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후원하기

인권오름 > 미디어와 레즈비언

[미디어와 레즈비언⑤] 레즈비언, 스크린에서 가족을 꿈꾸다

몇 해 전인가, 미용실에 놓인 스포츠신문 한 귀퉁이에서 ‘아빠 없는 쥐가 태어났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수컷 정자의 관여 없이 암컷의 난자만으로 포유류를 탄생시키는 일이 성공했다니, 레즈비언 커플들에게 그야말로 ‘희소식’이구나 싶어, 옆에 앉은 엄마도 잊고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아니, 엄마에게도 예쁜 손녀 안겨드릴 수 있으니 불효 하나는 덜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야무진 꿈은 기사 끄트머리 즈음의 ‘실험용 쥐의 실험 방법을 인간에게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는 문장에서 신문과 함께 고이 접어 넣었다.

그렇게 잊었던 나의 야무진 꿈은 이번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퀴어 레인보우: 일상다반사’의 <베이비 포뮬라>를 만나면서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세상에! 장르부터 환상적인 페이크 다큐멘터리, 코미디, SF의 조합이다. 이 영화는, 레즈비언 커플이 줄기세포 연구에 성공해서 자신들만의 아기를 임신하고 출산하는 과정을 진짜 다큐처럼 느끼게 하는 페이크 다큐의 형식으로 스크린에 담는다.
영화 <베이비 포뮬라(The Baby Formula)>,감독:앨리슨 레이드, 캐나다,제1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상영작,<br />
(사진 출처 :http://www.wffis.or.kr)

▲ 영화 <베이비 포뮬라(The Baby Formula)>,감독:앨리슨 레이드, 캐나다,제1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상영작,
(사진 출처 :http://www.wffis.or.kr)


레즈비언, 스크린에서 가족을 꿈꾸다

‘당신에게 가족은 무엇인가요?’라고 누군가 물음을 던져온다면, 말끝을 흐리며 ‘글쎄요’라고 답할 것 같다. ‘여성’을 사랑하는 ‘여성’으로 살고 있고, 앞으로도 살고 싶지만 나의 앞날을 그리기는 생각만큼 쉽지 않다. 아이를 꼭 기르고 싶지만 <베이비 포뮬라>에서처럼 서로의 아기를 갖는 일은 역시나 비현실적이고, 다른 남자의 정자를 빌리는 일도, 입양을 하는 일도 역시 쉽지 않다. 임신과 출산, 양육의 과정은 두 사람의 이야기에서만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가족들과 맺어야 하는 새로운 관계, 주변 이웃, 병원과 학교와의 관계 등 공동체와 이리저리 부딪힐 일투성이다. 그래서 <베이비 포뮬라>에서 임신과 출산을 앞두고, 다른 가족들이 모이며 벌이는 여러 에피소드는 재미있으면서도 짠하다.

더구나 레즈비언 커플 사이에서 자란 우리 아이가 학교에서 왕따가 되지 않을까 벌써부터 오바 떨며 걱정되기도 한다. 지금 세상은 ‘아빠곰’과 ‘엄마곰’ 사이에서 자란 ‘아기곰’만을 노래하니까. 엄마곰과 엄마곰이, 아빠곰과 아빠곰이 아기곰을 기르는 상상력 따위는 당최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줄리아 맥카트니 감독의 <마이크 삼촌>에서 어린 조카가 마이크 삼촌이 미셸 고모가 되는 과정을 이해하며 부르는 ‘동요’는 그래서 느낌표 여섯 개 감이다!

아니, 아이에 대해 고민하기 전에 파트너와의 관계에 대해서 고민 해야겠다. 영화 <프리헬드>에서 여섯 달의 시한부 암 선고를 받은 로렐은, 자신이 받을 연금을 동성 파트너 스테이시에게 주고자 하지만, 법적으로 동성애자 가족구성을 인정하지 않는 시의회에서는 연금 승계를 인정하지 않아, 험난한 싸움을 벌여나간다. 파트너와 평생을 함께 하고, 재산을 모으고, 생계를 꾸려나가다가, 갑자기 아프기라도 한다면? 어느 날 파트너가 갑자기 세상을 뜬다면? 병원에서 사인은 누가 할 것이며, 함께 모은 재산은 어떻게 되는 걸까? 내 옆의 가장 가까운 반려자는 나의 동성 파트너인데, 남은 가족의 생계유지라는 상속제도의 존재 이유도 동성 간 파트너십에서는 가벼이 뛰어넘곤 한다.

영화가 끝나고 꿈에서 깨다

“감독님은 동성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한 퀴어 단편 영화가 끝나고 관객과 감독의 대화 시간. 어떤 분이 손을 번쩍 들고 감독에게 위의 질문을 했다. 북미와 유럽에서 온 퀴어 영화들의 고민과 한국 사회의 고민이 현재 어느 시점에 와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질문이다. 동성 파트너와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하고, 함께 기르고 싶은 나는, 내가 죽었을 때 동성 파트너에게 상속이 될까를 고민하던 나는, ‘동성애에 대해서 찬성해야할 지, 반대해야 할 지’를 고민하고 있는 한국 현실에, 또 다시 하늘 위로 둥 떠 저 세상에 와 있는 듯했다. 동성애자인 나의 고민을 들어달라고 이야기하기 전에, 성소수자들이 ‘정말 있다’는 존재부터 증명해나가야 함에, 웅덩이 속에서 첨벙첨벙 헤엄치는 기분이었다.
영화 <프리헬드(Freeheld)>, 감독:신시아 웨이드, 미국,제1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상영작.(사진 출처:http://www.wffis.or.kr)

▲ 영화 <프리헬드(Freeheld)>, 감독:신시아 웨이드, 미국,제1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상영작.(사진 출처:http://www.wffis.or.kr)


꿈이 일상다반사로 이어지길

영화는 픽션이지만, 영화가 디디고 선 땅은 논픽션이다. 퀴어 영화를 만든 감독에게 ‘동성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질문한 그 분에게 가족을 꿈꾸는 레즈비언의 존재는 아직 보이지도 않는 존재들일 뿐이다. 이렇게 레즈비언의 존재를 모르거나,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레즈비언이 꿈꾸는 일상은 신기하거나 혐오스러운 것이 된다. 하지만, 새로운 가족을 꿈꾸고, 새로운 관계를 꿈꾸는 레즈비언의 꿈은 함께 고민하며 울고 웃는 이들이 있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가족을 꿈꾸는 스크린 속의 레즈비언들의 일상이 일상다반사처럼 여겨지는 날이 오기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 즈음이면, 혹시 아나? 난자와 난자만으로 아이를 낳을 수 있게 되어, 페이크 다큐 말고 정말 다큐가 만들어질지.

덧붙임

선의님은 한국레즈비언상담소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