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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교육 날다] 인권과 사회복지가 만날 때 ‘어쩔 수 없다’의 벽을 어떻게 넘어설까?

사회복지와 인권이란 주제로 교육을 시작한지 이년여가 되었다. 그동안 인권과 복지가 연결된 지점을 어떻게 발견하게 돕고, 인권과 복지의 연결의 어려움을 ‘어쩔 수 없다’는 한탄으로 대체해 버리려는 복지사들을 관성에서 어떻게 빠져나오게 할 것인가의 고민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그 고민의 시작에서 올해 마지막으로 진행된 복지사 교육에 시도들을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당연한 것을 어떻게 당연하다 느끼게 할까

인권교육에서 당연한 것이다. 인권은 사회권을 반드시 포괄해야하고 사회권이 구현되는 핵심에 복지가 위치함으로. 그렇다고 인권교육은 이런 생각을 이론으로, 지식으로 주입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마땅히 그러해야 함’을 느끼고 깨닫게 하기 위해서 인권 감수성을 높이는 교육을 베이스로 깔고, 그 위해 복지현장의 사례를 통해 복지에 대한 생각을 나누며 우리가 말로는 권리라고 하며 막상 복지를 실천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수혜적 방식으로 여기고 행동하는가 성찰해보는 것을 통해 복지가 인권임을 깨닫게 교육해 왔다. 1년차 사회복지사 의무교육 기간 동안 주로 진행해온 것이 이와 같은 방식이다. 인권의 감수성에서는 인권의 기본 원칙과 의미들을 되새겨봄으로써 이것이 얼마나 복지와 만날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느낄 수 있도록 나누어왔다. 이를테면 인권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엄에 주목하는 자세임을 이야기하거나 인권은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출발하는 것이라는 점, 인권은 보편적으로 누려야 하되 특히 절대적으로 절박한 경우가 기본이 되어야 함을 이야기함으로써 삶의 안전망인 복지가 ‘인권’임을 말해왔다.

2012년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진행된 복지사 교육의 첫 장은 늘 복지사 자신의 인권이야기로 시작했다. 이를 통해 인권교육에 대한 반감(의무로 불려나온 시간에 누가 즐거울까, 더욱이 인권교육이 이용인의 인권에 대한 옹호자이기만 요구된다 여겨질 때)도 없애고 동시에 누구나 누려야할 인권이야기를 풀어가기에 적절했기 때문이다. 복지사 자신의 인권으로부터 출발해서 인권감수성을 다져가다 보면 인권을 마땅히 누릴 것이고 복지사도 예외가 아니라는 공감이 형성된다. 이렇게 형성된 공감을 바탕으로 복지가 수혜가 아니라 인권이 되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을 넌지시 풀어가는 방법론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좀 더 다르게 ‘당연함’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불가능한가”라는 고민을 시작했다. 그리고 복지가 마땅한 누려야 할 권리이자 인권의 기초임을 이야기하는데 이번엔 복지사의 모습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 가 보았다.

먼저 ‘맞아 맞아 베스트 5’ 방식을 통해서 복지사 자신이 바라본 복지사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갔다. 쪽지에 ‘나도 복지사지만 저런 복지사는 쫌 아니지!’ 싶은 복지사의 모습을 적어내도록 하고, 그것을 나온 숫자대로 순위를 매겨봤다. 신기하게도 한 그룹은 같은 장애인 생활시설의 복지사들이었고, 나머지 그룹은 여러 개의 종합사회복지관 종사자들을 모아놓은 교육이었음에도 거의 차이가 없게 결과가 나왔다. 나온 내용은 아래 사진에 나온 것 같았다.


‘일로서만 나를 대할 뿐 무관심한 복지사’ 유형에는 ‘이용인과 절대로 아이컨택(eye contact) 하지 않는 복지사’라는 표현도 나왔는데 다들 좀 섬뜩해 했다. 자신들 눈으로 본 복지사의 모습을 함께 나눌 때, 물론 나 이외의 다른 복지사의 모습으로 적어냈더라도 함께 모아놓은 내용에서 스스로의 모습들을 발견하며 반성하는 웅성거림이 장내에 인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는가. 우리가 모두 괴물은 아닐진대, 왜 이렇게 일관성 없고 차별적이고 분노조절도 못하고 때론 막말과 폭력적 행위까지 행사할까. 복지사의 ‘생얼’같은 모습과 대면해본 이 프로그램의 의도는 자신들의 모습에 ‘왜 우리가 이렇게 될까, 이유는 없을까’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해보기 위해서이다. 또한 이를 통해 복지사의 ‘괴물됨’과 복지의 위상이 ‘천덕꾸러기’로 취급되는 것과의 인과성을 떠올려 보기 위해서이다.

