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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교육, 날다] 역사의 한 장면 속으로 풍덩

내가 ‘너’가 될 때, 인권감수성은 약동 한다

세상을 둘러보면 불합리한 일들 투성이인데, 왜 사람들은 저항하지 않을까? 사람은 어떤 순간에 참지 않고 움직이게 되나? 참 어려운 질문이지만, 인권교육의 의미와 역할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는 늘 숙제같이 따라다니는 화두일 것이다. 인권교육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면서 깨달은 것 중 하나는 사람들이 세상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 게 아니라는 것. 특히나 요즘처럼 말과 글이 넘쳐나는 시대를, 자신보다 더 똑똑한 전화기를 휴대할 수 있게 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무지’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인권침해 실태를 쭉 나열하고, 국제인권 기준을 소개하는 과정이 인권교육의 일부가 될 때도 있지만, 이것이 인권교육의 고갱이는 아니다. 중요한 건 정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정보들을 다르게 만날 수 있는 시공간을 교육을 통해 만들어내는 것이다.

신문기사나 인권보고서의 건조한 문장 속에 ‘피해자’로 자리매김했던 인권의 주인공들이 살아있는 현실의 무대로 뚜벅뚜벅 걸어 나올 수 있으려면? 굴욕적인 순간을 굴욕이라고 느낄 수 있는 예민한 감각을 되살리려면? 서로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려면? ‘어떻게’ 교육을 구성해야 할까. 이 ‘어떻게’는 교육의 목표, 참여자, 세부 내용에 따라 늘 달라진다. 인권교육이 다양한 방법론을 발굴하고자 애쓰는 이유는 참여자를 교육의 장에 ‘나 자신’으로 초대하기 위해서다. 인권 문제가 열악한 환경에 놓인 소수 누군가(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 그리고 내가 맺고 있는 관계의 문제임을 느껴야 비로소 마음이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본인들이 게을러서 그런 거다.” “애들은 아직 미성숙하니 어른들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여자들의 가장 중요한 본분은 가정을 지키는 것이다.” 등등 인권교육을 할 때 넘어서야 할 세상의 지배적 명제는 산 넘어 산이다. 게다가 이 명제들은, ‘그것이 나 자신을 행복하게 하느냐’와는 전혀 상관없이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으로서 보통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지배한다. 제 아무리 멋진 논리나 당위를 들이밀어도 평생을 쌓아올린 이 견고한 벽을 한 순간에 무너뜨리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참여자의 생각을 무너뜨리려는 인권교육가의 ‘전투적’ 자세는 참여자들에게 공격의 신호로 읽히고 더 큰 방어벽만 세우게 한다. 더군다나 논리적인 말하기와 글쓰기에 익숙하지 않은 참여자들의 경우 이 모든 과정에서 소외를 겪기도 한다. 마음과 마음이 닿기는커녕 소모적이고, 불필요한 논쟁만 하다가 교육이 끝나는 것만큼 허무한 일도 없다.

참여자와 인권교육가 사이를 가로 막고 서있는 벽을 무너뜨리는 것이 어렵다면, 그것을 훌쩍 넘어서버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 않을까? 이러한 의미에서 인권교육에 연극적 기법을 활용하는 것은 논리적인 토론 프로그램보다 종종 큰 울림을 만들어낸다. 올 여름, 청소년들과의 몇몇 만남에서 역사의 한 장면을 즉석에서 무대에 올리고, 그 주인공과 주변인의 역할을 참여자들에게 맡기는 교육을 진행했다. 타임머신을 탄 것 마냥 과거의 장면 속으로 훌쩍 빠져 든 참여자들은 머릿속 계산 없이, 내 몸과 감정이 반응하는 대로 즉석 연기를 펼친다. 그런데 이것이 그저 연기에 불과했을까? 나를 참을 수 없게 만드는 불꽃같은 저항의 순간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청소년들과 함께 나눴던 뜨겁고도 짜릿했던 이야기를 간략히 정리해 볼까 한다.

날개 달기- ‘나’로 부터 시작하는 인권이야기

인권교육은 참여자들의 삶의 이야기를 경청하는데서 시작한다. 뒤집어 말하자면, 참여자들이 스스로 자기 표현을 할 수 있도록 북돋아야 한다. 처음 만난 사람들 앞에서 자기 이야기를 갑자기 꺼내는 건 참으로 어색한 일이고, 이 시공간이 안전하다는 느낌이 없다면 솔직한 자기 생각을 드러내기도 어렵다. 자신의 의견을 존중받아본 경험이 별로 없는 존재들과의 만남에서는 특히 더 그이들의 이야기를 판단 없이, 있는 그대로 듣는 것이 중요하다.



