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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리] 도시와 인권은 만나야 한다

인권운동에 ‘공간’에 대한 접근의 필요성이 점차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공간’과 관련한 대표적인 인권 문제는 국경을 넘나드는 이주노동에 대한 것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함께 가속화된 전 지구적 이주노동은 인권담론에 공간적 ‘경계’의 문제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시민권의 공간적 경계의 문제는 ‘시민권’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고 인권운동은 여전히 그 해답을 찾아가는 중이다. 이와 조금 다르게 도시개발의 추진 역시 ‘공간’에 대한 접근을 요구한다. 그동안 인권운동은 강제퇴거 과정에서 용역업체 직원들에 의한 폭행을 주로 다루며 철거민의 권리를 옹호했다. 그러나 강제퇴거는 용역업체 직원들이 개발구역에 들어와 장악하기 전에 이미 개발 자본에 의해 장악된 도시 자체로부터 발생하는 문제다. 이 글은 인권의 실현을 위해 ‘도시’를 고민하게 되는 조건, 그때 실마리가 될 수 있는 ‘도시에 대한 권리’와의 접점들을 살펴보기 위한 글이다.

도시에 대한 권리

르페브르는 1968년 ‘도시에 대한 권리(the right to the city)’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그는 자본이 지배하는 도시를 그 곳에 살고 있는 사람을 위한 도시로 변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강현수의 「‘도시에 대한 권리’ 개념 및 관련 실천 운동의 흐름」(공간과 사회 2009년 통권 제32호)에 따르면, ‘도시에 대한 권리’는 작품의 권리, 참여의 권리, 전유의 권리를 포함한다. 도시는 그 곳에서 살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 가는 집합적 작품이다. ‘작품’은 완성되어 교환되는 것이기 보다, 끊임없이 만들어지면서 활용되는 것으로서, 르페브르는 도시의 사용가치를 부각시킨다. 전유의 권리는 소유권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도시 생활에 대한 권리, 만남과 교환의 장소에 대한 권리, 생활 리듬과 시간 사용에 대한 권리” 등으로 풀어볼 수 있다. 참여의 권리는 사람들이 그들의 필요를 규정할 수 있는 공간을 창출할 권리이다. 이후 르페브르는 서로 다를 수 있는 권리(차이에 대한 권리)와 정보에 대한 권리로 도시권이 보완되어야 한다고 제기하기도 했다.

도시에 대한 권리는 집합적 권리이면서 집단 안에서의 차이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제3세대 인권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도시에 대한 권리가 인권담론 안에서 발전한 개념은 아니다. 도시에 대한 권리가 권리담론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인권의 가치와 어떻게 만나고 가로지르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르페브르 이후로 다양한 학자들이 도시권에 대한 연구를 이어왔는데, 인권운동은 이런 연구를 통해 제기되는 문제들에 주목해야 한다. 도시권에 대한 논의는 ‘공간’에 초점을 맞추며 도시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양식과 도시의 변화 가능성을 모색하는 흐름과, 특정한 공간적 경계를 통해 구성되는 시민권 개념 비판에 초점을 두는 흐름으로 이어진다. 도시권을 화두로 열린 장에서 도시와 인권은 끊임없이 부딪치며 만나게 될 것이다.

