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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발언대]고단했던 내 삶에 종지부를

내가 이글을 쓰는 것은 나의 지나간 생각을 떠올리려함이 아니다. 다만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모든 금융채무불이행자(신용불량자)와 소외계층 분들과 함께 용기를 갖고 열심히 살아가자는 생각에서다.

1998년도로 거슬러 올라가 나는 당시 단종 기계건설업에서 비정규직 경력사원으로 근무를 하고 있었으며, 이 업체는 단종 면허업체로는 국내의 동종업계에서 연간 매출액이 약600~700억 정도로 국내부분 2~3위 수준의 건실한 중소기업이었다. 허나 1998년 초여름으로 접어들 무렵 외근직에서 갑자기 내근직으로 보직변경과 더불어 대기발령이라는 공문을 받게 되었고 그것이 시련의 시작점이 될 줄은 상상도 못하였다. 무엇을 잘못하였는지 곰곰이 생각도 해보았지만 크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회사의 방침을 거역하기에는 나의 가족이 먼저 떠올랐다. 그 이후로 내근직이 전무하였던 당시 본사에서 책상도 없는 상태로 하루하루를 허송세월로 보내며, 구조조정의 1순위가 비정규직이라는 것을 비로소 실감하고 전문직 근로자로서, 한 직장의 직원으로서 자긍심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비애감을 느끼며 직장에 사표를 제출하였다.

1998년 시련이 시작

막상 사회로 나와 보니 그야말로 세상은 온통 먹구름으로 뒤덮이고 햇살은 어느 구석에도 드리워지지 않았다. 암울했다. 세상은 IMF라는 쓰나미급 태풍으로 민생경제는 뒷전으로 내몰리고, 외채를 빌려오기 바쁘고, 구조조정 한파 속에서 근로자들은 모두가 불안함과 혼란 그 자체였다. 이러한 어수선한 시국에 한 직종만을 천직으로 여겨왔던 나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고, 대책 없이 집에서 백수로 지내다보니 가정의 가세는 기울기 시작했다. 안타까움과 함께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위치와 방향을 잃어가는 모습이 나로서는 인정할 수 없었고 그것은 곧 가정풍파로 이어져 왔다. 가정이 와해되어 가는 모습은 나로 하여금 긴장과 방황의 나날로 이어졌다. 급기야 아내가 취업전선을 전전하는 모습은 나로 하여금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오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식당일을 하는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저며 온다.

나는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주위에 평소 절친하게 지내오던 지인들에게 일자리를 부탁해보려 했지만 처지는 나와 대동소이했고 자연스레 술자리가 많아질 수밖에 없었으며 절망의 늪이 성큼성큼 잠식해 오고 있었지만 나로서는 그야말로 속수무책 그 자체였다. 나름대로 직업전선을 찾아 헤매길 약1년쯤 지난 어느 날 정말이지 간곡히 피해가고 싶었던 가정파탄이 현실로 나타났다. 흰 봉투에 담긴 서류를 읽을 수가 없었다. 그날 밤은 잠을 이룰 수가 없어 무척이나 뒤척이며 소리죽여 많이도 울었다. 그러나 되돌릴 수 없었다.

그 후 방 한 칸의 옥탑방을 빌려 혼자 생활하게 되었고 건설현장의 막일을 하며 하루하루 생활해갔다. 그 일도 많지 않아 공치는 날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일명 묻지 마 카드 3개를 만들어 급한 대로 방세와 생활비로 활용하며 지냈다. 그러다 카드의 상환날짜는 닥쳐오고 현실적으로 결제할 방법이 없을 때에는 카드 돌려막기를 하게 되었다. 일용직 노동일을 했지만 생활비와 카드대금을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급기야 카드가 연체되는 지경까지 이르고야 말았다. 나의 생활이 이렇게 두 번째 무너져 가는구나 생각하며 월세방을 해약하고 급한 카드 한곳을 변제하고 영등포에 있는 쪽방으로 거처를 옮기고 보니 가족도, 직장도,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잃고 보니 너무나 참담하고, 어느 날 갑자기 인생의 계단을 너무 빨리 내려온 것만 같은 이것이 꿈이라면 빨리 깨어나고 싶은 간절한 심정이었다.