청소년들과 인권교육을 할 때 단골 프로그램으로 가져가는 <청소년인권 지도 그리기>는 학생들이 일상에서 그냥 지나쳤던, 그럼에도 가슴 한 편에 남아있는 사건들을 마음껏 쏟아내는 시간이다. 전지에 그린 학교/집/학원 공간 지도를 붙여놓고, 학생들에게 포스트잇을 나눠준다. 각 장소마다 나를 화나게, 침울하게 했던 일들을 쭉 적어내는 것이다. 어느새 전지엔 포스트잇이 빼곡하게 들어찬다. “애들 앞에서 창피 주는 거 완전 짜증남.” “한창 게임하고 있는데 컴퓨터 전원을 그냥 내려버렸을 때 진짜 열 받았다.” “그만 좀 때려라.” 청소년들의 이야기는 밀도와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일맥상통한다. 포스트잇에 적힌 것들을 그대로 읽고, 그 상처에 나 역시 공감하고 맞장구친다. 자신도 비슷한 일을 겪었거나, 목격한 친구들이 목청을 높여 더 ‘극악한’ 사례를 제시한다.

그렇게 함께 말하고, 떠들고, 화내고, 털어내는 시간 동안 어느새 우리 모두의 공통분모가 발견된다. 일상생활이 별로 행복하지 않다는 것, 열 받는 일이 있어도 말조차 꺼내지 못하는 우리 자신이 참 서글프다는 것. 시나브로 참여자, 진행자 분리할 것이 없이 모종의 공감대가 형성된다. 인권감수성은 약자들이 일상에서 느낀 불만, 분노, 짜증을 개인적 감정이 아닌 사회적, 집단적 감정으로 읽어내는 바로 그 지점에서 꿈틀꿈틀 자라난다. 진정어린 위로와 공감 속에 “내가 (교사에게, 부모에게) 맞은 것은 내가 잘못 했기 때문”이라는 자책에서 조금씩 벗어난다. 자책과 무기력의 악순환에서 한 걸음 비껴 설 때 비로소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다른 존재들의 삶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더불어 날갯짓 1- 저항의 장면 속으로 몰입하기

참여자들의 술렁이는 마음을 이어받아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을 촉발시킨 15세 여성 클로데트 콜빈을 소개했다. 그녀가 바로 백인에게 좌석 양보를 거부함으로써 조용한 버스에서 ‘소란’을 일으킨 주인공이었다고. 결국 버스 기사와 경찰에게 매를 맞고 쫓겨나 재판까지 받았었다고. 그 다음 콜빈을 분노하게 했던 몽고메리 주의 인종 차별적인 상황을 묘사했다. 백인과 흑인의 좌석을 나누고 흑인은 뒷문으로 승차하도록 하며 공용좌석은 백인에게 우선권이 있다는 버스 이용 안내도 보여주었다.



쉬는 시간 동안 강의실 앞쪽에 무대를 준비하고 즉흥 연기를 시작했다. 버스 기사와 경찰은 진행자(+보조교사)가 담당하고, 콜빈을 비롯한 흑인 승객과 나머지 백인 승객은 즉석에서 학생들의 자원을 받아 무대로 모신다. 대사를 미리 주는 것이 아니다. 상황 속에 들어와 자신들이 하고 싶은 행동과 말을 하면 된다. 상황극을 진행하고 나서 진행자는 참여한 학생들에게 인터뷰를 진행한다. 학생들은 자신이 맡은 역할의 입장에서 인터뷰에 응한다.



▶ 진행자: 평소 때도 이렇게 버스에서 자리 양보하는 걸 거부 했었나요?
▷ 콜빈: 아니오. 오늘은 학교에서 힘든 일이 있었고, 특별히 피곤했어요. 나도 다리가 아픈데 왜 자리를 양보해 줘야하는지 모르겠고, 화가 났어요.
▶ 진행자: 버스 기사가 자리를 양보하지 않으면 출발하지 않겠다고 했을 때 어떤 느낌이었나요?
▷ 콜빈: 조금 무섭긴 했지만, 오늘은 정말 일어서고 싶지 않았어요.
▷ 백인승객: 짜증났죠. 저 애 때문에 제 시간을 뺏기는 거니까요. 흑인 주제에 건방지다고 생각해요.
▷ 흑인승객: 빨리 그냥 뒷자리로 오길 바랐어요. 일이 더 커지지 않기를 바라니까요.
▷ 흑인승객: 이런 식으로 해봤자 아무 소용없어요. 뭐가 바뀌겠어요.
▶ 진행자: 경찰이 콜빈을 때릴 때 콜빈을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나요?
▷ 흑인승객: …… 저도 맞을까봐 두려웠어요.
▶ 진행자: (콜빈을 도왔던 흑인, 백인 승객에게) 왜 콜빈을 도와주셨죠?
▷ 흑인승객: 어린 아이가 저렇게까지 하는데,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는 거죠, 저도.
▷ 백인승객: 흑인이라고 해서 이렇게 무시당해서는 안 되는 거죠. 경찰과 버스기사가 잘못된 행동을 한 거예요.

