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후원하기

인권오름 > 시설 밖으로, 세상을 향해

“우리가 외치지 않으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는 걸 알아요”

[시설 밖으로, 세상을 향해] 뜻을 함께할 사람들을 찾아

꼬리표 “무연고”, 가족들 이름이 생각이 안 났어요

집 근처에 냇가가 있었던 게 기억나요.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아서 새벽시장에 나가 팔면, 그 돈으로 네 식구가 생활했던 기억이 납니다. 가난했지만 행복했지요.

열한 살 되던 해, 그러니까 88년 11월이었을 거예요. 어머니가 목욕을 시키시더니 평소에 입어보지 못한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히더라고요. 조금 있으니 택시가 오고, 나를 택시에 태우고 어머니 아버지도 타시고 그리곤 어디로 향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대전시 동구에 있는 터미널 버스대합실이었더군요. 의자에 나를 눕혀놓고 부모님은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셨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하고 초조해서 울었어요. 시간이 지나도 부모님은 오지 않으셨어요. 집에 가셨던 거지요. 뒤도 한 번 안 돌아보고 말예요.

하루를 그러고 있으니 주변사람들이 근처 파출소에 신고를 하고 파출소에서 나오고 그리로 데리고 가더군요. 의자에 엎어 놓고 30분쯤 지나자 봉고차에 태우고 어디로 간 게 11월 8일. 그곳이 대전의 SS재활원이었고 그렇게 처음 시설이라는 곳에 입소하게 되었습니다. 열한 살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의 이름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탓이지요. 충격이 커서였는지 다 기억이 나는데 가족 이름만 기억이 나지 않았어요. 그래서 입소하게 된 거예요. 여전히 가족들 이름은 기억이 나질 않아요.

배워야겠다는 생각밖에는

밥을 먹으라면 밥을 먹고, 자라면 자고, 먹을 때 먹고, 스스로가 인간이라는 것을 망각했어요. 장애인은 마냥 그렇게 살아야 되는 줄 알았거든요. 그래도 그 곳에 가서 학교에 입학하게 됐어요. 열두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한 거지요. 나이가 많아서였는지 애들하고 생각하는 차이가 컸어요. 생각하는 것도 많이 달랐고, 중심이 생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게 뭔지는 몰랐지만. 학교 교육도 받고, TV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알게 되고 그랬죠.

어느 날, 전날 일찍 잤는데 아침에 깨우니까 짜증이 나는 거예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그게 갑자기 너무 싫더라고요. 그런 기분 알죠? 너무 싫고, 그러면서 “내가 왜 여기에 있어야 하나” 생각이 들면서 이런 저런 의문들이 생기기 시작하더군요.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가 중학교 졸업할 시점이 갈림길이었어요. 다른 친구들은 졸업을 하고나서 고등학교를 입학하는데, 나같이 부모가 없거나 혹은 가정형편이 없는 장애인들은 시설에 그대로 남아있었거든요. 남아서 뭘 하냐하면, 죽을 때까지 거기서 먹고 자고, 먹고 자고, 그 안에 보호작업장에서 간단히 할 수 있는 거, 구슬이나 꿴다던지, 스티커를 붙인다던지 그런 일들을 했어요.

졸업하고 나니 선배들도 그렇게 살더라고요. 그런데 난 그게 싫었어요. 왜 내가 그렇게 그것이 싫었는지는 좀 더 살아봐야 알겠지만 왠지 싫었거든요. 편지를 써서 시설장에게 면담을 신청하였고 이런저런 이유로 고등학교 가야겠다고 말했어요. 부모 없는 장애인들은 시설장이 부모노릇 다 하잖아요? 혼날 줄 알았는데, 며칠 뒤에 부르더니 순순히 고등학교를 보내주더라고요. 전주로 내려오게 됐어요.

전주에도 시설이 하나 있거든요. D재활학교 D재활원이 있는데. 그곳도 성람재단처럼 비리가 많이 터졌던 곳이었어요. 시설에서 종사하고 있는 직원이 정신지체 여성장애인을 성폭행해서 정리하는 과정에서 공교롭게도 부모 없는 사람만 타격이 제일 크게 가서 고등학교를 2년 반 다니다가 전학을 가게 됐어요. 결국 학교가 있는 충청북도 S재활학교로 고등학교를 옮겨야 했어요. 정말 배워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시설도 학교가 있는 재활원만 알아봤거든요. 그게 S재활원이었어요.