가정파탄에서 신용불량자까지

나의 몸과 마음은 이미 피폐해져 갔고, 삶은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나락의 구덩이로 빠져들고 있었고, 술에 의지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내 인생을 내맡기고 생활을 하였다. 청결치 못한 곳에서 청결치 못한 삶이란 결국 육신에 병으로 돌아왔다. 몸과 마음이 피폐해졌고 병 또한 얻었으니 죽자는 심정으로 술과 더욱 친숙해져갔고 나의 신념 등은 쓰레기통에 꼭꼭 싸서 깊숙이 처박은 지 오래였다. “내 인생 나도 책임 못 져.”라는 듯이 지내며 옆에서 비아냥거림도 받고 남들을 괴롭히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던 중 국민기초 생활보호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지금까지 수급권자로 생활하며 지내고 있다. 당시에는 수급금을 받아 술을 먹기 바빴다. 그러던 어느 날 불현듯 어머님 생각에 어머님을 만나러 찾아갔다. 순간 아직도 눈물이 남았는지 눈물이 앞을 가렸다. 어머니를 보는 순간 당신은 그 동안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셨을까 생각해보니 이것 또한 자식 된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이때부터 술을 끊기로 다짐하였고, 생을 다하는 날까지 이 맹세는 결코 변함이 없을 것을 지금도 다짐하고 있다. 다음은 카드빚 때문에 추심에 시달리고 우편물만 보아도 심장이 떨리는 스트레스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지금의 금융피해자 연대 해오름에 구원의 손길을 요청하게 되었다. 파산신청을 하며 아직 세상은 어렵고 소외된 사람들을 도와주려는 단체나 개인이 많이 있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고 어렴풋이 삶의 목적의식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작지만 목적을 가지고 다시는 내 인생에 뒤안길은 없다는 굳은 신념도 갖게 되었다.

내가 저항하는 이유

파산면책 이후 직장을 찾아 다녔지만 과정에서 또 한 번 좌절의 쓴 맛을 보게 되었다. 신원보증서 발급을 해주지 않아 취업을 할 수가 없었고, 신체검사에서 재검사 판정이 나의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상처는 받지 않았다. 어느 정도 현실을 직시하고 있었으니까. 오히려 언제고 내 손으로 아니 나만이 아닌 같은 처지에 있는 주위 분들과 힘을 모아 똑바로 꼭 고쳐놓고야 말겠다고 오기가 발동하였다. 사회의 이중적 잣대인 소외계층에는 무서운 흉기가 되어 삶의 의지를 꺾어버리는 잘못된 법조항 등은 반드시 고쳐져야 하며 그 일을 위하여 후회 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것이 나의 작은 바람이다. 분명한 것은 소외계층도 그 누구도 똑같이 내 나라를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는데, 세상은 우리 같은 소외계층을 마치 이방인 취급을 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제 국민을 이방인 취급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 이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잘못된 법들에 저항하는 나의 이유다.

큰 돌멩이는 여럿 모여도 결코 작은 돌멩이를 감쌀 수가 없다. 반면 작은 돌멩이는 모여 큰 돌멩이를 감싸줄 수 있음을 현 정부와 가진 자들은 직시하고 신용불량자를 포함한 모든 소외계층에게 평등한 기회를 줄 수 있도록 현 정부의 잘못된 법제도는 반드시 고쳐져야 한다는 것을 끝으로 외쳐본다. 하지만 아직도 마음이 저미어 오는 것은 나의 가족이 사무치게 그리워지기 때문일 것이다.




11월 21일, 금융피해자 행동의 날 일정

■ 금융피해자 대동마당
장소 : 보신각
일시 : 2008년 11월 21일 2:30

■ 금융피해자 압살하는 2MB의 기만적인 신용회복정책 규탄 ‘금융피해자 권리선언대회’
장소 : 신용회복위원회 앞
일시 : 2008년 11월 21일 5:00~6:00


<자유발언대>를 빌려 드립니다.
자유발언대는 열려 있습니다. 자신의 주장을 맘껏 펼치십시오.
* 원고 마감: 매주 화요일 오후 3시
* 원고 분량: A4 용지 2매 전후
* 이메일: humanrights@sarangbang.or.kr


덧붙임

* 임대원 님은 ‘금융피해자연대 해오름’ 회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