이런 식으로 20분 정도 인터뷰가 이어진다. 상황극 무대에 올랐던 참여자들뿐만 아니라 극을 관람했던 참여자들도 어느새 극 속으로 빠져든다. 참여자들과 대화하는 동안 사람이 두려움과 공포, 무기력을 넘어 저항하게 되는 이유, 인종차별이 이루어지는 맥락, 인종차별이 단순히 흑인과 백인의 편 가르기 싸움이 아니라는 것까지, 번뜩이는 성찰이 오고갔다. 콜빈이 재판에 불려간 사유가 ‘인종 분리법 위반, 풍기 문란 죄, 경찰 모욕죄’였다고 덧붙여 말하자 참여자들 사이에서 “법이 잘못된 건데, 그걸로 사람을 잡아갈 수는 없죠.”, “풍기문란은 오히려 버스 기사가 한 것 같은데요?”, “제일 모욕감을 느낀 건 콜빈이잖아요. 경찰 모욕죄는 말이 안 돼요!” 와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인권은 때로 법과 도덕을 넘어서는 더 큰 원칙이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이미 참여자들은 스스로 콜빈이 되어 새로운 서사를 써내려갔다.

상황극을 마치자 참여자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콜빈의 저항 이후 몽고메리 주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나누는 동안에도, 최근 학칙 개정을 요구하며 학생들이 운동장 침묵시위를 벌인 사진을 보는 동안에도 학생들은 내내 진지했다.

더불어 날갯짓 2 - 차별에 맞서는 연습

마지막으로 어린이/청소년이 흔히 겪을만한 차별 사례를 제시하고, 고민 편지의 주인공 입장에서 하고 싶은 말을 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문제적 인간’인 어린이집 교사 역할을 진행자가 맡아 연기하면, 참여자들은 주인공을 옹호하고, 변호하는 질문들을 던져보는 것이다. (‘문제적 인간’이 찾아왔다, 인권오름 178호 참조)

상현이 이야기

안녕하세요? 전 상현이에요.
제가 다니는 어린이집에는 밥을 먹을 때 꼭 지켜야 할 규칙이 있어요. 하나도 남기지 말고 주는 대로 다 먹어야 하는 거.
우리 어린이집 선생님은 늘 이렇게 말해요. “골고루 먹어야 쑥쑥 자랄 수 있어. 다 너희를 위한 거니까. 어떤 반찬만 많이 먹고 어떤 반찬은 손도 안 대고 그러면 안 돼. 밥이랑 반찬 남기는 친구들은 나쁜 어린이 표 한 장씩 받을 거야!”
당근은 정말 못 먹겠다고 얘기해봤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한 사람을 봐주다 보면 다른 애들도 다 봐달라고 그럴 거라고 말이에요 ㅠ.ㅠ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당근은 못 먹겠는데 어떻게 해요? 그렇지만 나쁜 어린이 표를 받는 것도 싫어요. 언니, 오빠들 저 좀 도와주세요 ㅠ.ㅠ

사례는 급식에 관한 것이었지만, 참여자들은 그 속에서 자기 결정권이 빼앗긴 본인들의 일상을 발견했다. “당근을 안 먹어도 다른 음식으로 영양소를 보충하면 되요.”, “선생님은 편식해 본적 없으세요? 억지로 먹이려고 하면 더 먹기 싫어요.”, “어른들 입장 말고 청소년 입장에서 생각을 좀 해보세요.”, “누가 착하고, 나쁜지를 어떻게 딱딱 갈라요? 선생님한테 잘 보이는 게 착한 건가요?” 참여자들의 이야기를 이어 받아 청소년들을 향한 차별이 반복되는 이유, 청소년을 미성숙하다고 바라보는 관점의 문제 등을 간단히 짚었다. 진행자가 길게 정리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참여자들 안에서 자기 삶을 다르게 볼 수 있는 관점들이 조금씩 싹트고 있었으므로.

머리를 맞대며- 세상을 바꾸는 티끌만한 용기

경직된 이성의 명령을 깨고, 나와 타인의 감정에 올곧이 집중할 수 있다는 점이 연극적인 요소를 활용하는 인권교육의 가장 큰 강점이다. 세상이 이렇게 굴러가면 안 되다고 외칠 수 있는 용기는 논리로 가득 찬 머리가 아닌 불의를 겪고 모욕을 느낀 내 가슴에서 나오는 걸 테니까. 그렇다면, 내가 느낀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 내가 ‘너’가 되는 동병상련의 경험을 맛보는 것이 인권교육의 가장 중요한 과정이 아닐까. ‘집까지 가는 내내 왜 내가 서있어야 하지?’라고 의문을 품었던 콜빈의 마음과 ‘내 머리카락 모양을 왜 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지?’라고 불만을 느낀 지금 청소년의 마음이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고 느끼는 것. 이것이 바로 살아있는 인권감수성이 아닐까 싶다.
덧붙임

한낱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