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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네 방앗간] 환상에 맞서는 싸움을 이어가기 위해

2013년 8월 여학생 기숙사에서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던 부산대에서 지난 4월 또 다시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번에는 여학생 휴게실이었다. 새벽 시간을 틈 타 한 남성이 여학생 휴게실로 침입했고, 휴게실 침대에서 잠을 자고 있던 여성을 성추행한 것이다. 지난 해 기숙사 성폭행 사건을 통해 학내 외부인 출입을 비롯한 보안 문제가 지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 차원에서 적극적인 재발방지책을 마련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여학생 휴게실은 과방, 동아리방 등 남성 중심적으로 꾸려지는 학내 공간들 중 여성들이 자유롭고 안전하게 쉴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간 중 하나다. 여학생 휴게실이 있다고 해서 학내의 성폭력 발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여학생들이 보다 안전하고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은 분명 필요하다.

여학생 휴게실에서마저 성추행 사건이 발생했다는 사실은 대학 공간의 모든 장소가 폭력의 가능성을 담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가해자는 여자들만 있을 것이 분명한 ‘여학생 휴게실이라서’ 그 곳을 범행 장소로 선택했겠지만, 안전하고 편안한 공간이라고 생각했던 ‘여학생 휴게실마저’ 빼앗겨버린 여학생들은 또 다른 어떤 공간을 찾아 헤매야 하는 걸까. 이 사건은 대학이 성평등한 문화는커녕 가장 기본적인 요구인 안전한 휴식조차 보장하지 못하는 취약한 환경에 있음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여학생 휴게실이 역차별이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학생 휴게실에는 ‘역차별’이라는 딱지가 붙어있다. 남학생 휴게실이 없는 상황에서 여학생 휴게실만 존재하는 것은 ‘역차별’이라는 주장이다. 재밌는 것은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남학생 휴게실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여학생 휴게실이 얼마나 남성 차별적인지를 주장하는데 에너지를 쓴다는 것이다.

But I'm A Nice Guy from Scott Benson on Vimeo.


한 트위터 이용자(@dmthoth)가 링크한 ‘But I'm A Nice Guy’는 역차별 논리에 대한 짧은 애니메이션 영상이다. 남성중심사회에서 모든 아이스크림을 독점해 온(무려 3스쿱 씩이나!) 남성들에게 여성들이 아이스크림에 손을 뻗는 상황은 ‘패닉’이다. (자기 먹을 건 여전히 손에 쥐고 있으면서도!)남성들은 원래 자기 몫이었던 아이스크림을 빼앗기고 말았다는 생각에 발을 동동 구르며 불안을 표출한다. 그 불안은 곧 여성에 대한 분노와 혐오로 발현된다.

여성 혐오로 유명한 모 웹사이트에는 여학생 휴게실, 여성전용 택배, 여성인력 개발센터, 여성 할당제, 안심귀가 서비스, 여성전용 임대아파트, 심지어 여자 대학교까지도 ‘남성 차별’의 사례로 나열되는데 그들의 논리는 이런 식이다. ‘남성은 인력개발 안 해도 되는가?’, ‘남자들은 여대에는 원서도 못 쓰고 지방대로 간다.’, ‘여성전용 임대아파트만 만들면 남성들은 노숙하라는 건가?’, ‘남자 대학생은 휴식도 필요 없다는 건가?’ … 그들은 혼자서 3스쿱 쌓아놓고 먹던 아이스크림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일념 하에 여성가족부를 공격하고, 총여학생회의 대자보를 찢고, 김치녀를 운운한다. 집단적인 정서를 공유하면서 분노는 더 심해지고 혐오의 증상은 더 깊어진다.

하지만 만약 대학 내의 모든 공간이, 사회의 모든 부분이 성별에 관계없이 모두가 평등하게 누릴 수 있는 것이라면(애초부터 아이스크림이 동등하게 주어졌다면) 여학생을 위한 별도의 휴게실도, 여성전용 택배나 안심귀가 서비스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런 장치들은 대학, 그리고 사회에서의 여성들의 위치를 드러내는 것이다. 핑크색으로 ‘여성 전용’을 써놓은, 돈은 적게 들고 가시적인 효과는 배가 되는 장치들로 ‘여성 친화 사회’를 쉽게 말하는 것에는 반발감이 먼저 들지만, 이러한 장치마저 없으면 안전하지 못할 장소들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당신 혼자 앞서 간 유토피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지난해 전국 대학생 555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성평등 실천 국민 실태조사 보고서’는 수업, 동아리 및 학과 활동, 음주문화, 교우관계 등 대학 문화의 전반적인 내용으로 구성된 문항 조사를 통해 성평등 지수 통계를 냈다. 그 결과 전국 대학생 및 대학원생의 성평등 지수는 2.84점으로 직장인 남녀 평균인 2.97점보다 낮았다. 낮은 성평등 지수는 대학 내 성범죄 발생률 증가와 연결된다. 인권위에서 실시한 2009~2013학년도 성범죄관련 현황(전국 107개 4년제 대학)'에 따르면 대학에서 발생한 성범죄는 2009년 32건에서 2010년 42건, 2011·12년 63건, 2013(8월 기준) 69건으로 매년 증가 추세에 있다.

대학생 및 대학원생의 성평등 지수가 직장인 평균에 못 미치고 대학 내의 성범죄가 날로 증가하는 상황에서 ‘대학 내’ 남성중심주의에 대해 성찰하고 성평등한 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이유는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 문화의 남성중심성에 대해 문제제기하거나 이성애 중심주의를 성찰하고,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주장해왔던 총여학생회는 시대착오적이라는 오명과 함께 역사 속의 산물로 사라져가는 추세다.

여성신문에 따르면 단국대, 서울대, 서강대, 성균관대, 한국외대 총여는 총학 산하기구로 편입됐거나 학생복지위 등으로 대체되었고, 건국대는 지난해 1월 학생대표자회의 투표를 거쳐 총여학생회를 폐지했다. 서울시내 학교 중 총여학생회가 남아 있는 학교는 경희대, 동국대, 서울시립대, 연세대 등 5곳에 불과하다. 건재한 총여학생회들 역시 여학생 복지 등 ‘욕먹지 않을’ 활동밖에 할 수 없는 소극적인 위치에 서 있다.

환상에 맞서는 싸움을 이어가기 위해

대학시절 총여학생회에서 활동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환상과 싸우는 일이었다. ‘성을 매개로 한 차별도 폭력도 없는 대학’이라는 환상과 맞서면서 한 편으로는 반성폭력 학칙을 수정하거나 성폭력 사건 제보를 맡아야 하는 딜레마. 여학생 휴게실은 성추행 사건이 발생하는 동시에 ‘역차별’의 딱지를 안은 공간이며, 총여학생회는 여전히 내야 할 목소리가 많지만 그 모든 게 이미 성취된 것으로 여겨지는 딜레마. 길을 잃은 여성주의의 모습은 비단 대학 안의 풍경만은 아닌 것도 같다. 환상에 맞서는 싸움을 이어가면서도 그 환상에 지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 것일까.

* 참고자료
여성신문, 엄수아, <사라진 총여학생회, ‘꼴페미’란 낙인이 두렵다?>, 2014년 3월 12일
연합뉴스, <부산대서 또 성범죄...여학생 휴게실서 성추행>, 2014년 4월 30일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안상수 외 <성평등 실천 국민실태조사 및 장애요인 연구>, 2011년 12월
영상: 'But I'm A Nice Guy'  by Scott Benson (http://vimeo.com/64941331)
덧붙임

케이 님은 언니네트워크 운영지기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