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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교육 날다] 인권교육의 등굣길은 왜 이리 험난할까

중학생 인권교육 고군분투의 기록

아직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구나. 지난 주 수요일, 서울의 S중학교에서 교육을 마친 나의 마음 상태는 당황, 우울, 분노, 슬픔……. 대략 이런 부정적 감정들로 꽉 들어차 있었다. 하루가 지나도 모욕감은 가라앉지 않았고, 사흘이 지나자 머릿속마저 복잡해졌다. 학교 안에 인권을, 인권교육을 등교시키자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들’의 바람이자 주장이다. 우리들은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뜻하기도 하고, 인권교육이 학교를 사람 살만한 곳으로 만드는데 기여할 수 있다고 꿈꾸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여정이 생각보다 멀고도 험하다는 걸 요즘 실감하고 있다. ‘학교 인권 교육, 이렇게 하면 잘 할 수 있다’는 식의 논의를 이 글에서 할 수는 없을 듯하다. 어떠한 지침과 매뉴얼을 뚝딱 내놓기 이전에 해야 하는 작업은 자신들의 경험을 툭 터놓고 공유하는 것이다. 여전히 마음과 머리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기사를 쓰는 이유는, 첫째 나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서다. 최악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 있을 만큼, 바닥을 치는 교육을 했기 때문이다.



작년 12월 말과 올해 1월 초 사이, 우리 단체에 거의 비슷한 형태의 인권교육이 10건 가까이 들어왔다. 전화든 메일이든 화급히 에스오에스(SOS, 구조 요청)를 치는 모양새였는데, 교육청에서 봄방학 전에 학생들 대상으로 인권교육을 꼭 실시하라는 지침이 내려왔다는 것. 강사를 구하기 어려우니, 꼭 담당해 달라는 부탁이 쇄도했다. 날짜는 2월 8일 혹은 9일. 강당에 전교생을 모아 놓거나, 시청각 실에서 각 반에 생중계 하는 형식. 주어진 시간은 1시간(정확히 말해 45분).어느 것 하나 나을 것 없는 선택지가 인권교육 활동가들 앞에 놓였다. 아무리 학교여도(이 전제 역시 참으로 씁쓸하지만), 인권 교육이 가능한 최소한의 교육 환경은 보장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도, 소위 ‘진보 교육감’ 시대를 맞이하여 인권교육이 처음으로 학교 안에 걸어 들어가기 시작한 시점에서 교육 자체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결국 우리는 최소한 2시간(90분 교육), 시청각 실에서, 40여명의 친구들을 모아 교육하는 역제안으로 ‘쇼부’를 쳤다.

나라도 딴 짓 하겠다

우리가 전교생 대상 강연에 대해 거부감을 표할 때, 담당 교사들이 보이는 첫 번째 반응은 ‘다른 교육도 이런 식으로 많이 한다.’였다. 성교육을 비롯해 강사를 불러오는 이수 교육 대부분이 비슷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그렇게 진행했을 때 교육 효과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학교가 다 그렇지요, 뭐.’ 라는 무기력한 대답이 돌아왔다. 문제가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학교의 관행에 태클을 걸기 시작하면 일이 너무 커진다는 의미일 것이다. 또는 태클을 거는 것 자체를 상상할 수 없거나. 어찌 되었든, ‘학생들을 무조건 자리에 앉혀 놓는다고 해서 그것이 교육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씀 드리며 한 학급 내지 두 학급을 엮어 시청각 실에서 교육을 하고, 그 교육을 방송으로 내보내기로 했다. 나 역시 학교 다닐 때 그랬지만, 방송을 집중해서 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예 소리를 꺼놓고 자습을 하기도 했다. 이번에도 큰 기대는 없었다. 다만, 적은 수의 친구들일지라도 눈을 마주보며 교육을 하고 싶었다.