누가 도시를 점유하는가

주거권은 다른 권리들보다 ‘도시’와 자주 만나는 영역이다. 주거권의 의미 안에 이미 주택의 위치나 문화적 적절성 등의 내용이 들어있고 주택 자체가 특정한 ‘공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숙인의 경우는 주거권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으면서도 주거권의 내용을 통해서만 접근하기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홈리스는 살만한 집에 살지 못하는 집단을 일컫는 말이다. 그 중 노숙인은 거리에서 자는 사람들을 말한다. 국가는 홈리스가 발생하지 않도록 적절한 주택 정책을 마련해야 할 뿐만 아니라 주택 공급에서 홈리스에 일정한 우선순위를 부여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살만한 집에 살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거리에서 볼 수 있는 노숙인들은, 주거권 보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보인다’는 이유 때문에 서둘러 실내로 옮겨지기도 한다. 이것은 거리로부터의 ‘배제’이기도 하다. 노숙인들이 ‘살만한 집이 없는 상태’라는 홈리스의 정의로부터 접근되지 않고 ‘거리에서 사는 상태’라는 현상을 통해 접근될 때, 이들은 자연스럽게 거리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가 된다. 공공역사나 지하도 등에서 노숙인들이 숙식과 생활을 하는 것은 비노숙 시민들의 점유 공간에 대한 침범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런 맥락에서 각 지자체들은 쉼터 입소 위주의 정책을 수립하고 노숙인들의 쉼터 입소를 독려 또는 강제한다. 그러나 노숙인들은 자유롭지 않은 생활 규칙과 사생활이 보장되지 않는 쉼터 입소 정책에 불만이 많다. 노숙인들은 살만한 집에 살 권리인 주거권을 보장받아야 하지만 동시에 거리라는 공간에서 그 공간의 점유자로서의 권리를 존중받아야 한다. 공공의 장소는 공공의 장소를 이용하거나 점유하는, 그리고 이용하거나 점유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사람들을 고려하고 각각이 가지는 의미가 조화롭게 엮어져야 한다. 또한 이때 공/사 이분법의 구도를 넘어서는 접근도 필요하다. 숙식은 사적인 행위라는 이유로 공적인 공간으로부터 배제되기도 하는데 도시에 대한 권리는 공/사 구분에 갇히지 않는 전유를 주장할 실마리를 건넨다.

누가 도시를 계획하는가

주거권 교육을 하면서 주거권의 내용을 꼽아보면 집단별로 몇 가지 특성이 드러난다. 그 중 여성들이 많은 집단에서는 ‘안전’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진다. 여성들은 집을 구할 때 집이 너무 외진 곳에 있지 않은지, 골목이 너무 어둡지 않은지 등을 꼼꼼히 따진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주택에 대한 접근만으로 쉽게 해소되지 않는다. 이것은 ‘안전’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도시가 누구의 시선에서 계획되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일상적인 걷기도 공간을 전유하는 행위이다. 또한 도시와 공간에 대해 젠더화된 이용에 주목해야 한다.

한편, 대안개발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활발한 성북구 장수마을의 주민들은 도시가스를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을 주거에서 가장 큰 어려움으로 꼽는다. 이 동네는 구릉지에 매우 낡은 주택들이 오밀조밀하게 모여있는 곳으로, 2004년 주택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수익이 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직까지 개발 사업은 본격적으로 추진되지 않고 있다. 3년 전부터 이 동네에 대안개발을 궁리하는 사람들이 찾아들었다. 자본의 힘을 통하지 않고 주민들이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다양한 활동을 시도했다. 도시가스 역시 주민들이 이미 여러 차례 민원을 제기했던 것이라 풀어야 할 숙제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미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개발을 하기 전까지는 도시가스 공급관을 설치할 수 없다는 것이 가스공사의 입장이었다. 도시계획이 주민의 의견 수렴 없이 지자체에 의해서만 결정되고 있는 지금의 구조는 살만한 동네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들에 대한 접근을 가로막고 있다.

누가=어디에

도시는 점유나 계획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사실 점유나 계획의 주체인 사람과 배타적으로 나누어 접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삶은 특정한 공간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이런 공간적 특성이 삶과 강하게 맞물려서 드러나기도 한다. 개발이 만들어내는 문제는 매우 다양하다. 개발 사업이 추진되는 동네는 소득 1~4분위 계층이 70%가 넘는다(2007, 서울특별시).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를 허물어, 가난한 사람들이 살 수 없는 집들을 지어 올리는 것이 현재의 개발 사업이기 때문에 어디에서나 낮은 재정착률이 문제로 제기된다. 그런데 개발 사업으로 쫓겨나는 사람들 안에도 다양한 정체성들이 섞여 있으며 개발 구역은 동질적인 공간이 아니다.

