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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준의 인권이야기] 표현의 자유를 위해서, 혹은 넘어서서

커뮤니케이션과 관련된 인권의 개념은 지난 글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표현의 자유’를 가장 중심에 놓아 왔다. 그렇다면 이렇게 질문해볼 수 있을 것이다. ‘표현의 자유’로 충분할까? ‘표현의 자유’를 폭넓게 해석하면 커뮤니케이션과 관련된 인권이 충분히 설명되고 부각되는 걸까? 여러분 누구나 쉽게 예상하듯, 답변은 “그렇지 않다”이다.

물론, ‘표현의 자유’는 언제나 중요하다. 그것은 여전히 침해당하며, 그 권리를 찾기 위한 싸움은 예나 지금이나 끝없이 계속된다. 아직도 억압적인 국가권력에 의해 최소한의 민주적인 소통의 권리가 보장되지 않고 있는 나라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처럼 군부독재 체제를 벗어나면서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보장되고 있는 나라들에서도 문제는 좀비처럼 되살아난다. 인권운동사랑방이 주최하는 영화제가 현행 영화법상으로는 심의면제추천을 받아야 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한국의 영화 관련 법령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으며, 인터넷의 실명제 및 내용삭제 명령 시스템은 광범위한 참여를 보장하는 새로운 미디어에서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 올드 미디어나 뉴 미디어나, 과거의 유물이든 새로운 발명품이든, 그 어느 것과 관련해서도 표현의 자유는 싸우지 않는 자에게 거저 주어지지는 않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 ‘표현의 자유’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무엇인가 부족한 상황들이, 그리고 기본권을 생각해 본다면 당연히 보장되어야 할 어떤 권리들이 점점 더 부각된다는 것이 새로운 고민을 던져준다. 좀 더 폭넓은 이해를 위해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A, 저널리스트만의 표현의 자유 개념은 이미 효력을 다했지만, 새로운 개념은 미개척이다.
표현의 자유 개념이 반드시 전업적인 저널리스트(기자, PD 등)만을 위한 개념은 아니지만, 취재의 권리에 관한 한 여전히 저널리스트는 특권을 지닌다. 주류 미디어의 기자들이 자유롭게 현장을 취재하는 반면, 독립 다큐멘터리 작가나 무엇인가를 알고 싶은 평범한 시민들은 그 현장으로부터 손쉽게 배제된다. 인터넷 등 다양한 미디어들이 등장하면서 소통구조는 확장되고 있지만, 소통을 하기 위해 현실을 포착하려는 권리는 여전히 불평등한 것이다. UCC가 범람하는 이 시대에 이러한 저널리스트 중심의 표현의 자유 개념은 이미 구시대의 것이 되었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자기 표현은 콘텐츠의 생산단계에서부터 억압된다.

B, 접근성의 보장은 권리의 축소로 이어지기도 한다.
얼핏 이해하기 힘든 이런 상황은 바로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다. 지금까지의 미디어 중 가장 개방적 미디어인 인터넷의 확대는 곧 접근성의 확대로 이어졌으며, 그런 점에서 표현의 자유는 그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확장되었다. 그런데 그 확장의 결과는 지극히 상업적인 ‘자본의 공간이 압도하는 인터넷’이다. 좀 과장을 섞어 표현하자면, 표현의 자유를 확대하는 싸움이 결과적으로 자본의 자유만을 보장해버린 셈이니, 이런 역설이 어디 있을까. 형식적 접근성의 문제로 보자면 분명 표현의 자유는 확대된 것인데, 과연 공론장으로서 인터넷의 역할이 발전했는지, 진정한 의미의 표현의 자유가 확대되었는지는 의문인 것이다. 이 문제는 접근성을 축소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동시에 접근성을 더욱 확대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C, 표현의 자유를 누릴 주체 간의 이해관계는 때로는 충돌하며, 서로를 제한한다.
미래사회의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구조에 대한 전망을 둘러싼 국가-자본-시민사회 간의 각축전이 벌어졌던 5년 전 WSIS(정보사회를 위한 세계 정상회의)에서 벌어진 의미심장한 논쟁을 한번 되새겨 보자. 당시 시민사회 내부의 의견그룹 중 하나였던 미디어 코커스(caucus)에서 공동체 미디어 활동가들이 커뮤니케이션 권리 개념을 내세우자, 주류 미디어 저널리스트 조직(국경없는 기자회 등)은 강하게 반발했다. 그 이유는, 공동체 미디어의 보장이 국가에 의한 주류 미디어의 규제를 전제하는 것이므로, 그렇게 되면 당연히 기존 미디어의 표현의 자유는 침해당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건 한국에서도 익숙한 논쟁인데, 퍼블릭 액세스 구조가 강조될 때마다 주류 미디어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프로그램 시간이 단축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드러내며 저항했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말하자면, 특정한 미디어가 누구에 의한, 어떤 시스템에 의한 표현의 자유를 보장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미디어의 주체는 충돌하게 된다. 전사회적 표현의 자유를 확대하는 과정에서 특정 미디어의 표현의 자유는 축소될 수도 있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힘 있는 자 혹은 이미 충분히 표현하고 있는 자의 ‘표현의 자유’는 상대적으로 제한될 수도 있다.