- “여러분, 어떠세요? 정말 이런 분들이 많은가요?”
= “인정하긴 싫지만 우리 기관에도 있지요. 때론 저의 모습이기도 하구요”
= “맞아요, 그래서 인권교육 부담되요. 그런데 어쩔 수 없을 때도 있어요.”

- “왜 그렇죠? 왜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될까요?”
= “일이 고되니까요.”
= “자유를 주고 싶지만 사고가 생기면 무조건 문책을 당하니 일단 안전이 최고다. 뭐 이렇게 되지요.”
= “맞아요. 동감해요. 저희도 자기결정권을 주라 이용인이 주체가 되게 하라는 말 들어서 알고 있지만 그런 상황까지 되려면 인력이 배로 필요해요. 근데 많은 사람을 맡고 있고 안전은 유지해야 하면 어쩔 수 없는 거죠. 뭐 잘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고, 문제는 알지만….”

- “감정조절 못하고 윽박지르는 건 우리의 생각에서 비롯된 문제는 없을까요? 이를테면 ‘잘해야 한다’는 생각, ‘무언가 극복해서 나아져야 한다’는 생각 등등 말이예요.”
= “그런 점도 있지요. 이용인이 좀 변화가 있거나 향상될 때 보람이 있지요. 그런데 변화를 바라지 않는 분들 만나면 답답해져서… 나도 모르게….”
= “일에 쫓기니 여유가 없어요. 이것도 문제라고요.”

- “이중 잣대로 일관성 없는 복지사라고 나왔는데, 일테면 어떤 모습인가요?”
= “이용인을 대할 때 자기를 잘 따라주면 잘해주고, 안 그러면 안 들어주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 “특히 아동이나 장애인 시설에서 많이 그래요. 힘의 논리도 있는 것 같아요.”
- “그런데 힘의 논리라 하셨는데,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 “… 그야, 아동은 어리고, 장애인은 도움이 많이 필요하니까….”


이보다 더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다. 다 적을 수는 없지만. 이야기를 나눈 결과 자신들의 모습이 왜 이런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복지현장의 열악한 현실과의 인과성을 떠올려보게 되었다. 그리고 복지에 대한 사회의 관점이 변화되어야 함은 우선이지만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복지사 자신들도 복지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생각해보는 이야기도 이어보았다.

한편, ‘힘의 논리’라는 위의 답변에 대해서 “복지가 인권이라고 말하지만, 이런 외침과는 달리 나(복지사)의 행동 속에 복지를 수혜거나 시혜로 여기는 뿌리 깊은 관념이 온존하진 않을까? 우리가 때론 복지의 전달자(가교,假橋) 역할을 잊고 마치 내가 베푸는 자인 듯 행동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은 아닐까?” 라고 뒤이은 질문을 해보았다. 몇몇의 참여자들이 일관성 없이 행동하게 되는 이유가 ‘누군가의 마땅한 권리’임을 잊은 채 힘이 들 때 자신들의 무기로 이용해온 점이 있음을 시인한다.

그렇다면 ‘무기’가 될 수 있는 생각의 기저엔 무엇일 있을까. 아프리카 속담에 주는 손은 받는 손 위에 있다는 말이 있다. 복지가 ‘거저받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 우리의 손이 위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나 꼬리를 물어가며 숨겨진 원인을 찾아들어가 보았다. 안으로 파고들며 이유를 따져보니 복지가 ‘마땅함의 자리’에서 미끄러져 나와 있는 것을 함께 발견하며, 어떻게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을까를 생각하는데 있어 복지사 스스로의 생각의 변화도 요구된다는 점이 자연스럽게 부각됐다. 자신들 스스로 놓쳐왔던 복지에 대한 생각 즉,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데 조금 다가온 느낌이 들었다.

당장의 해결책에 ‘집착하는’ 것을 어떻게 털어낼까?