‘청량리 균형발전촉진지구’ 개발 계획은 청량리 민자 역사를 지으면서 주변의 기반시설을 확충하고 성매매 집결지를 정비하는 계획이었다. 청량리뿐만 아니라 전국의 성매매 집결지들은 대부분 재개발을 앞두고 있다. ‘유리방’이나 쪽방 형태의 공간에서 주거와 동시에 성매매가 이루어졌던 이곳은 원래 살던 주민이 재정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만으로 접근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현재 정책 방향에서 ‘성매매 집결지’는 사라져야 할 공간이고 ‘성매매’는 지워져야 할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에서 성매매여성들은 자신의 주거 공간을 드러낼 수 없고 그 공간을 통해 만들어졌던 사회적 관계망들 역시 쉽게 삭제되어 버린다. ‘성매매’를 ‘성노동’으로 접근할 수도 있지만 노동권을 통해서 성매매여성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도시 공간의 재편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해 무력해지기 쉽다.

[출처] 반성매매인권행동 이룸<br />

▲ [출처] 반성매매인권행동 이룸



청량리 집결지에서 성매매여성 상담․지원 활동을 해온 ‘반성매매인권행동 이룸’은 최근 청량리 성매매 집결지의 기록을 담은 <불온한 확신, 끝나지 않은 천일야화>를 발간했다. ‘이룸’은 책을 통해 “특정 공간을 매개로 기억된 경험, ‘의미 있는 공동의 기억’, 즉 역사가 사라지고 단절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개발의 일반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성매매 여성들에게는 정체성의 핵심적인 부분을 삭제하는 사건이 되기도 한다. 어떤 공간에 재정착을 하더라도 그 공간은 그녀들의 삶의 경험과 역사를 버림으로써만 접근 가능해진다. 이처럼 개발은 도시 공간을 바꾸는 것인 동시에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바꾸는 과정이다. 도시에 대한 권리는 공간의 재편에 따라 삶이 바뀌는 구조를 뒤집기 위한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의미 있는 공동의 기억’을 간직하면서도 삶의 변화를 추구하기 위해 공간은 어떻게 재편되어야 하는가를 묻는 출발점이 도시에 대한 권리일 것이다.

자유가 분출하는 공간으로서의 도시

‘광장’은 개발과 마찬가지로 ‘도시’에서 중요한 의제 중 하나다. 광화문광장이나 서울광장과 같이 서울시가 관리하는 광장뿐만 아니라 다양한 집단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집회시위의 공간으로서의 ‘광장’ 역시 도시에 대한 권리에서 주목해야 할 영역이다. 최근 재능교육 학습지교사 노동자들은 서울광장 맞은편의 재능교육 건물 앞에서 농성을 한다. 유령 집회 신고와 사측의 가압류 등의 탄압에도 꿋꿋이 혜화동 재능교육 본사 앞에서 농성을 이어가던 이들에게 재능교육은 ‘집회금지가처분’을 신청했다. 1인 시위로 혼자 농성을 할 때 햇볕가리개나 바람막이, 깔개 등을 쓰지 말라는 내용의 가처분은, 피켓 금지나 100미터 반경 접근금지와 같은 이전의 가처분과는 또 다른 탄압이었다.

[사진설명: 재능노조 조합원들이 집회를 할 수 없도록 회사가 회사 앞에서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출처: 참세상]

▲ [사진설명: 재능노조 조합원들이 집회를 할 수 없도록 회사가 회사 앞에서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출처: 참세상]



집회나 시위를 하려는 사람들이 공공 공간에서 끊임없이 배제되고 있는 현상은 집회시위의 자유에 대한 탄압이다. 그러나 집회시위는 ‘공간’에 대한 개념과 무관하게 성립되지 않는다. 즉, 어디에서 집회나 시위를 하는가는 집회시위의 자유에서 본질적인 부분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집회시위의 자유는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을 통해 제한되거나 억압된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는 광장조례나 가처분 신청 등으로 공간에 대한 접근을 가로막음으로써 집회나 시위를 통제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집회나 시위뿐만이 아니다. 2009년 서울시는 청계광장에 대한 관리 규정을 들며 인권영화제 불허를 시도했다. 시민사회의 항의로 인권영화제가 예정대로 청계광장에서 열리기는 했지만 광장에 대한 접근을 억누르려는 것이 무엇인지 엿볼 수 있는 사건이었다.