D, 제대로 표현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표현된 것들이 비판적으로 해석되지 않는다면 권리는 위축된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결과는 다양한 표현의 생산물이다. 그런데, 그 생산물의 확대가 반드시 인권의 강화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그것은 생산물의 내용 때문에 그럴 수도 있고 (대부분의 콘텐츠는 점점 상업적이며, 공공적이라 할지라도 기계적 중립에 머무르기 일쑤다), 그러한 생산물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태도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가 미디어 시스템 및 미디어 내부의 제작자의 문제라는 차원에서 해명되는 것이라면, 후자의 경우는 평범한 사람들의 미디어에 대한 비판적 접근의 문제로 드러난다. 표현의 자유를 통해서 생산된 콘텐츠에 대해 비판적 관점으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다시 말하면 전사회적 차원의 ‘미디어 리터러시’(미디어를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생산할 수 있는 능력) 혹은 미디어 교육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유의 확장은 억압의 재생산 혹은 억압의 내면화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표현의 자유’가 생산의 영역에 머물러있다면, ‘비판의 자유’가 소통의 영역에 보충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복합적인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까? 지난번 원고에서는 이렇게 정리했었다.
“인권선언에서 언급된 전통적인 표현의 자유는 재해석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여기서 접근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표현의 자유가 온전히 보장되게 하기 위해 표현의 자유로는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는 다른 커뮤니케이션 권리들이 보장되도록 하면서 전체 커뮤니케이션 관련 권리 개념의 프레임을 새로 만들든지, 혹은 표현의 자유를 포함하는 다양한 권리들을 종합하고 서로 연관을 맺으면서 그 최고 상위의 개념으로 (가칭)커뮤니케이션 권리를 새롭게 구성하든지 말이다.”

이론적으로는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방법이 모두 선택 가능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현실의 관행과 상식을 생각해 본다면, ‘표현의 자유’를 온전하게 보장하기 위한 권리 개념의 재구성은 어쩌면 사람들을 더욱 혼란스럽게 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표현의 자유를 중심에 놓으면서도 다양한 권리를 뚜렷하게 부각시키며 각 권리의 상호 관계를 규명하는 작업은 더 이상 미룰 수 있는 것이 아닌 듯하다.

사실 이것은 순식간에 떠오른, 그러나 해묵은 과제이다.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 구조가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면서 우리의 인식과 판단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은 아주 짧은 기간 동안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우리는 그 이전 시대의 개념에 머물러 있으며 실천을 기획해왔던 것이다. 따라서,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는 실천을 바꾸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질문에 대해서 답해야 한다.

“커뮤니케이션과 관련된 권리들, 혹은 미디어와 관련된 권리의 내용들은 무엇이며, 그 총체를 우린 무엇이라 부를 것인가?”, “인권운동 혹은 인권을 보장해야 할 국가나 독립기구(국가인권위원회)는 미디어/커뮤니케이션과 관련해서 어떤 프레임을 갖고 어떤 영역에 걸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덧붙임

◎ 김명준 님은 미디액트 소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