“강당에 가보니 120명의 학생들이 모여 있더라. 교육 시작하고 나서 10분 지나니 10명 정도만 나를 (동정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어.”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를 넘기며 아무리 호응을 유도해도 답해주는 친구가 없어.”
“나는 그래도 10명의 친구들하고 함께 했는데, 알고 보니 학교에서 공부 잘하는 아이들만 모아놓은 거였어. 똑똑한 애들만 모아 놓은 거라고 어찌나 자랑 하시던지.”
“학생들이 뒤에서 장난치고 있으면, 담당 교사가 학생들 조용히 시키느라 큰 소리 내고. 그럴 때 참 난감하더라.”

학교 인권교육을 1회 이상 다녀온 인권교육 활동가들의 하소연이다. 인권교육을 할 때 어떤 내용으로 학생들을 만날 것인지가 일차적으로 떠오르는 고민이지만, 이에 못지않게 그것을 담아내는 그릇도 매우 중요하다. 적절한 공간과 인원수를 유지하려는 이유는 참여자와 진행자 모두를 위함이다. 학교 교사들이 더 잘 알고, 느끼는 것이겠지만 억지로 앉아 있는 사람들을 집중시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진행자(강사)의 노련한 쇼맨십과 ‘말빨’을 요한다. (물론 아무리 앞에서 재간을 부려도 눈 하나 깜짝 안하는 학생들도 많다.) 인권교육가가 ‘말 잘하는 강사’의 동의어는 아니다. 일방적 강변이 아닌 참여자의 삶 이야기에 경청하는 태도를 우선시 하는 인권교육에서 학교가 제공하는 교육의 틀은 너무도 갑갑하다. 게다가 인원이 과도하게 많아질수록 참여자가 교육에 참여해 발언할 수 있는 기회 역시 적어진다. 특히 학생들처럼 평소에 주로 이야기를 듣는 위치에 서게 되는 참여자들의 경우, 더더욱 말할 권리를 교육 안에서 보장해야 한다.

어찌되었든 열심히 준비해간 교육인 만큼 학생들이 많이 들어주길 나 역시 기대한다. 그러나 반드시 내가 진행하는 교육에 모두가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특히나 원해서 들어온 교육도 아니고, 무슨 이유로 하는지 사전에 제대로 전달받은 것도 없고, 인권이라는 말이 마냥 생소한 친구들이라면…나라도 딴 짓 할 것 같다. 그렇다면, 사실 학생들에게 백 번 양해를 구하고 교육을 진행하는 것이 맞다. 기선을 제압해 학생들을 조용히 시키려는 교사들의 호통 소리는 교육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이 강사를 도와주려는 선한 마음의 발로든, 평소 자신의 모습이든) 조금이라도 학생들의 마음을 얻어 보려는 나의 ‘협상의 언어’가 호통 소리에 묻히는 경험을 수시로 했다.

영혼 없는 교육, 영혼 없는 교사

“방학을 앞두고 있어서 단축 수업을 갑작스럽게 하게 됐네요. 학교가 원래 이렇습니다. 한 시간이 45분에서 30분으로 줄었습니다. 그러니까 30분 진행하고 쉬고 다시 30분 진행하시면 됩니다.”

