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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테의 인권나무 키우기] 독설을 듣도록 강요하는 사회

모두가 골고루 가치 있다는 얀테의 법칙

대학 1학년 때 전공 강의를 해주셨던 교수님은 가끔 독소를 머금은 말씀들을 쏟아내곤 하셨다. 젠더, 전공, 나이 등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이었던 교수님의 공격적 지적은, 특히 복수전공을 하는 학생들에게 더욱 가혹했다. “전공수업 어려워. 그림 찍찍 그리는 미대생이 들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공대에서 공부하기 답답해서 도피하고 싶은가? 이공계에서 인문대 수업 듣는 학생들 태반이 그런 도피형이야.” 4학기 넘게 인문대학에서 복수전공을 하던 그 공대생은 결국 졸업을 두 학기 남겨놓고 복수전공을 포기하고 말았다. 당시에는 복수전공이 지금처럼 보편적이지 않아서 학과에 작은 파장이 일었다. 얼마 후 그가 더 이상 수업에 나타나지 않자, 교수님은 “바보 같군. 정말 하고 싶으면 누가 뭐라고 해도 소신 있게 하는 것이지! 아주 어린이 같구먼.”이라고 말씀하시며 혀를 끌끌 차셨다.

대학시절 시를 창작하는 모임에서 습작 활동을 했다. 한 동기가 엘리베이터를 ‘엘리베이트’라고 썼다. 이때 한 선배가 대단히 화가 나서 의도를 갖고 철자를 잘못 썼는지 물었다. 동기는 솔직담백하게 실수로 잘못 썼다고 이야기했다. 이때부터 거의 한 시간 넘게 동기는 여러 선배들에게 험상궂은 타박을 들었고, 급기야 당장 시를 절필하라거나, 개나 소나 시를 쓴다고 하지만 맞춤법조차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 시를 쓴다고 설치는 것이 가관이라는 이야기를 거침없이 들었다.

우리가 너무 자주 듣는 못된 말들

한국사회에서 살다보면 험한 공격을 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특히 경쟁에 내몰린 사람들의 경우에는 마치 통과의례처럼 자신의 단점을 노골적으로 지적하며 모질게 질타하는 말들에 인내해야 한다. 만일 상처받은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자리를 박차며 울부짖는다면, 한심하기 그지없는 나약한 사람들의 떼라며 야유를 받을 것이다. 인재를 뽑는 채용과정에서부터 입시 면접 등에서까지 이른바 압박 면접이 보편적으로 실시되고 있다. 지원자의 결점을 예리하게 간파한 뒤 공격적인 어조로 속사포 같은 질문을 퍼부어서 반응을 테스트한다는 것이다. 이때 ‘바람직한 태도’는 제아무리 자신의 약점을 가차 없이 쑤셔대는 말을 들어도, 괜찮은 척 꿋꿋하게 맞서며 심복이 되기 위해 결점을 빠른 시간 내에 고치겠다고 서약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만일 찝찝한 표정으로 짤막한 답만을 할 경우, 괘씸하다거나 입사 이후 대인관계에 결함을 지닌 인물로 보여서 불합격된다고 한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나를 잘 알지도 못할 뿐더러, 나의 인생을 책임져줄 것도 아닌 사람들이 뱉어내는 언어폭력을 참도록 훈련받고 있다. 구직자들이 자주 찾는 카페에 게시된 에피소드들 중에는, 고발을 해도 될 성싶은 말들도 드물지 않다고 한다. 아픈 가슴을 속으로 주무르며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벌거벗겨진 기분으로 관찰당하는 대가로, 우리들은 이른바 경쟁의 대열에서 간신히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험난한 구직과정이 끝났다고 해서, 모욕적인 말을 듣는 것이 끝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더욱 잔악무도하고 자세한 결점 지적이 잇따른다. 친구의 누나는 어린 아들이 소아암에 걸려서 극심한 생계난에 시달리자, 아이를 친어머니에게 맡긴 후 백화점에서 정규직 점원으로 근무한다고 한다. 속옷을 판매하는 그는 종종 성희롱적인 발언을 고객들로부터 듣는다고 한다. 하지만 정면으로 문제를 삼으면, 어쨌든 시끄럽고 까다로운 직원으로 낙인 찍혀서 해고될까 봐 참을 인자를 쉴 새 없이 되새기며 생활고를 떠올린다고 한다. 백화점에서 바라는 직원상도 ‘인내심이 다분하고 강인’해서 얄궂은 손님들의 행패를 침착하고 인내심 있게 참아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노동관을 갖고 있는 백화점에서 일하는 데다, 또 다시 정규직 자리를 구하는 것은 하늘에 별 따기인 사회적 약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나쁜 주둥이’에 맞서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오늘날 구직시장은 무조건 묵종하고 참아내는 노예 같은 인간을 원하기에, 감정 따위는 돈을 벌기 위해서 내던져야 하는 가벼운 것으로 치부된다. 살기 녹록하지 않은 세태에, 사람들은 경쟁시장에서 언어폭력을 상시적으로 겪으면서도 변변한 대응을 하지 못한 채 무급 감정노동까지 수행해야 한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독설은 폭력사회의 축소판

한국사회가 얼마나 경쟁 과정에서 지원자들의 약점을 스스럼없이 공격하는 것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는지는, 요즈음 한창인 각종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역력히 볼 수 있다. 유명해지고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힘을 쥐고 있는 심사위원들이 뭐라고 씨부렁대도, 권력관계에 복종하며 꾸지람을 들어야 한다. 동시에 몇몇 지원자들이 애써 굵은 눈물을 참아가며 경쟁과정에서 수모를 감내하는 것은, 자신도 유명해지면 약자들을 괄시하며 독설을 퍼부을 권력이 생긴다는 한국형 대물림을 기대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와는 좀 다른 스웨덴 식 리얼리티 프로그램

스웨덴은 한국 이상으로 미국 대중문화의 영향력이 두드러져서 텔레비전을 틀면, 마치 미국에서 방송을 보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종종 있다. 스웨덴에서는 요즈음 최고의 요리사나 가수, 비만 극복자들을 뽑는 리얼리티 경쟁 프로그램이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크게 보자면, 미국이나 한국의 동종 프로그램과 유사한 형식으로 진행된다.

