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 주]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겠다는 약속은 참사 당일에 벌어진 일을 복기하는 데에 그쳐서는 안 된다. 4.16연대는 '존엄과 안전에 관한 4.16인권선언'을 추진하며 인권으로 4.16을 기억해보자고 제안한다. 기억은 행동이다. 세월호 참사 이전과 달라져야 한다는 열망은, 무엇이 어떻게 달라져야 할지 끊임없이 질문하는 행동이 되어야 한다. <인권오름>과 <프레시안>에 매주 공동 게재되는 연재기사가 하나의 실마리가 되기를 바란다.
* 4.16인권선언 2차 전체회의가 11월 28일(토)로 다가왔다. 함께 선언하기 위해 그동안 다양한 곳에서 진행된 풀뿌리토론의 결과를 살피고자 한다. 4.16인권선언제정특별위원회(4.16연대 산하 특별기구)가 정리한 풀뿌리토론 결과 보고서를 네 개의 기사로 나누어 게재한다.
4.16인권선언의 기초-존중, 평등, 연대, 안전
존중
인간의 존엄, 기본적인 존중을 강조한 내용을 모았다. 참사 이후로 드러난 여러 문제점들이, 서로를 존중하고 인간의 존엄을 인정하는 기본부터 지켜지지 않아 발생한 것임을 짚은 내용들이다. 모욕당하지 않을 권리 등 사람으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내용, 화장실을 이용할 권리 등 기본적/인도적 처우에 관한 내용, 자신의 삶을 결정할 권리나 행복한 삶을 누릴 권리 등 포괄적인 내용들이 포함된다.
특이할 만한 점은, “죽은 이후에도 인간이다” 등 죽은 사람에게도 기본적 존중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제안이 있었다는 점이다. 참사 현장에서 희생자 시신이 땅바닥에 그냥 방치되는 등 수습 과정에서 시신이 함부로 다뤄진 사실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아직 수습되지 못한 9명의 미수습자를 찾아서 가족과 만날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도 그것이다. 죽은 이후에 어떻게 대하는지는 삶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반영한다. 특히 재난이나 참사에 관한 권리에서 놓치지 않아야 할 부분이겠다.
평등
모두 동등하게, 누구나 차별 없이 대우받아야 한다는 제안들을 모았다. 평등을 해치는 현실로, ‘가진 자의 권리만 있는 세상’, ‘청소년들이 받는 대접이 그 모양’ 등이 지적되었으며, 피부색, 성적 지향, 나이 등 다양한 차별금지사유들이 언급되었다. 참사에서 사회적 약자에게 피해가 집중되고 있다는 문제의식이나, 기간제 교사의 순직 인정이 안 되고 있는 현실처럼 삶의 차별이 죽음의 차별로 이어지는 문제 등이 조명되었다.
특히 청소년이 평등하게 권리 주체로 인정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의견들이 많았다. 나이 어리다고 무시 받지 않을 권리, 아이들이 공부 못해도 될 권리, 청소년의 투표권 등의 제안이 있었다. 이외에도 청소년이 말하고 주체적으로 행동하기 어려운 현실을 짚으며 제안된 권리들이 있으나 권리 내용이 분명할 경우에는 구체적 권리 항목으로 분류하였다.
연대
연대할 권리, 더불어 살아갈 권리 등의 제안들을 모았다. 다양한 제안들을 모아보면 ‘연대’를 권리로 접근하는 시선들이 확인된다. 공감과 성찰로부터, 우리의 권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모든 이가 연대의 힘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등의 내용을 제안했다. 또한 ‘이타할 수 있는 권리’라는 제안도 있었다. 누군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서로 돕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 중 하나라는 내용이다.
풀뿌리토론 참여자들은 누구나 서로 기대며 살 수밖에 없다는 조건을 통해, 또한 억압 받는 사람들이나 약자들일수록 함께 하는 것이 소중하다는 인식을 통해, 연대를 권리로 제안하였다. 한 참여자는 세월호 참사 이후 함께 하면서 어느 순간 연대를 의무이기보다 권리로 보게 되었고 그러면서 다른 질문(“왜 나의 연대할 권리를 막는가, 연대를 못하게 하는가.”)을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나눠주기도 했다.
