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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 책의 유혹

[책의 유혹] 기다리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인 까닭에』, 류은숙 지음, 낮은산, 2012

인권이라는 말, 참 싫다.
사람들 입에서 인권이라는 말이 담기는 순간이 싫다. 그런 순간은 대게 인권이 목마른 순간일 때가 많다. “인권이고 나발이고”, “인권도 좋지만”식의 인권을 비난하려는 의도의 말도 물론 싫지만 “나도 인간이다”, “우리도 사람이다”, “우리에게도 인권이 있다”는 그 말도 싫다. 사회가 야박하고 모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신음처럼 뱉는 말. 인권. 그래서 인권이 때로는 참, 싫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지긋지긋할법한 인권을 스무 해 넘는 동안 옆구리에 끼고 살았다. 때로는 돌베개보다 딱딱한 그것을 베고 잤을 것이다. 더 자주는 쓰러진 사람의 짐승 같은 통곡 속에 그것의 무참함을 뼈저리게 안고 소주잔만 기울였을 것이다. 류은숙이 그랬을 것이다. 류은숙의 첫 번째 책 『인권을 외치다』중에서 서문을 참 좋아한다. 어느 날인가 복잡한 누군가들의 문제를 안고 덜컹거리는 기차를 탔던 날이었을 것이다. 그 기차 안에서 서문에 담긴 문장을 읽고 한참 훌쩍거렸다. “‘인권의 저자’란 인간의 고난과 굴욕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도전해온 사람들이다. 인권을 써내려온 사람들, 지금도 인권을 쓰고 있는 사람들이 이 문헌집을 통해 조우하는 기쁨을 누렸으면 좋겠다. 부족한 글이나마 인권의 저자들에게 바치고 싶다.” 서슬 퍼런 세월을 살아내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힘도 되지 못하는 무력감에 지쳐있던 나에게 그 말은 어떤 위로보다 더한 힘을 주었다. 인권을 쓰고 있는 그대들 곁에 같이 있을 힘을 주었다. 나는 그것을 ‘연대’라고 이해했고, 쓰디쓴 ‘인권’의 독배를 피하지 않을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류은숙은 두 번째 책 『사람인 까닭에』에서 연대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를 풀고 있다.

인권의 역사를 인간이 아닌 자들이 인간이 되고자 하는 투쟁의 역사라고 이해한다. 비시민인 사람들, 투명인간인 사람들, 열외이고 배제되고 쓰레기인 삶들이 ‘나도 인간이다’라고 외치며 등장하는 역사. 그래서 ‘하늘이 내려준 권리’라는 말은 현실에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감히 말한다. 낯선 사람들. 나 또는 우리 삶 속에 들어오지 않았던 사람들. 그래서 소외되었는지조차 몰랐던 사람들. 『사람인 까닭에』의 등장인물들도 그렇다. 류은숙이 만난 낯선 향료 냄새가 뒤섞인 농성장의 이주민, 강제자율학습을 헌법 소원한 청소년, 인권영화제 개막작 ‘하비밀크의 시대’에서 만난 동성애자, 비장애인 동료와 함께 똥물을 뒤집어쓴 장애인. 투명 망토를 벗고 속속 등장한 사람들과 사건들 속에서 류은숙은 고백한다. “이들은 나의 명단에 있던 사람들인가?” 그러나 곧 경계가 바뀐 어느 이국의 도시에서 발등에 침을 뱉는 인종주의자를 통해, 나는 나 그대로였지만 내 존재는 그 자체로 이방인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말한다. “어쩌면 비시민을 통해 시민의 참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때리지 마세요. 욕하지 마세요.’라는 팻말을 든 투명인간이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은, 때리고 욕하는 이들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그냥 방치하면 언젠가 우리도 욕먹고 맞는 투명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경고일지도 모른다.”라고. 그러한 경계를 넘나들며 존재로서만 인간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하는 힘이 연대라고, 그래서 연대는 자유, 평등과 함께 꾹꾹 눌러써야 할 인권의 목록이라고 적는다. “배제에 반대하고 포함을 열망하는 것이 그 변신의 추동력이었다. 변신에는 늘 도전하고 도전받는 사람들이 속해 있는 틀에 대한 재고려가 있었다. 판을 새로 짜지 않으면 당대의 투명인간이 드러나거나 입장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간다. “그러기에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위치에서 투명인간의 망토를 뒤집어쓰고 세상을 보는 시도마저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인권은 책으로 배워지지가 않는다. 세계인권선언을 백번 읽느니 인권의 현장, 강정과 쌍용차해고, 용산참사, 탈핵의 문제를 안고 농성 중인 대한문 앞의 함께살자 농성장에 한번 가는 게 낫다. 장애학을 수강하느니 광화문 농성장에 하루 당번을 하는 게 낫다. 그렇게 쓰고 나서 보니 이번 책의 서문에도 그런 말이 쓰여 있다. “‘연대를 책으로 배웠어요’와 다를 바 없는 글을 쓰고 있다는 생각에 몇 번을 엎었다.”고. 그리고 류은숙은 하루에도 몇 번씩 무너지는 정치적 올바름을 안고 사는 찌질함에 대한 부끄러운 고백을 썼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어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아는 장애인은 다 죽었다'는 부제가 달린 챕터를 가장 먼저 썼다고 말한다. 류은숙이 강사로 간 청년학교의 프로그램을 기획하던 태수씨가 그 청년학교 수료식 도중 과로로 사망했다. “망치로 얻어맞은 느낌의 부고였다. 떨리는 마음으로 그와 나 사이에 오간 말과 행동을 순서대로 벌여 놓고 되짚어 볼 수밖에 없었다. … 나는 숱한 강연 가운데 한 번으로 여겼을 뿐이었다. 나에게는 빨리빨리 끝내면 그만인 사소한 실무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 과정 하나하나가 새로운 도전이었다. 한밤중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포스터 몇 장을 전해주러 왔던 그 마음을 나의 속도전이 뭉개 버린 것이다.” 이쯤에서 한참 책장을 덮어야 했다. 쏜살같이 되짚어지는 부끄러움들이 길게 줄을 섰다. 장애인의 속도를 이야기하고 낯선 것의 환대를 되풀이 말하며, 참으로 많이도 저질렀던 내 무례함. 또는 미숙함. “우동민, 이현준, 정태수, 이 사람 말고도 내게 찾아왔으나 내가 관계 맺기를 거부하고 부고를 들은 뒤에야 관계를 복기해 본 일은 더 많이 있다. 그런 탓에 이렇게 ‘내가 아는 장애인은 다 죽었다.’라고 쓰게 된다.” 류은숙의 찌질함은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는 대사를 이해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모두의 고백이지 않겠나. 안면 있는 비장애인 활동가가 나타나 다리를 놓아줄 때까지 그들 주위를 배회하기만 했던 기억에서 “00씨, 추운데 모자 안 쓰면 큰일 날 수 있어요. 모자 없어요? 내가 하나 선물해 줄까요?”라고 나도 모르게 던지는 말, 연민이나 자선이 아니라, 상호관심에 이르게 되는 태도. “상호관심은 서로가 다가서는 것이다. 나만 다가서는 것도 저쪽만 다가오는 것도 아니다. 그간 나는 수동적인 타자에게 다가가는 나의 적극성만을 연대의 실천으로 떠받들어 온 것은 아닐까? 타자의 관점과 역할을 취하는 것은 서로에게 다가서는 서로의 공동 책임인 것이다.”