<스웨덴의 목소리>에서 심사위원들이 환하게 웃으며 지지 버튼을 누르고 있다.

▲ <스웨덴의 목소리>에서 심사위원들이 환하게 웃으며 지지 버튼을 누르고 있다.


까롤라 해기크비스트를 비롯한 유명 가수들이 고정 심사위원으로 참여하지만 청중과 심사위원들은 현격한 차이를 지니지 않고 함께 무대를 즐긴다.

▲ 까롤라 해기크비스트를 비롯한 유명 가수들이 고정 심사위원으로 참여하지만 청중과 심사위원들은 현격한 차이를 지니지 않고 함께 무대를 즐긴다.


그러나 세부적인 내용에서는 사뭇 다른 점이 있다. 예컨대, <스웨덴의 마스터 셰프>(Sveriges Mästerkock)는 수많은 경쟁자들이 내로라하는 요리사들 앞에서 요리로 겨루어서 합격과 불합격을 치열하게 다투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에서도 전문 요리사들이 채찍을 날카롭게 던지기도 하지만, 더욱 많은 비중을 당근을 주는 데 할애한다. 심사위원들과 참가자들 사이의 위계는 그다지 크지 않으며, 칭찬을 해주거나 유머를 재치 있게 던져서 긴장하고 있는 참가자들의 마음을 녹여주는 게 더욱 많다. 이외에도, <스웨덴의 목소리>(The Voice Sverige)는 노래를 잘 부르는 아마추어 가수들이 유명가수들로 구성된 심사위원들과 청중들 앞에서 각자 준비한 노래들은 열창하는 프로그램이다. 네 명의 심사위원들은 지원자들의 외모를 아예 보지 못하도록 의자를 반대방향으로 향한 채 앉아있다. 만일 심사위원들이 지원자들의 노래솜씨가 흡족히 마음에 들어서 음악을 즐기고 싶으면, 버튼을 누른 뒤 지원자 쪽으로 의자를 돌릴 수 있다. 또한, 이 프로그램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지원자들은 네 명의 심사위원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가수에게 코칭을 신청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점이다. 서로가 서로를 고르는 기회가 주어지는 형태이다. 이 프로그램에서도 예의를 갖추어서 단점을 지적하기도 하지만, 더욱 많은 비중을 앞날이 창창한 신인가수들의 기를 북돋워줘서 가수로 데뷔하는 데 기여하는 데 둔다.

모두가 골고루 가치 있다는 얀테의 법칙

▲ "우리는 당신을 원합니다."라는 메시지.

리얼리티 경쟁프로그램만 한국과 다른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는 어느 누구도 상대방에게 자신의 편견 어린 평가를 마구 주절거리는 것이 허용되기 힘들다. 저마다의 존엄성을 지니고 있는 평등한 인간으로 구성된 사회에서, 타인을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는 것이 스웨덴 사회의 저변에 약속처럼 흐르고 있다. 일례로 스웨덴에서는 매장 점원들이 한국에 비해서 친절하지 않다. 시종일관 미소를 지으면서 고객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감언이설을 해야 하는 것이 드물다. 이것이 어떠한 사람들에게는 한국보다 안 좋은 점으로 비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상대적으로 가난하고 저학력인 매장 점원들도, 전문직에 종사하는 어느 부자들 못지않은 권리를 갖고 있으므로 모욕적인 처사를 받으면 안 된다는 것이 비교적 잘 지켜지고 있다. 예컨대, 스웨덴에서는 점원이 고객으로부터 성희롱을 당하면 즉시 그 자리를 철수할 수 있다고 한다.

독설은 폭력의 각성제

상대방에게 가열 찬 말들을 던지는 이들의 공통적인 대의명분이 있다. 모진 말들을 굳세게 이겨낼 수 있어야 성공한다는 것이다. 온실 속에서 화초처럼 자란 사람들과 달리, 공격적인 말들을 잘 참는 것이 어른스럽게 철이 드는 징표란다. 갈수록 사회에 만연해지는 ‘나쁜 주둥이’가 경쟁사회의 필요악이라고 하지 말자. 돈을 벌어서 살아남기 위해서 가슴을 후벼 파는 말들을 마냥 들으라고 강요하지 말자.

끝도 모르게 확산되는 권력 위계 속에서, 견제 없는 강자의 횡포와 약자의 인내가 결합된 언어폭력이 오늘날 한국사회의 폭력적인 풍경의 각성제이다. 심지어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가장 날카롭게 독설을 퍼부은 사람들이 더욱 스타성을 구가하기도 한다. 그만큼 나쁜 말들이 주는 가학성과 피학성에 중독돼 있는 것일까.

우리 자신에 대해서 함부로 내뱉는 말들을 들을 때 느꼈던 굴욕감과 황폐한 마음을 떠올려보자. 더 이상 괜찮다고, 이제는 적응되었다고 의식적으로 말하기보다, 우리의 목소리를 찡그린 표정으로나마 차츰 표현하는 것이 어떨까. 너무나 당연한 인권이 만신창이 되는 것을 끊기 위해서라도, 나쁜 말들을 지껄이고 듣는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덧붙임

나이테 님은 인권운동사랑방을 후원하는 자유기고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