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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경의 인권이야기] ‘무장애’, 장애에 대한 인식을 뛰어넘다


#1

10월 마지막 주 토요일, <술이 깨면 집에 가자>라는 일본 영화 한 편이 상영됐다. 영화는 장면이 진행되는 줄거리를 해설해 들려주고, 자막으로 대사의 화자와 음향효과 등을 표기해주었다. 시・청각 장애인을 배려한 이 영화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개봉된 무장애(barrier free, 배리어 프리)영화였다.

지난 6월, 회사에서 국제도서전에 참석해 책을 전시할 때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우리가 만드는 책은 독서장애인을 위한 대체자료이다. 글씨가 아주 크거나, 소리로 들을 수 있거나, 만져서 감촉을 느낄 수 있는 등 기존의 비장애인만을 위한 독서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책읽기를 시도하는 것들이다. 저시력인과 노령인구를 위해 글씨를 아주 크게 만들고 묵자와 점자를 혼용해 시각장애 아동과 비시각장애 아동이 구분 없이 같은 책을 함께 읽을 수 있게 했다. 본문을 읽어주는 보이스아이(시각장애인용 문자 음성 전환) 바코드와 오디오 시디(CD)를 첨부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다양한 기능을 가진 책을 재미있어 했다. 우리 출판사 역시 모든 사람의 정보접근권에 대한 무장애를 지향한다.

[그림: 윤필]

▲ [그림: 윤필]


요즘 곳곳에서 들을 수 있는 무장애(barrier free)운동은 노령인구와 장애인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위해 물리적/제도적 장벽을 허물자는 운동이다. 원래는 건축 분야에서 사용되기 시작해 지금은 더 넓은 의미로 확대 사용되고 있다. 요즘 신축되는 공공기관 화장실에 대부분 장애인을 위한 쾌적한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는 것도 같은 의미다.

그런데 정작 그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본 적이 없다. 장애인 화장실이 청소도구함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자주 봤다. 각종 청소 비품과 도구가 쌓인 화장실이 훤히 열린 채로 흉물스럽게 방치 되고 있는 걸 볼 때면, 도서전시회에 부스를 찾아와 책이 너무 예쁘다며 삼십분이 넘게 만지작거리던 관람객이 “그런데 이런 거 보는 사람이 있긴 있어요?”라고 무심히 던지는 말을 들을 때처럼 맥이 빠지곤 한다.

#2

1995년 9월 23일 강동구 지역 신문에는 <주민, “초등학교 앞에 짓겠다”는 발상이 문제>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당시 점자책을 만들고 대출 서비스를 하던 사설 점자도서관이 구청의 지원을 받아 도서관 건물을 짓게 되자 주민들이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주민들은 “하필이면 초등학교 앞에 짓겠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도서관 건립을 반대했다. 주민들이 특히 우려했던 문제 중 한 가지는 ‘시각장애자들이 몰려다녀 자녀들이 흉내 내지 않을까 하는 우려’라고 쓰고 있다. 16년 전의 일이다.

<전주시 장애인목욕탕 주민 반대로 공사 중단>이라는 기사는 2011년 6월 2일 에이블뉴스에 실렸다. 전북 전주시가 중증 장애인을 위해 짓고 있는 ‘장애인 전용 목욕탕’이 주민들의 반대로 공사가 중단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주차난과 소음 등을 반대 이유로 꼽고 있지만 대체적인 시각은 ‘내 집 앞에 혐오시설은 안 된다’는 ‘님비(NIMBY) 현상’ 때문이라고 전하고 있다.

#3

평일 강남 대로변에서 버스를 탈 일이 있었다. 퇴근 시간이라 도로는 붐볐고 사람도 많았다. 그런데 연인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올라타서 한참 동안 버스 입구에 서 있었다. 주섬주섬 옷을 뒤지는 모습이, 교통카드가 없어진 모양이었다. 앞에 선 남자는 가방과 옷섶을 뒤지고 있었고 뒤에 선 여자는 남자에게 분명 거기 어디 있을 테니 잘 찾아보라고 다그치는 중이었다. 그 바쁜 강남 한복판에서, 발이 다 올라오기도 전에 문을 닫고 출발하기로 유명한 버스가 한참을 서 있으니 곧 사람들이 술렁대며 그쪽을 쳐다봤고 당황한 남자는 다음 차를 타자며 내리자는 시늉을 했다. 사람들의 짜증 섞인 탄식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여자는 다시 남자에게 잘 찾아보라는 말을 했고 진땀을 뻘뻘 흘리던 남자는 드디어 지갑 안쪽 깊숙한 곳에서 카드를 찾아냈다. 기사는 신경질을 내듯이 액셀을 급하게 밟았고 승객들이 휘청했다. 1, 2분 사이였다. 교통약자가 버스에 올라타기 위해 걸리는 수초의 시간동안 내가 얼마나 조바심을 낼지 상상해봤다.

#4

직장 동료인 팀장 한 명은 지체장애를 갖고 있다. 그녀는 점자를 묵자로 점역하는 일을 십년 넘게 해 온 장인이다. 처음에는 그녀의 장애를 나와 ‘다름’으로 받아들이고 각별히 그녀를 더 배려하려고 혼자 식은땀을 흘린 적도 많았지만 두 달도 채 안되어서 나는 그녀와 내가 처한 비슷한 사정-비슷한 나이, 같은 성별, 경제적인 고민 등-을 먼저 인지하게 됐다. 우리는 같은 동료로서 직장상사의 흉을 보고 밥값이 오르는 것에 대해 분개하고 말도 안 되는 업무지시에 열을 올렸다. 우리 사이의 ‘다름’이 아니라 나와 같은 일을 하고 같은 감정을 공유하는 동료로서 먼저 인식할 때 나는 비로소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가 필요로 하는 배려와 도움을 줄 수 있었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그녀와 수다를 떨다 보면 우리를 힐끔대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낄 때도 있다. 그 사람들이 느끼는 이질감도 내가 처음 나와 다른 점을 먼저 인지했을 때 느낀 당혹감과 같을 것이다.

진짜 장벽은 비장애인과 주류의 상상력이다

세상은 빠르게 변해 가는데도 아직까지 우리는 그들과 길에서 마주치는 것이 어색하고 불편하다. 그러니 날씨 좋은 주말, 놀이공원에서 휠체어 장애인을 볼 일이 없고 등산이나 트래킹이 유행인 요즘 비장애인 말고는 산행 길에 만나보기 힘들다.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도와주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신경이 쓰인다. 그들을 나와는 다른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생긴, 내가 만들어 낸 편견 때문이다.

길게 본다면 앞으로 건축은 물론이고 사회 각 분야에서 무장애가 실현될 것이다. 그것은 누구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 될 것이고 그러기 위해 가장 먼저 우리가 가진 상상력의 장벽을 없애는 일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상상하고 겪어본 다음에야 서로의 입장이 이해될 것이다. 여성학자 정희진의 말처럼 ‘인간은 누구나 소수자이며, 어느 누구도 모든 면에서 완벽한 진골일 수는 없’기 때문에.

진짜 장벽은 사회 곳곳의 비장애인만을 위한 환경이 아니라 그것을 의심 없이 이용하고 있는 나 자신일 수도 있다. 그렇게 장애에 대한 인식 개선이 병행되고 장애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 등 학습 된 ‘다름’에 대한 인식을 뛰어넘을 때야 비로소 진짜 무장애가 실현될 수 있다.
덧붙임

박혜경 님은 사회적기업에서 독서장애인을 위한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