽기 수월하고 시간구조라는 복잡한 문제를 다양한 각도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논의를 따라가다보면 결국 삶이 소진된다는 느낌, 삶을 견디어낸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는 우리가 삶, 즉 우리의 시간에 대한 자율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닿게 된다. 내가 나의 바람대로 시간의 배치와 내용을 결정할 수 없으니 그 시간은 '견디는' 것이 되고, 그 시간이 나의 행복과 자율성을 증대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반대를 위해 구성되기 때문에 나의 활력은 소진된다. 그러므로 시간구조의 문제는 언제나 누가 시간을 구성할 권력을 가질 것인가를 둘러싼 투쟁의 문제이다. 9장과 10장은 이러한 투쟁의 역사적인 맥락과 구체적인 쟁점과 사례를 제시한다. 

시간의 자율성, 삶의 자율성

상쾌한 아침을 맞아 
즐겁게 땀 흘려 노동하고
뉘엿한 석양녘 
동료들과 웃음 터뜨리며 공장문을 나서
조촐한 밥상을 마주하는
평온한 저녁을 가질 수는 없는가

이 책의 서문에 인용된 것처럼, 이것은 오래된 바람이다. 어쩌면 보편적인 꿈이라고 묘사되어온 소망이다. 그러나 이 소망은 누구의 것인가? 저 평온한 저녁을 위한 '조촐한 밥상'은 공장에서의 시간과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땀 흘려 노동"한 시간의 결과로 자연스럽게 그려질 수 있는가? 이 시간은 노동시간이 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이 시간은 당연하게도 단축되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은 '노동시간'이라는 개념을 낯설게 하고 자연히 익숙하고도 명확한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표현 또한 낯설게 한다. 이 질문을 더 밀고 나아가면 시간의 자율성을 둘러싼 긴장의 경계들, 노동시간 vs 행동하는 시간, 노동시간 vs 자유 시간, 노동시간 vs 여가시간이라는 굳건해 보이지만 사실 한 번도 분명한 적 없었던 대립도 흔들린다. 

여기서 무엇이 노동이고 무엇은 노동이 아닌가, 다시 말해 무엇은 노동이 될 수 있고 무엇은 그렇지 않은가라는 질문을 다시 던지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본이 삶의 모든 영역을 포획하는 상황에서,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삶의 자율성이라는 전망은 자본에 대한 자율성뿐 아니라 더 폭넓은 지평에서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더 섬세한 감각으로 자본이 시간을 포획하는 다양한 방식을 살펴야 할 뿐 아니라, 삶의 자율성을 훼손하는 더 많은 위계와 권력들을 보다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그래야 예컨대 임금노동 시간의 조절만으로는 절대 해결되지 않을, 임금노동과 부불노동을 넘나들며 여성들이 엄마로 아내로 생계부양자로 며느리로 딸로 가사노동자로 돌봄노동자로 역할을 바꿔가며 서로의 시간을 교환하는 끝나지 않는 일의 연속을 문제 삼을 수 있게 된다. 학자금 대출로 저당 잡힌 대학생의 시간뿐 아니라 나이주의와 성숙/미성숙의 이데올로기로 자신의 시간을 결정하기 어려운 조건에 놓인 청소년의 시간과 강제된 학습을 노동의 연장선에서 논의할 수 있게 된다. 
 
모두가 삶을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저 견딜 뿐인 이 사회에서,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말은 때로는 가혹한 채찍이고 위로가 될 수 없는 위로이다. 이 말이 힘이 될 수 있다면 나만 그런 게 아니므로 이런 상황을 바꿔낼 가능성 또한 열릴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왜 이런 시간을 견디고 있는가”라는 자기의 목소리를 그 누구도 부디 가볍게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소진시키는 시간이 아니라 활력을 만들어내는 시간으로 전환하기 위해서 이 책을 통해 동료들, 이웃들, 가족들과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좋겠다. 그러한 이야기들이 모이고 모여 진짜 힘을 갖게 되면 좋겠다. 사실 그 누구보다 활동가들 먼저 그렇게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덧붙임

 영 님은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