이와 같이 시민․정치적 권리 역시 그 잠재성을 실현하기 위해 공간에 대해 투쟁할 필요가 있다. 모든 사람에게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 자유라는 가치의 핵심적 의미다. 야마티아 센은 개인의 자유는 본질적으로 사회적 산물이라고 주장하며, 개인의 자유를 확장하기 위한 사회적 조치를 요청한다. 우리는 가능성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조직되는 도시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도시에 무엇을 채울 것인가

데이비드 하비는 도시가 정치적 계급투쟁의 핵심무대가 되고 있다고 분석한다. 도시 공간을 통해 강탈적 자본축적이 진행된다는 것이다. 공간은 사고파는 상품으로 순수하게 추상화되고 공간의 거래는 이윤 창출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개발은 하비의 주장처럼 저항에 부딪치는 핵심적인 국면 중 하나다. 물론 자본축적의 논리와 공간의 논리는 아직 충분히 융합되지 못한 것으로 보이지만, 자본이 공간을 이윤 창출의 매개로 더욱더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에 맞서기 위해서 ‘도시’에서 인권의 가치가 재조명되어야 한다. 도시는 어떻게 계획되고 구성되어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도시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그/녀들의 권리를 헤아리는 과정을 통해 방향을 잡을 수 있다. 인권은 르페브르가 도시에 대한 권리를 통해 보여준 ‘사람을 위한 도시’를 상상하기 위한 출발선이기도 하다. 용산참사 진상규명 및 재개발제도 개선위원회가 추진하고 있는 강제퇴거금지법도 도시와 인권이 만나는 장이 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누려야 할 기본적 권리, 그 중에서도 강제퇴거를 당하지 않으며 재정착할 수 있는 권리를 중심으로 개발에 저항할 수 있는 근거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도시가 어떻게 계획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새로운 답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도시는 시골과 대비되는 개념이기보다 다양한 경계를 통해 구성되는 지역이나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공간이 변화하는 속도나 방향에서 도시와 시골은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고 도시의 개념을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의미보다 확장하는 것이 크게 문제되지는 않을 듯하다. 다만, 도시들 간의 격차에 대한 성찰은 필요하다. 세계 여러 도시의 도시권 헌장이나 도시법 제정 운동을 주목하는 동시에 주의해야 한다. 도시들 간의 불균등 발전은 다른 도시들에 대한 권리의 착취에 기대고 있기 쉬운 탓이다. 도시에 대한 권리가 빠지기 쉬운 함정은 시야가 도시로 한정된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세계화 시대에 ‘지역’을 주목하는 도시권의 강점이기도 하지만 인권의 보편성에 대한 인식을 놓지 않아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도시에 대해 우리는 어떤 권리를 가지는가. 이것은 앞으로 끊임없이 밝혀져야 한다. 도시를 사용하고 참여하고 결정할 권리는 구체적인 사건들을 계기로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도시에 대한 권리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두 다른 동시에 공간을 통해 늘 마주친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도시에 대한 권리는 단순히 다수결의 민주주의를 통해 도시를 계획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권의 가치를 향한 도시의 생산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 과정에서 부딪치는 재산권과의 충돌 등은 함께 풀어야 할 과제다. 여전히 추상적이고 모호하다는 점에서 도시에 대한 권리는 당장 옹호되어야 할 권리이기보다는 계속 탐구되어야 할 권리다. 이 과정은 인권의 상호의존성에 기반을 두고 접근할 때 더욱 수월해질 것이다. 그리고 접근의 출발선은 도시에서 어떤 권리가 억압당하고 어떤 저항이 펼쳐지고 있는지 살펴보는 데에 있을 것이다.


덧붙임

미류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