‘들’에서 진행하는 인권과 사회복지 교육에서는 사회복지 현장의 문제를 인권적으로 바라보고 해결방안을 모색해보기 위해 무엇을 교육에 담아야 할까 고민하며 그 방법의 하나로 사례토론을 진행해 왔다. 하지만 사례 토론을 해보며 여러 한계점을 발견하기도 했다. 사례토론을 시도하는 것은 그 상황을 인권의 눈으로 다시 살펴보고 이를 통해 해결방안을 고민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이렇게 해결하면 되는 거죠”와 같이 해결책 중심으로만 축소되는 경우가 많거나, 본질적으로 사회복지 환경이 열악한 데 해결될 방법은 없지 않느냐는 무기력한 체념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고민 끝에 방법론에 추가한 것은 사례를 통해 인권적 실천을 고민해갈 때 사고의 단계를 구분해 놓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사례토론의 결론으로 참여자들이 곧장 ‘그럼 어쩌라고요? 집단생활인데….’ 또는 ‘간식 주면 되는 거지.’라는 식으로 쉽게 해결책을 말해버리지 않게 질문을 촘촘히 던져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만든 촘촘한 질문은 장애인 시설의 문제를 사례로 상정했을 때, 첫째로는 이 문제가 장애인 당사자에게 어떤 의미인가, 둘째는 사람은 어떨 때 그러한 행위를 하게 되는가? 이런 행동 속에 장애의 문제가 아닌 보편의 문제인 것은 없는지, 셋째는 복지사 자신의 가치관을 성찰하기, 왜냐하면 발생한 문제가 사실은 복지사 자신의 고정관념과 편견이 문제를 그렇게 보게 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해결책을 모색한다면 누구와 함께 어떤 틀로 논의할 것인가이다. 구조적 차원의 논의로서 재구성되어야 할 환경은 무엇인가까지 생각을 확장하기 위한 질문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토론을 진행해봤어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 토론결과를 얻었다. 그래서 이번엔 촘촘하게 사고의 깊이를 더해가는 위의 질문에 더해서 실제 사례를 주고, 또 그 문제에 나름 인권적 해결을 시도했다는 타기관의 결정을 보여주고 문제점 및 해결책을 찾아보도록 해봤다.



이 과정을 넣은 것은 앞에서 복지사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처지와 복지의 현실을 들여다보듯, 문제적 해결책에서 타산지석(他山之石) 삼아가며 더 깊이 들어가 보기 위한 것이었다.

위에 제시된 사례의 경우, 이 시설의 결정에 타당성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그냥 사례로만 주었을 때는 쉽게 해결책으로 흘러가던 것과 달리 이것이 이 시설이 인권에 기반을 두어 결정한 것이라고 하자 조금 더 비판적으로 들여다보는 것이 가능해졌다.

우선 문제로 제기된 것은 학수 씨의 방에서 아동이 있는데 술 마시는 문제에 대해서 술이 아동에게 비교육적이기에 분리해서 마시게 한 이 시설의 결정 자체를 문제제기하는 이야기들이 나왔다. 도대체 아동에게 ‘비교육’적인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비교육적인 게 문제가 아니라 ‘아동’이 성인과 같은 방을 쓰도록 한 것이 아동을 심부름꾼으로 전락시킬 수 있음을 간과한 시설에 대해 비판이 이어졌다.

또한 ‘가족적 분위기’를 원해서 아동과 성인을 같은 방에 배치했다는 설명에 대해서 정말 ‘가족’이 사람들에게 언제나 좋은 모여살기 방식이냐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물론 이런 감수성 풍부한 의견이 이런 방법론의 성과로만 섣부른 결론을 내긴 어렵다. 왜냐하면 이번 교육에 온 복지사들의 감수성이 높아서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사례만 주고 토론되었을 때 보다 조금은 객관화시켜볼 수 있는 거리를 주고, 비판할 수 있는 위치를 부여해주자 조금은 더 인권의 감수성을 발휘할 수 있었던 자리가 되었던 것 같다. 원래 남의 티끌은 잘 보이는 법이니, 이 방법은 이렇게 문제에 들어가 보며 역으로 자신들의 문제를 보기 위한 의도였는데 적어도 복지현장의 문제를 단순히 과제해결, 사례관리 같은 방식이 아니라 인권적으로 보려는 시도를 했다는 점에선 조금 의의가 있지 않나 싶다. 다만, 정말 자신들, 혹은 자신들의 시설의 문제까지 보았는지는 미지수지만.

