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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인권유린으로 얼룩진 ‘학원체육사(史)’를 다시 쓰자

유명 스포츠 스타들이 결혼하거나 아기를 낳게 되면 으레 다음의 질문과 대답이 오고 간다.

기자 : “애가 커서 운동하고 싶다고 하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선수 : (열이면 여덟, 아홉이) “운동은 안 시켰으면 합니다.”
기자 : “아니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부모님의 운동신경을 물려받아 잘 할 것 같은데요?”
선수 : “제가 너무 힘들게 운동해서요...”
기자 : “아, 네...”


물론 대를 이어 운동선수가 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허재 감독의 아들은 뛰어난 학생 농구선수이다). 하지만 외국의 운동선수들과는 달리, 한국의 운동선수 중 열이면 여덟, 아홉이 ‘힘들다’는 이유로 자기 자식들에게 운동을 권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얼마 전 공중파 프로그램에 출연한 한 유명 농구선수는, 자식에게 농구를 시키지 않을 거라며 그 이유로 ‘힘든 운동과정과 어려운 선후배 관계’를 말하기도 했다. 아마도 계속되는 합숙, 구타와 폭력, 그리고 상급학교 진학의 압박감을 항상 느껴야만 했던 지난 학창시절(?)을 자식에게까지 물려주기는 싫었으리라.

사실 한국의 학원체육이 구타, 폭력, 학습권 침해 등 가히 ‘청소년 학대’ 혹은 ‘인권유린’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라기보다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축구부 합숙소 화재로 초등학교 축구부원 8명이 목숨을 잃고 17명이 중상을 입었던 2003년 천안초등학교 축구부 참사와, 같은 해 무리한 감량으로 인해 목숨을 잃고 만 레슬러 김종두 군 사망사건 등 연이은 사건사고에도 불구하고 학원체육의 병폐는 근본적으로 치유되지 않고 지속되고 있다. 최근 국가인권위원회의 보도자료에 따르면, 천안초등학교 축구부 참사 이후 교육부가 초등학교 운동선수들의 합숙을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절반에 가까운 초등학교 학생선수들이 합숙을 경험하고 있다. 또한 약 75%의 초등학교 학생선수들이 언어적·신체적 폭력을, 심지어 약 15%의 선수들은 성추행을 경험했다고 답변했다.

극소수의 선수만이 살아남는 피라미드와 같은 엘리트 체육의 현실에서, 이른바 ‘4강 입상제도’-소속팀이 전국대회 4강에 들어야만 상급학교로 진학-의 벽은 학원체육에서 고질적인 성적지상주의를 부채질하고 있다. 그리고 시합에서 이기는 것만 목적이 된 학원체육은 초등학교부터 합숙과 돈거래, 스카우트 비리 등으로 검게 얼룩져 있고, 이런 가운데 구타와 (성)폭력, 학습권 침해 등 ‘인권유린’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문제가 반복, 재생산되고 있다. 현재 한국의 학원체육은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문제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뿌리부터 곪아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이러한 잘못된 관행은 우리은행 여자농구단 박명수 감독의 성폭행미수사건, 고려대 아이스하키부의 구타·학대사건 등 대학교와 성인체육으로까지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가운데 지난 12월 17일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학생선수 인권보호 및 증진을 위한 정책 권고’(아래 정책권고)와 얼마 전 국회를 통과한 ‘학원체육정상화를 위한 촉구 결의안’(아래 결의안)은 의미 있는 변화를 위한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구체적인 내용으로는, <결의안>의 경우 △학생체육대회의 평일 개최 금지 △최저학력제 도입 △합숙소 점진 폐지 △학교스포츠클럽 활성화 등 그 동안 문화연대를 포함한 시민사회단체가 요구해왔던 개선과제들을 반영하고 있다. 인권위의 정책권고 또한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학생선수의 수업 결손에 대한 대책 강구 △학교운동부 합숙소 시스템 개편 △최저학업기준인정제도 도입 △학생선수 폭력 예방 및 근절 종합 대책 마련 △전국(소년)체전 개최 방식의 획기적 개선 등을 통해 학생선수들의 신체적, 성적 폭력 근절과 학습권 보장 대책 마련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다만 결의안과 정책권고에 ‘4강 입상제도 폐지’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는 것은 아쉽다. 앞서 언급한대로, 상급학교 진학의 열쇠가 되는 ‘4강 입상제도’는 학원체육의 병폐를 유지, 확대하는 핵심적인 문제 중의 하나이다. 학원체육 이외의 클럽스포츠가 전혀 활성화되지 못한 가운데, 상급학교 진학이 부와 명예(이른바 ‘본전’ 찾기와 ‘대박’ 터뜨리기)를 얻기 위한 유일한 방안이 되면서 ‘4강 입상제도’의 현실적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초등학교 합숙 금지와 같은 지침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학원체육에서의 폭력, 구타, 수업결손, 비리 등이 발생하는 핵심에는 ‘4강 입상제도’라는 현실적인 제도가 있다. 결의안과 정책권고가 학원체육의 현실에서 실효성을 갖기 위해서는 ‘4강 입상제도’의 폐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어찌 되었든, 이제 필요한 것은 ‘결의’와 ‘권고’를 넘어서는 실질적인 정책 수립과 집행이다. 사실 결의안과 정책권고를 통해 지적된 문제와 대안은 지난 수년 간 반복적으로 제기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집행되지 못한 사안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가운데 학생선수들은 학생선수들대로, 부모들은 부모들대로 힘든 현실을 겪고 있고, 경쟁에서 탈락한 선수들은 사회에 적응하는 것 자체를 힘들어하는 현실이 반복된 것이 학원체육이었다. 국회와 국가인권위원회의 의미 있는 발언을 계기로 교육부와 문화부 등 관계부처의 실질적인 정책의 수립과 집행을 기대한다. 그래서 한국의 운동선수들도 다음과 같은 인터뷰를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운동을 하고 싶은 게 자기의 선택이라면 하게 해야죠. 이제는 운동한다고 집에도 못 들어오고 공부도 안 하는 게 아니니까요.”
덧붙임

◎ 최준영 님은 문화연대 체육문화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