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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카로 물구나무] 수능 대박 응원

[편집인 주] 이번주 '디카로 물구나무'는 사진 그 자체가 주는 영향을 고려해 싣지 않기로 했습니다. 공개적인 공간에서 청소년들이 자발적으로 상의를 벗었다고 해도, 사진 자체가 불편함을 줄 수 있고, 그들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사진을 실을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독자들의 양해를 구합니다.


얼마 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무렵 한 고등학교 앞에서 같은 고등학교 후배들로 보이는 청소년들이 상의를 벗고 응원을 한 사진과 기사가 눈에 띄었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노래를 부르는 그들의 얼굴에서는 결연한 기운이 넘쳐나서 마치 출정을 앞둔 군인이 연상된다. 그렇기 때문인지 상의를 벗은 청소년의 이미지에서 ‘성별화’(gendered)된 남성의 몸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수용되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 몸은 선배들이 수능을 잘 보기 위해서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는 충직함, 긴장하고 있는 선배들에게 기운을 팍팍 주어 고득점을 획득해 학교의 명예를 올리겠다는 애교심을 호소하고 있는 듯 하다. 그래서인가? 그런 남성의 몸은 ‘충직함과 애교심’을 달고 굴지의 통신사 전파를 통해 전국 방방곡곡을 달린다. 여성의 몸이 사회적으로 수용되는 방식과는 사뭇 다르다.

그런데 나는 그 사진 속에서 청소년들의 ‘충직함과 애교심’보다는 영하 4도의 날씨에 추위를 인내(?)해야 하는 몸의 고통이 느껴진다. 지독한 입시 지옥에서 하루 14시간 이상 학교에 매이는 것도 모자라 영하의 날씨에 옷도 입지 않은 채 새벽잠도 못자고 나왔을 그들에게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그래서 ‘수능 고득점’이라는 학교의 명예를 위한 고투는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묻고 싶다. 그런 탓에 애교(愛校), 애사(愛社), 애국(愛國)이 강요하는 사회에서 남성의 몸은 소모품으로 전락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수송으로 나라의 은혜를 갚자’는 모 항공사 건물 1층에 걸린 현판도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몸 바쳐 회사와 나라에 충성하라는 메시지로 읽힌다.

알몸응원의 청소년들 외에도 수능의 다양한 풍경 안에는 입시폐지를 위한 일인시위와 원하는 점수가 나오지 않자 죽음을 선택한 사연이 들려온다. 이러한 현실을 외면하는 수능응원전은 입시경쟁에서 성공이 모두의 것이 될 수 없는 현실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원하는 교육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구조적으로 보장되지 않은 채 '필승'하나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환상은 현실을 직시하는 것보다 달콤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