한편, 술을 마시고 싶을 때 담당교사가 같이 나가서 마시게 한다는 결정에 대해서 담당교사는 술자리에 참여자도 아니고 그저 안전을 위해 지키고 있는 상황의 우스꽝스러움에 대한 문제, 더욱이 혼자 누군가 지키는 가운데 술을 마시는 학수 씨의 기분 등이 이야기 되면서 그저 ‘술’먹는 것을 문제의 쟁점을 바라보니 이와 같이 ‘술’을 마시게만 하면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며, 학수 씨의 입장에서 많은 이야기들이 나왔다. 그리곤 해결책으로 시설 안에 술을 마실 공간을 만들어주거나, 아니면 같이 마시고 싶은 사람들끼리 나갔다 오게 하는 것 등이 이야기 되었다. 하지만 여전한 한계는 ‘시설’이라는 특수한 공간의 해체에 대한 고민까지 이르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그래도 생각의 고리를 좀 더 깊이 끌어내리는 것에 위와 같은 방식이 조금은 유효했다고 본다.

여전히 사례토론에서 인권감수성이 쉽게 후퇴하고 ‘어쩔 수 없다’는 논리로 빠지는 것은 지적장애인이나 정신장애인의 사례이다. 지적장애인 폭력 문제를 사례로 주었을 때는 어떠한 단계적 사고를 요구하는 질문이 주어져도 경험의 한계에 갇혀버리는 모습이 역력하다. 아무래도 경험 속에서 힘들었고 어찌할 바 몰랐던 기억이 떠올라 당장의 해결이라는 고민에 갇히는 것 같다. 여기에 더해서 지적장애/정신장애에 대해서 치료적 문제로만 보며 이것이 장애를 보는 시각의 문제는 전혀 아니라는 생각이 여러 차례 있었던 비슷한 토론 과정에서 목격되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장벽에 맞닥뜨린 인권교육이 넘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다시 인권감수성으로! 그리고 기다림의 시간

<소란>에 썼던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인권교육에서 위와 같은 장벽을 넘어설 뾰족한 묘안이 있을 수 있을까. 아니 묘안으로 가능한 일일까. 사실 복지사 인권교육이 대체로 일회성에 그치는 현실에서 인권감수성을 일회성 교육으로 높아지길 기대할 수 없다는 구조적 한계를 짚지 않을 수 없다. 끊임없이 인권의 눈으로 구조를 바라보고, 구조적 비판을 담아 사회가 나에게 심어준 감각을 깨우는 것을 반복하고 또 반복할 때 조금씩 길이 열리지 않을까. 또한 장애인을 늘 마주하는 경우조차도 장애에 대해 가진 편견, 이해 부족이 만드는 복지사의 ‘장애성’을 극복하기 위해서 소수성에 대한 이해, 다양한 장애에 대해 다른 시선을 갖게 하는 장애이해 교육이 더 필요할 듯.

결국 사회복지와 인권의 만남, 그 인권적 변화를 주도할 주체는 사회복지사다. 따라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복지사 자신이 인권교육이 던져준 문제의식과 새롭게 돋아난 인권의 감각을 자신의 감각으로 체화하는 경험의 시간을 느긋이 기다려보는 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짐 아이프(Jim Ife, 2003)의 말로 이 글을 맺는다.

“인권에 기초한 사회복지실천은 사회복지 분야의 종사자들에게 특별한 것을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행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복지에 대해 기존과 다르게 생각하는 법, 즉 사고의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다.”

(*) 인권교육센터 ‘들’에서 발행하는 소식지 <소란> 33호에 “사회복지와 인권의 불완전한 동행을 넘어서려면-사회복지사 교육에서 사회복지의 인권적 실천을 교육하려 할 때 넘어야 할 것”(www.dlhre.org) 이란 필자의 글이 있다. 이 글을 참조하면 촘촘히 사고의 단계를 높이기 위해 주어진 질문과 그렇게 토론했던 교육사례가 소개되어 있다.
덧붙임

정주연 님은 루트라고도 불리며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