이정도 되니 시설 돌아가는 것 알게 되잖아요. 그래서 다짐했는데, 무슨 일 터져도 가만히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조용히 고등학교 졸업하려 했는데 인권유린은 그곳을 피해가지 않더군요.

시작되다, 반란

소아마비가 있는 여성 보모 선생님이 있었는데, 그이가 여성정신지체여성을 도가 지나치게 처벌한 거예요. 장대우산이 휘어지도록 때리는데, 벗겨놓고 보니 멍이 안 든 데 없이 다 멍들었더라고요. 다행히 시설에서도 반기를 들 만한 머리 있는 장애인들이 몇 있었어요. 그런 장애인들이 똘똘 뭉쳐서 시설장에게 탄원서를 올렸지요. 시설장은 전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거예요. 구조적으로 보모에게서 시설장까지 보고가 들어가는 것은 걸러지고 걸러져서 잘되고, 좋은 이야기만 들어가게 돼 있잖아요. 그러니까 잘하려고 하는 시설장들도 직원에게 놀아났던 거지요. 시설장이 사실을 알게 되고 경악을 했어요.

30여 명 가량이 모여서 30:1로 면담신청하고 우리의 요구사항을 충분히 말했더니, 다음날 즉시 전 직원이 해고됐지요. 나의 자립생활 운동이 거기서부터 시작됐다고 봐도 무방해요.


우리가 외치지 않으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그러고 나서 재활원에 있는 특수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은 꿈도 꾸지 못하고 다시 다른 시설로 가게 되었는데, 이번엔 경기도 광주의 S´재단의 S´직업전문학교로 가게 됐어요. 이곳도 마찬가지였죠. 어쨌든 이곳에서 컴퓨터과 과정을 1년 교육받고, 고향인 대전으로 와서 보증금 100만 원 월 17만 원짜리 월세 방 얻어서 컴퓨터 일을 했어요.

시설 안에서 보는 사회와 내가 나와서 보는 사회하고는 하늘과 땅 차이더라고요. 사회생활을 하면서 그냥 저는 속된말로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 굶어 죽지 않고 살기만 하면 되지”라고 생각도 했었는데 말이죠. 결정적으로 돈벌이를 하면서 사회생활을 하는데 주변의 중증장애인들은 능력이 있어도, 무수히 많은 자격증이 있어도 취직이 되질 않는 걸 많이 봤어요.

어느 날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안되겠다. 중증장애인들이 능력 발휘하면서 따뜻하게 직장생활하고 사회생활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보고 싶다.” 그리고 그런 ‘뜻을 함께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요.

그래서 약간의 진로를 바꿨죠. 지금 함께 활동하고 있는 분이 전주에 살고 있었는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해보니 의견도 맞고, 그래서 전주로 이사를 오게 됐어요. 이후에 지금 센터의 소장님도 알게 됐고요. 그러면서 내가 바라는 세상을 만들어 보고자 일을 시작했고, 지금 현재 자립생활센터에서 부족하지만 사무국장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바람대로 우리는 시설생활인의 인권확보를 위해 열심히 활동할 수 있게 되었어요. 센터의 활동가 중 대다수는 시설에서 살다가 지역사회로 나왔으니, 생활인이었던 개개인 스스로가 시설운동의 한 주체가 된 것이지요. 힘들었지만 올 한해 시청 앞에서 천막도 치고, 검찰청 앞에서 무기한 일인시위도 진행할 수 있었던 힘은 이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답도 없고, 끝도 없는 이 시설과의 싸움이 어려운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지만요.

하지만, 우리가 외치고 요구하지 않는 이상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는 걸 알아요. 그래서 나는 세상이 바뀌는 그 날까지,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자립생활이나 장애인운동을 적극적으로 하고 싶어요.

김규정 님은 현재 전주중증장애인지역생활지원센터 사무국장을 맡고 있으며 전북시설인권연대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전북 지역에서는 지역의 장애인단체, 인권단체, 민주노동당 등 15개의 단체가 ‘전북사회복지생활시설 비리척결과 인권확보를 위한 연대(전북시설인권연대)’를 발족시키고, 지역의 시설문제 해결을 위해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덧붙임

인터뷰와 정리는 ‘장애와 인권 발바닥 행동’ 활동가 름달효정 님이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