『사람인 까닭에』에는 그야말로 사람이 참 많이도 등장한다. 스코틀랜드에서 강정마을로 와서 평화를 지켰던 앤지 젤터도 있고, 류은숙의 학교 앞에서 껌을 팔았던 땟국이 흐르는 소년, 아기 업은 엄마, 드센 할머니도 있다. 어린 시절 대인 지뢰에 한쪽 팔과 눈을 잃은 에리테리아의 아브라함도 있고, 류은숙의 인권강연을 통해 자유를 얻어서 기쁘다고 말하는 소년도 있다. 그들 모두는 “나는 너와 다르기 때문에 내가 되고, 너는 나와 다르기 때문에 네가 되는 거잖아. 서로의 차이는 서로의 존재 조건이야. 그런데 네가 그런 차이 때문에 당하는 고통이 있다면, 그건 나뿐 아니라 모두와 상관있는 문제야. 그러니 같이 의논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길을 찾아보자.”고 말한다. 그것은 ‘내 마음에는 안 들지만 내가 너의 그 차이를 참아내고 봐줄게’라고 말하는 관용도 아니고, 중앙방송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주변 방송을 멈추고 하나로 집중하자는 대동단결도 아닌 것이다. 그래서 류은숙이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만으로도 어디야”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차이에 대한 관용을 넘어 타인의 불리함에 적극 뛰어드는 자세”다. 그게 연대지. 그래서 “지금 가고 있어. 곧 갈 거야. 기다려.”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친 사람들이 어느 골목에서 죽음과 만나기 전에 후딱 채비를 하는 것이다.

농성장 담당도 아니었고 회의도 만남도 없는 날, 무작정 대한문 쌍용차, 함께살자 농성장에 죽치고 앉아있던 날이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회의 있어서 왔냐고 몇 번을 되물었다. 그러나 나는 그냥 오고 싶어 왔다고, 한가롭기 그지없이 앉아있었더랬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 곁에 하루라도 있고 싶었고 또다시 류은숙의 서문에서 얻은 10년 어치쯤의 위로를 갚고 싶었다. “나의 찌질함을 타인에 대한 공감으로, 나의 억울함과 분노를 원인에 대한 인식으로, ‘될 대로 되라’식의 나의 포기를 ‘같이 해 보자’는 도전으로 갈아 입혀 주는 사람들이 바로 그 전령들이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 한, 기다리는 심정을 헤아릴 수 있는 한, 만남의 기대와 실망을 겪어낼 수 있는 한, 누구도 연대의 전령이 될 수 있다.”
덧붙임

박진 님은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