10시 시작이라고 하기에 9시 45분 쯤 도착해 담당 교사를 찾아갔다. 어이없게도 이미 수업종이 친 상태였고, 그나마 짧은 시간 30분 중 10분이 날아간 상황이었다. 조금이라도 미리 알려주셨으면 제가 더 서둘러서 왔을 텐데요, 라는 항변에 대한 교사의 답변은 ‘죄송하다. 학교가 원래 이렇다’ 밖에 없었다. 시간문제야 교사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으니, 일단은 교실로 향했다. 가져온 내용의 2/3 이상을 쳐내야 했다. 머릿속이 복잡하고 당황스러웠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바글바글, 70여 명의 친구들이 앉아 있다. 큼지막한 시청각 실에 쩌렁쩌렁 뉴스가 울려 퍼지고 있다. ‘졸업식을 앞두고 학교에 경찰력이 배치됐다.’는 협박성 뉴스가 무한 반복되고 있었다. 오싹하다. 이 교육이 ‘인권 교육’ 이라는 것에 대해 조금의 주의도 베풀지 않는, 아니 그럴만한 개념조차 없는 학교가 개탄스러웠다. 뉴스를 끄고, 부랴부랴 인사를 하고, 20분이란 시간 동안 어떻게든 친구들의 호기심을 끌어내려 애썼다. 학생 쪽에도 마이크를 한 대 설치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그 마이크가 사용되는 경우는 없었다. 자신들이 ‘말하는’ 상황에 익숙지 않는 학생들에게 ‘말해야 하는’ 부담감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몇몇 친구들의 짤막한 호응과 도움으로 조금씩 웃음 띤 얼굴로 교육의 문을 열 수 있었다.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쉬는 시간이 찾아왔다. 학생들 대부분이 교실 밖으로 나선다. 쉬는 시간이니 그러려니 하고, 남아 있는 친구들과 살짝 대화를 나눈다. 종이 치고, 다시 학생들이 자리에 앉는다.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너무나도 생경한 얼굴의 학생들이 자리에 앉기에, 혹시나 해서 “아까 있었던 학생들 맞나요?”라고 물으니, 아니란다. 어떻게 된 상황이냐고 묻자 담당 교사 시간표에 맞춰 학생들이 바뀌어서 들어오는 거란다. 아뿔싸, 쉬는 시간 10분 동안 참여자 전원이 바뀌었다. 지난 3년간 100번 넘게 인권교육을 진행했지만 참여자가 중간에 바뀌는 사태를 경험한 적은 없었다. 또다시 혹시나 해서, “그럼 이전 시간에 방송으로 보기는 했나요?” 라고 물으니, 또다시 아니란다. 머릿속이 새하얘진다. 학생들은 또다시 떠들기 시작한다. 중학교 1학년, 3학년이 섞여 있다. 남은 시간은 20분이다. 앞 시간에 했던 내용으로 다시 돌아가 똑같은 내용을 반복했다. 학생들은 간간이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지만,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의 1/5도 나누지 못한 채 종이 쳤다. 학생들은 아무렇지 않게 교실 문을 나선다. 참담하다.

학생들을 인간으로 본다면, 이럴 수는 없는 거다. 종이 치면 자리에 앉고, 또 종이 치면 이동하는 좀비도 아니건만 이리도 무시할 수 있는 건가. 또는 이 자리가 교육의 장이라는 최소한의 생각만 있었어도 시간표를 미리 바꿀 수 있었다. 전교생에게 방송을 쏘고 있는 상황이라면, 교과목 시간표에 맞춰 학생들이 이동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 이건 그냥 생각이 없는 거다. 담당 교사에게 매우 당혹스럽고, 이건 교육이 아니었다고 말하자 “학교가 학기말에 이렇다. 교사들이 바빠서 그렇다.”는 말을 반복했다. 이 교사는 내가 무엇에 분노하고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이 교사가 특별히 나쁜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악의에 차서 이런 행동을 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이 사람은 나라는 존재를 전혀 이해하지도, 공감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막장까지 다다른 관료화된 교사의 모습을 곱씹으니 김남주 시인의 <어떤 관료>라는 시가 떠올랐다.

어떤 관료

_김남주

관료에게는 주인이 따로 없다!
봉급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다!
개에게 개밥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듯

(중략)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아프리칸가 어딘가에서 식인종이 쳐들어와서
우리나라를 지배한다 하더라도
한결같이 그는 관리생활을 계속할 것이다

국가에는 충성을 국민에게는 봉사를 일념으로 삼아
근면하고 정직하게!
성실하고 공정하게!


차라리 교육 중간에 분노를 표출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면, 그 교사에게 일말의 불편함을 남기고 돌아올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랬다할지라도, 그것이 나에 대한 이해(뭐 저런 강사가 있나...라는 비난이어도 좋다)로 이어지진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교사는 ‘강사비를 지급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가지고 머리를 굴렸을 것이다. 교사들에게 사유를 강요할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자신들의 사유 없음이 바로 ‘악의 평범성’과 연관된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이 불평등하고, 불합리한 학교를 유지하는데 자신들의 근면 성실함이 이용되고 있다는 것을 제발 알아줬으면 좋겠다. 교육청이 해대는 공문서 정치에 교사는 철저히 관료화되고 있다. 이 문제를 제대로 짚고, 살피지 않는 이상 학교 안에서 인권교육은 요원하다.

