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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황경산의 인권이야기] 피점령 지역 구호원조로 사라진 한국의 식량주권

붓두껍에 목화씨를 넣어서 국내 반입에 성공하고, 몇 개 되지 않는 씨앗을 퍼뜨려 면으로 만든 옷을 입게 한 문익점의 이야기는 스릴 있고, 의미 있는 역사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들어 온 목화가 지금은 학생들을 위한 교육용, 일부 지자체의 거리 조경용으로 조금 심어지고 있을 뿐입니다. 나의 어머니 세대만 해도 시집갈 때 집에서 튼 목화솜으로 이불을 해서 가지고 가는 것이 중요한 혼수였다고 합니다.

물레를 돌려 목화씨를 빼고 솜이나 실을 잣던 사람들이 사라지고 없는 것은 어떻게 이루어진 일일까요?
어릴 적 보릿고개라고 하는 5월이면 이삭을 따서 손과 입이 까매지도록 구워먹던 밀은 어디로 갔을까요?
그 밀농사를 짓던 농민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미국의 남아도는 농산물로 사라진 한국의 면화와 밀

1946년 5월부터 미국 잉여농산물이 ‘피점령지역 구호원조’(Government and Relief in Occupied Area=GARIOA원조)라는 명목으로 시작되어 한국전쟁 중은 물론이고 전쟁 후에도 여러 형태로 계속되었습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MSA 402조’와‘PL 480호’에 근거한 미국잉여농산물 도입입니다. ‘MSA 402조’란 미국 상호안전보장법의 조항 402조로 원조를 받는 국가가 원조액의 일정비율로 미국의 잉여농산물을 구매하도록 한 규정입니다.

이에 따라 한국도 1955년부터 ICA(International Cooperation Administration) 원조액 중에서 약 20%를 잉여농산물 구매에 사용하도록 미국과 협정을 맺고, 실제로 원조액의 약 23%에 달하는 미국산 잉여농산물을 사게 됩니다. 이때 주로 사들인 품목은 원면이 44%, 인견사16%, 소맥(밀)14%, 소모사(털실)9%, 대맥(보리)6% 순이었습니다. 이 잉여농산물을 판매한 대금은 상호안전보장법의 취지에 부합되는 곳에 사용한다는 뜻에서 대부분 국방비로 전입되었으며, 1961년에 끝납니다.

1954년 미국정부는 잉여농산물 재고 처리와 그것을 통한 대외군수물자 판매를 주목적으로 1954년 ‘농업교역발전 및 원조법’을 제정하였습니다. 이것이 ‘PL 480호’라고 불리는 법률이고, 이에 근거하여 ‘PL 480호’ 잉여농산물 원조가 이루어집니다. 한국과 미국은 이 법률에 따라 1955년부터 매년 초 ‘잉여농산물도입협정’을 체결하고 잉여농산물을 도입하였습니다. 이 협정의 내용에는 잉여농산물의 판매로 얻은 한국통화는 미국이 시장개척비 등 주한 미국기관 비용으로 충당하기 위해 사용하고, 나머지 금액은 공동방위를 위한 국방비로 한국정부가 사용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PL 480호’에 의한 원조는 1960년까지 무상원조 형식으로 진행되었으며, 1963년부터는 장기차관 형식으로 그 도입 방식이 바뀌었습니다. 농산물 판매대금은 규정에 따라 10~20%는 미국이 사용하고, 나머지 80%~90%는 국방비에 전입되어 미국으로부터 군사물자를 사들이는데 충당되었습니다. 이 ‘PL 480호’에 의한 무상원조 형식으로 들어온 잉여농산물은 소맥(밀)이 36%, 대맥(보리)17%, 쌀17%, 원면11% 순이었습니다.

이렇게 이루어진 미국의 잉여농산물 원조는 한국의 심각한 식량 사정을 완화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저렴한 잉여농산물이 대량으로 도입되면서 곡물 가격이 크게 하락하였고, 그로 인해 농가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으며, 밀과 면화수입으로 밀농사와 목화농사는 국내 생산이 붕괴하여 자급률이 거의 0%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사진설명]2013 전국농민대회 당일, 쌀 목표가격 23만원 보장이 아스팔트에 새겨졌다. 사진 출처: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br />

▲ [사진설명]2013 전국농민대회 당일, 쌀 목표가격 23만원 보장이 아스팔트에 새겨졌다. 사진 출처: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계속되는 잉여농산물의 공격

1991년에 ‘우리밀살리기’ 운동이 시작되어 자급률을 높이기 위해 활동하고 있지만, 여전히 국내산 밀 자급률은 2~3%대에 머무르고 있는 실정입니다. 무너진 생산기반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이제는 농업을 무역의 대상으로 보고 이루어지는 우르과이라운드 협상부터 FTA(자유무역협정),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등을 통해 계속되는 수입농산물로 인해 여전히 어려운 상황입니다.

1960년경까지 이루어진 미국 잉여농산물 원조 이후에도 정부는 저곡가정책을 유지하면서 농민들의 이농·탈농으로 산업예비군을 늘렸고, 농업기반은 무너졌습니다. 이 과정에 수많은 농민이 삶의 터전을 버리고, 농업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삶을 포기한 사람도 부지기수입니다.

우리 국민들은 우리 땅에서 자란 밀을 먹을 수 없게 되었으며, 우리의 면화로 만든 옷과 이불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한국은 2003년을 기준으로 식품의 50% 이상, 주요곡물의 70%를 수입하고 있습니다. OECD가입 30개국 중 곡물자급률이 27위에 해당할 정도로 식량자급기반은 매우 취약합니다. 밀은 쌀 다음으로 중요한 곡물이지만 99%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무기가 되고 있는 식량

세계적으로 식량은 자연재해, 수급의 불안전성으로 인한 가격 파동뿐만 아니라 정치적 압박 수단이 되기도 하고, 한 나라의 정책을 좌지우지할 만큼의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합니다. 1976년 자이르(현 콩고) 정부가 곡물 대금 결제를 지연하자 초국적 곡물기업 콘티넨탈은 자이르의 밀 공급을 중단, 현금지불과 이듬해 밀의 독점 수입을 약속받고 나서야 수출을 재개했습니다. 1980년 우리나라도 냉해로 쌀이 부족하자 당시 미국 쌀 가격의 3배를 주고 샀으며, 그 후로도 ‘5년간 살 것’을 약속했고, 그때 구매한 미국 쌀이 1989년까지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1988년 사하라 이남의 최대 소맥 수입국인 나이지리아 정부가 국내 식량생산 감소를 이유로 소맥 수입을 금지하자 초국적 곡물기업 카길은 미국정부에 압력을 행사하여 나이지리아의 섬유수출을 제재하는 것으로 보복했습니다. 1994년 일본에서도 쌀 흉년이 들었을 때 다국적 곡물기업들은 쌀 가격을 3배까지 올린 바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밀과 면화 농사는 이미 그 생산기반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봐야 하는 상황입니다. 밀농사와 함께 사라진 전통음식을 생각하는 것은 사치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먹는 수입 밀가루와 수입면화로 짠 옷들이 언젠가 무기가 되어 우리를 공격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덧붙임

김황경산 님은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정책국장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