안전
생명을 돈이나 숫자로 환원해선 안 된다, 이윤보다 생명과 삶이 먼저여야 한다고 강조한 내용들을 모았다. 세월호 참사는 희생자들의 ‘살 권리’를 침범한 것으로 보고, 생명과 안전을 위협받지 않을 권리, 안전을 요구할 권리 등의 제안이 이어졌다.
사람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국가의 책임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내용들도 많았다.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우리 모두가 위험사회에 살고 있다는 인식이 분명해졌으며 안전이 개별적으로만 추구할 것이 아니라, 국가 또는 사회를 통해서 함께 이루어가야 할 권리라는 인식도 확인되었다. 지역아동센터에서 아이들에게 안전을 권리로 말하려니 너무나 보호받지 못하는 현실이라 인권교육 하기가 오히려 미안하더라는 이야기를 남긴 참여자도 있었다.
생명과 안전에 관한 권리는 죽지 않을 권리에 한정되지 않았다. 공포와 궁핍으로부터의 자유 등 생명과 안전을 삶의 연속적 권리로 연결해가며 확장하는 제안들도 있었다. 한편, 정부가 말하는 안전이 우리가 말하는 안전인지 물어야 한다며 ‘안전’이라는 가치에 대한 고민도 제기되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정부는 국민안전처를 신설하고, ‘안전혁신마스터플랜’ 등의 후속 조치를 취했다. 생명과 안전에 대한 불안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각종 규제완화가 계속 추진되는 현실에서 ‘안전’이 무엇인지 우리 스스로 말하는 것이 앞으로도 중요할 듯하다.
감정을 나눌 권리, 공감
‘슬퍼할 권리’, ‘위로할 권리’ 등 다양한 방식으로 감정을 느끼고 나누는 것에 권리의 이름을 붙인 제안들이 많았다. 참사 이후 저마다 느끼는 감정조차도 자유롭게 드러내고 나누기 어려웠던 현실을 반영한 듯하다. 감정은 타인과의 유대를 확인하는 직접적인 매개라는 점에서, 참사로 무너진 사회를 다시 세우기 위해 섬세하게 살펴야 할 것이기도 하다. 주요 내용을 세 가지로 짚어볼 수 있다.
감정을 느끼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존중받을 권리 등에 관한 내용이다. 이와 관련해서 대다수는 슬픔의 감정을 말했지만 ‘슬퍼하라’는 강요 또한 있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도 있었다. 감정을 강요받지 않을 권리, 슬픔의 주인이 될 권리 등 각자의 감정을 각자의 방식으로 느끼고 드러낼 수 있도록 존중받아야 한다는 내용들이다. 감정과 관련해 제안된 권리들을 모아보면, 피해자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또는 자신의 경험으로 세월호 참사를 겪었음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타인의 감정을 함께 나누고, 서로 위로하고, 함께 울거나 화낼 권리 등의 제안도 많았다. 앞선 권리들이 감정의 주체로서 말한 권리들이라면 여기에서 말하는 권리들은 관계 속에서 감정을 나눌 권리에 주목한 제안들이다. 피해자의 처지를 걱정하는 것이 ‘남 걱정’, ‘쓸데없는 오지랖’으로 지탄되기도 하는 현실을 지적하며 누군가 슬퍼하거나 아파할 때 그것을 나눌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기대가 드러난다. 또한 재난이나 아픔을 어떻게 대하고 관계해야 하는지 알 권리를 제안한 참여자도 있었다. 공감은 개개인의 능력이나 의무인 것처럼 흔히 여겨지지만 어떤 사회인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감정을 느끼거나 공감하기 위한 여유, 시간 등을 강조한 내용들이 있다. 입시나 취업, 생계 등에 매몰되어 슬퍼할 시간과 여유가 한국사회에 없다는 점을 지적하는 내용들이다. 시간을 가질 권리라는 포괄적 제안도 있었다. 개개인이 감정을 느끼거나 타인에 공감하는 것이 삶 전반의 권리를 충분히 누리는 것과 깊이 연결됨을 알 수 있다.
