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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교육, 날다] 차별, 혐오를 이야기하다

차별의 얼굴은 다양하다. 일반적으로 차별은 한 사회의 재화, 서비스 등에 대한 분배의 문제와 기회의 박탈, 혹은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에 대한 물리적․언어적․심리적 폭력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 속에서 작동하는 차별은 이것이 차별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애매하거나 인지하기 쉽지 않다. 어린이․청소년이나 장애인처럼 우리 사회에서 미성숙하고 보호가 필요하다고 이야기되는 사람들에게는 보호주의의 상냥함으로, 사회질서를 위협한다고 간주되는 사람들에게는 안전의 사이렌 혹은 옐로카드와 같은 경고장으로, 때로는 개인의 감정에 들러붙어 개인의 취향과 기호로 혹은 무관심으로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도 한다. 이렇게 차별은 사람들의 정서에 영향을 끼치면서 눈에 보이지 않게 끊임없이 반복되고 재생산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차별행위를 어떻게 포착할 수 있을까? 우리들의 감정과 뒤엉켜 내재화되어있는 차별의 실타래를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까?

무엇보다 인권교육을 진행하는 처지에서 차별로 잘 걸러지지 않는 사람들의 태도나 감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국인에게 냄새나서 냄새난다고 하는 건데’, ‘노숙인이 더러운 건 사실이잖아요’라는 말 속에 흐르고 있는 본질이 무엇인지,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일상의 습관들이 어떻게 차별을 유지하고 확대시키는지 꼼꼼히 살필 때 견고한 차별의 벽을 넘어설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고민이 차별의 원인이자 결과로서의 혐오라는 키워드에 가 닿았다. ‘혐오’는 어떤 것을 공포, 불결함 등의 이유로 기피하는 감정으로 그 정도가 매우 강한 감정을 의미한다. 그래서 모든 혐오가 차별을 구성한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그 내용을 잘 살펴보면 개인, 특정 집단이나 조건에 대한 구조적 편견에 기반하여 표출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이런 것까지 혐오야? 말을(표현을) 하지 말라는 거야?’라는 생각에 앞서 혐오라는 감정이 어떤 사회적 맥락 속에서 형성되고 유지되는지 살피는 것이 차별의 해소에 일정 정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얼마 전 진행된 ‘오르락내리락 고개 넘기 심화워크숍’에서 ‘혐오’를 키워드로 각자의 차별감수성을 들여다보았다.

날개달기 - 나의 차별감수성은?


인권감수성, 차별감수성을 이야기하지만 ‘감수성’만큼 다가가기 어려운 것도 없다. 감수성이 교육을 한다고 커지고 풍부해지는 것일까? 더구나 이미 이런저런 이론과 경험으로 무장된 활동가들이 자신을 무장해제하고 날것의 감정들을 직시할 수 있을까? 하지만 참여자들이 자신의 감정을 모두 드러내고 공유하지 않아도 자신의 마음에 이는 동요를 낚아챌 수 있다면, 그것이 지금까지 나와의 결별일 수 있다는 믿음으로 몇 가지 상황을 제시했다.

- 공원에서 동성끼리 키스하는 모습을 본다면 경계하게 될 것 같다.
- 내 가족 중에 한 사람이 커밍아웃을 한다면 ○○할 것 같다.
- 억척스럽게 구는 ‘아줌마들’을 보면 짜증이 날 때가 있다.
- 다문화가족2세가 미래의 사회불안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
- 영등포의 이주민 밀집지역으로 이사가야 한다면 좀 망설여질 것 같다.
- 감염위험이 있는 질병을 가지고 있는 경우 이력서에 별도 기재를 해야 한다.
- 형법 제297조(강간) 폭행 또는 협박으로 부녀를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우리는 특정집단의 사람들과 의도적으로 소통하기를 거부하면서 오히려 왜곡된 시선과 편견을 형성하는 경우가 많다. 위의 상황에 대한 참여자들의 반응 속에서 일종의 '카더라 통신(*)'이나 막연한 공포가 타인에 대한 혐오감을 키우고 외부와의 장벽을 만드는 일등공신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주민은 사회불안을 야기할 것이라는 두려움, 감염위험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우리’의 안전과 만나니 반차별의 지향은 뒷걸음치기도 했다. ‘차별은 나빠, 차별을 하면 안 돼’라는 형식적 선언과 당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성소수자, 여성, 이주민, 감염인과 실제 어떻게 관계 맺고 함께 살아갈지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여전히 ‘난 다 인정해. 내 주변 사람만 아니면 돼’라는 처세에서 맴돌지 않을까?

더불어 날갯짓 - 무엇이 혐오인가

내 안의 차별감수성을 톡톡 건드려 본 후 본격적으로 무엇이 혐오인지 찾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모둠별로 성소수자, 노숙인, 장애인, 여성 및 기타 사회적 소수자들을 중심으로 일상에서 어떤 차별(혐오)에 직면하게 될지 자신의 경험 속에서 찾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혐오표현으로만 국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여성주의 저널 일다(2003.6.9)에 실렸던 ‘호모포비아 아홉 가지 유형’-태도, 이성애중심주의(사회 질서), 언어, 상호인격, 제도나 시스템, 관심, 내재화, 수동적, 폭력-을 고려해서 접근해볼 것을 주문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타자화, 한 사람 한 사람 존재에 대한 접근이 아닌 다문화, 장애인 등 집단 정체성으로의 접근이 만드는 분리와 배제, 당사자의 선택의 기회와 존중의 결여, 제도나 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차별의 이야기들이 모둠토론에서 쏟아졌다. 그런데 그럴수록 무엇이 혐오인지, 왜 혐오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했는지 목적이 혼란스러워졌다. 타자에 대한 기피와 반감, 분노와 같은 혐오감정과 차별이 어떤 관계 속에서 작동하는지, 혐오가 어떻게 특정집단을 분리하고 배제하는 데 기여하는지, 우리가 사소하다거나 별거 아니라고 여기고 간과했던 것들이 사실은 어떤 사회적 맥락 속에서 형성되고 유지되어 왔는지 세밀한 밑그림이 그려지기보다는 좀 더 명백한 차별상황이 전개되면서 사회적 약자의 처지를 재확인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무엇이 혐오이고, 혐오가 어떻게 차별을 구성하는지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제 막 혐오에 관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 시점이므로 앞으로 좀 더 풍부한 논의의 기회가 이어지길 기대하며 당사자가 느끼고 경험하는 혐오는 어떤 것인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무엇이 문제인지 분명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상황에서 당사자의 입장에 서는 것이 최선일 것이기 때문이다. 성소수자 당사자와 장애인 당사자 두 분과 함께 일상 속에서 사람들의 어떤 태도와 말들이 혐오로 다가오는지, 어떤 상황에서 혐오감을 경험하는지,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서로의 고민을 풀어보았다. 이것은 혐오와 사회문화적인 구조, 권력의 구조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파악하고 인식하는 과정이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당사자의 감정과 경험에 공감할 때 적극적으로 현실을 변화시킬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머리를 맞대어

사람은 백지상태로 태어난다고들 하지만 혹자는 백지상태인 아이는 없다고 한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그가 속한 공동체의 가치관을 습득하고 자연스럽게 발전시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행동, 태도를 단순히 개인의 취향이나 성격의 문제로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미 사람들의 행위는 사회적 위치와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다시금 자신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내가 반감과 기피의 감정을 투사하는 대상은 누구인가? 사실은 그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혐오를 하고 있는 나를 살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카더라통신 : '-고 하더라'에서 나온 말, 추측성으로 만들어진 소문
덧붙임

묘랑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