우리 애들이 아직 어려서 이해력이 떨어진다?

나를 위로한다는 의도였을 수 있으나, 교사가 던진 마지막 한마디는 “아직 우리 애들이 어려서 이해력이 떨어지지요? 이해하세요.”였다. 이번뿐만 아니라, 학생들 교육을 가면 꼭 이런 말을 한 번씩 듣게 된다. 강남이 아닌 ‘외진’ 지역의 학교를 가면 더더욱 “우리 학교 애들이 좀 딸려요.”라는 말을 듣는다. 듣는 내가 다 무안하다.

아무리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를 잘 준비해 문답식 참여형 교육을 진행한다해도 80분이란 시간 동안 나눌 수 있는 이야기는 터무니없이 적다. 그래서 학교에 인권교육을 갈 때는 욕심을 최대한 버리고, 학생들이 인권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다, 정도의 목표를 가지고 교육에 임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삶에서 겪었던 경험이 인권적으로 재구성될 수 있다는 것을 맛보기로 보여주려 노력한다. 학생들의 ‘깜’은 대단하다. 동영상이나 사진 속에 등장하는 인권 이야기를 잘 찾아낸다. 나는 “여러분이 말했다시피, 인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면, 학생인권은 다름 아닌 학생들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을 뜻하겠지요. 그렇다면 학생인권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여러분이 아닐까요? 여러분이 바로 학생인권 전문가들인데, 왜 아무도 여러분께는 조언을 구하지 않는 걸까요?” 라고 의문을 던진다. 학생들의 눈빛에 생기가 도는 것을 나는 여러 번 마주했다. 학습에 대한 이해력과 삶에 대한 이해력이 사뭇 다를 수 있음을 인권교육을 하면서 매번 느끼게 된다.

어찌됐든 등교는 해야겠는데



학교 인권교육의 제도화, 아직까지는 내게 딜레마다. 학교라는 공간의 속성은 괴물이자 기계다. 이 안으로 빨려 들어가면, 무엇이든 영혼을 잃어버리는 것 같다. 학생도, 교사도, 학교에서 ‘인간적인’ 삶을 살고 있지 않다. 영혼 없는 존재들의 만남에서 영혼 있는 교육이 싹틀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기존에 하던 틀을 그대로 유지한 채 인권교육이라는 콘텐츠만 들여온다고 해서 학교가 인권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학생들에게 책임만을 강조하는 도덕 교육으로 변질될 가능성도 크고, 교육청에 찍히지 않으려고 ‘시늉만 하는’ 요식 행위가 될 공산이 크다. 교사들 입장에서는 또 하나의 행정 처리할 잡무가 늘어난 것이라 볼 수도 있는 거다. 교육청 입장에서는 인권단체들이 강조한 인권교육을 본인들이 시행시켰다는 명분만 세우면 그만일 수 있다. (실제로 그런 것 같다는 심증을 요즘 자꾸 품게 된다.) 인권교육이 1년에 몇 회 의무화되었다는데 안주하는 순간 인권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해온 사람들의 입지는 더더욱 좁아진다. 인권교육의 제도화는 어찌되었든 전환점이다. 그 전환점 뒤에 이어질 그림이 상승 곡선일지 하강 곡선일지는 이 딜레마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그려지겠지. 요즘 느끼는 이 답답함과 우려를 함께 나눌 사람들이 절실하다. 가까스로 학교 문턱에 발을 들여놓은 인권교육이 이대로 조기 퇴학당해서는 안 되는 거니까.

덧) 그래도 여전히 현장에서 애쓰시는 교사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고, 그런 분들과 함께 학생인권 운동을 하고 있다. “학교 1,2년 안에 바뀌지 않는다. 3년 아니, 30년이 걸려도 안 바뀔지 모른다. 천천히 꼼꼼히 제대로 가자.”는 교사들을 만날 때 힘을 받는다. 집단으로서 교사의 속성과 마주할 때 괴롭다고 쓴 거지, 개별 교사 모두를 일반화할 생각은 없다는 거- 소심한 덧글을 달아본다.

덧붙임

한낱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