피해자의 권리
인정
피해자를 존중하고 있는 그대로 권리의 주체로서 인정해야 한다는 내용들이 상당수 제안되었다.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경향이나 피해자들에게 ‘도덕적’ 기준을 들이대는 경향 등을 지적하며 피해자들이 슬픔이나 분노를 표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라는 걱정도 많았다. 또한 피해자가 피해나 그 외 사실로 모욕당하거나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내용들도 많았다. 피해 사실 자체가 낙인이 되기도 하고, 피해자의 프라이버시가 보호되기는커녕 피해자를 공격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며, 근거 없는 소문이나 유언비어로 피해가 이중 삼중으로 중첩되는 현실을 보면서 문제를 느낀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한편, 세월호 참사에서 상당수의 희생자들이 학생이었는데 희생자들을 설명하는 방식에 대한 불편함을 제기한 사람들도 있다. “학생답지 않아도 괜찮을 권리, 순수하지 않아도 될 권리” 등이 말하는 것은 피해자가 있는 그대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와 같은 이야기다. 청소년에 대한 전형적인 표현들은 대체로 청소년을 동료시민 주체로 인정하기보다 대상화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접근이 반복될 때 청소년들이 권리 주체로 여겨지지 못하는 현실이 더욱 강화될 수 있다는 우려다.
피해자는 부당한 일을 당해 고통을 겪는 피해자이자 권리를 가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행동할 수 있는 주체로 인정되어야 한다. 이것은 동료시민들 사이에서의 관계에서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국가가 권리주체로서의 피해자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정은 피해자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며 원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감정과 의견을 표현할 수 있기 위한 출발이기도 하다. 피해자의 권리에 대한 한국사회의 인식은 높지 않은 편이었다. 세월호 참사의 경험은 자연스럽게 이와 같은 권리의식을 갖게 한 듯하다.
2) 구체적 권리
피해자를 인정하는 것 외에 피해자에게 보장되어야 할 다양한 권리를 제안한 내용들이 있다. 구체적 권리가 두루 제안되었고 기존의 인권규범에서 확립된 내용들과 유사하나 세월호 참사의 경험에서 드러난 문제들 위주로 제안되었다.
‘미수습자를 수습하여 예를 다할 권리’가 제안되었다. 기존의 인권규범 역시 실종자를 찾는 것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한다. 피해자는 사건의 시작에서부터 신속하고 정확하게 정보가 제공되어야 하며, 의사 결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진실을 알 권리, 사건을 조사하고 참여할 권리 등이 피해자에게 보장되어야 한다는 제안들이 있었다.
배상에 대한 권리도 적지 않게 제안되었다. 배보상 문제가 세월호 참사 피해자들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것을 해치는 유언비어의 주된 소재였던 것은 그만큼 한국사회가 배상을 권리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배상이 적극적인 권리로 제안된 것은 뜻깊다. 다만 실제로 배상에 관한 사회적 경험이 별로 없다 보니 구체적 내용은 제안자마다 다르기도 하다.
사고 수습 과정에서부터 이후 일상생활을 다시 할 수 있을 때까지 물질적이나 정신적으로 모자람 없이 존중받아야 하며 지원을 받기 위해 가난을 증명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등 구체적인 지원이나 회복에 관한 권리들도 제안되었다. 심리적 치유를 위한 지원에 관한 내용들도 제안되었다. 이과 같은 권리들은 포괄적 의미에서 배상에 포함되는 것이기도 하다. 배상을 금전적 보상만으로 이해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도 짚어진 셈이다. 같은 피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할 때에야말로 피해자들이 주체가 되는 것이라며 재발방지대책 마련의 의미를 피해자의 입장에서 짚는 제안도 있었다.
구체적 권리를 제안하면서 개별 권리의 내용보다 거래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짚은 제안들도 많다. ‘욕 먹지 않고’ 배상받을 권리와 같은 제안이 그것이다. 진실이 밝혀질 때서야 위로받고 치유될 수 있다는 내용 등 피해자의 권리들이 서로 연결되어 통합적으로 이해되어야 함을 짚는 제안들도 있다. 한국사회에서 피해자의 권리가 적극적으로 주장되어 오지 못했고, 특히 배보상이 권리가 아닌 모욕의 이유가 되는 현실에서, 풀뿌리토론은 피해자의 권리를 서로 알아가는 소중한 시간이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