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식년에서 복귀한 지 한 달이 조금 지났습니다. 쉬어보니 활동의 밀도와 속도가 새롭게 보입니다. 긴 여행에 여독이 쌓이듯, 오랜 쉼에는 안식‘독’이라는 게 쌓이는 걸까요. 운동의 가쁜 호흡이 낯설어 숨을 틔우는 방법부터 다시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안식년의 부작용인지 순기능인지 살짝 헷갈리네요.
저는 계획적인 사람이 아닌 탓에 계획에 없는 일도 곧잘 하지만, 그렇다고 즉흥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래서인지 안식년에 접어들고 한동안은 묘한 불안에 시달렸답니다. 이 ‘금 같은’ 시간을 어영부영 보내다 어느 날 갑자기 안식년이 종료되는 악몽을 꾸는 거죠. 예상대로 안식년의 끝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습니다.
다행히 악몽 대신 좋은 꿈을 꾸고 일어난 것 같은 기분입니다.지난 일 년은 정말이지 특별한 시간이었습니다. 일요일에 아무런 걱정이 없는 상태, 그건 참으로 좋은 것이더군요. 그리고 유례없이 많은 시간을 집에서 보냈습니다. 그 덕분에 저와 함께 살고 있는 고양이 담, 그리고 복동과 더 깊은 유대를 쌓았습니다. 성실하게 집에서 요리를 하고 쓸고 닦고 정리하는, 그야말로 재생산 노동에 전념했습니다. 운동도 열심히 했어요. 매일 아침 수영 강습을 받았고, 틈만 나면 수영장으로 향했습니다. 물속에서 숨을 고르며 “아 좋다...”를 연발하는 럭셔리한 모먼트를 자주 누렸습니다. 그동안 소홀했던 가족과도 잊지 못할 시간을 보냈습니다. 칠순을 맞이한 모친과 국내외로 로드트립을 했고요, 해외에 사는 동생네에 들러 한 달 살기도 해보았답니다. 소파에 앉아 티브이도 많이 보았어요. 계엄과 탄핵 그리고 내란 재판에 이르기까지 뉴스 특보와 정치 시사 토론을 보며 세상 돌아가는 걸 ‘구경’하는 재미에 푹 빠져 살았습니다. 안식년 입구에서 느꼈던 불안은 어느샌가 사라지고 없더군요.
복귀를 며칠 앞둔 어느 날 모친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즐겁게 다니던 공공 일자리에 재지원했는데, 영문을 모른 채 탈락했다는 사정을 하소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모친은 통화 말미에 당신의 처지를 제게 투사하며 말했습니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하니? 지금 네 나이에 이직을 할 수 있겠니? 감사히 생각하고 잘 다녀봐.”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불과 1~2년 전만 해도 어디 돈 잘 버는 일자리 좀 알아보라고 권하던 사람의 급변한 현실 인식에 당혹감이 밀려왔습니다. 그 앞에서 차마 ‘생계를 해결할 목적으로 인권운동을 하지 않는다’라는 사랑방의 운동원칙선언을 읊을 수는 없었습니다. 사실 모친은 그녀의 방식대로 복귀를 앞둔 제게 힘을 주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모친의 말에는 어떤 통찰이 깃들어 있습니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 나를 기다리는 운동이 있고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건 틀림없이 감사한 일이니까요. 그리고 이 나이에 뭔 새로운 일을 하겠냐는 말... 역시 딱히 틀린 말도 아닌….
복귀한 첫 주, 체제전환운동포럼이 3일간 열렸습니다. 체제전환운동은 그사이에 또 어떤 쫀쫀한 고민과 말들을 쌓아 올렸을까 기대와 호기심이 샘솟았습니다. 인공지능이랄지, 5극3특 체제랄지, 운동의 정세와 조건이 나빠졌다는 신호가 많이 포착되는 시간이었지만 역설적으로 사랑방 운동의 중요성이 더 커지는 시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포럼 내내 자본과 권력에 맞서 더 잘 싸우고 싶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막간에는 포럼 행사장 한켠에 마련된 테이블에서 기후정의동맹에서 발간한 소책자를 판매하고, 오가는 참가자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지요. 2년 전 포럼에서도 꼭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일을 했었는데 그 덕분인지 어떤 안도감이 밀려 들었습니다. ‘그래, 여기가 내 자리였지. 잘 돌아왔구나.’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운동의 지속가능성과 우리 스스로의 권리가 실현될 수 있도록 노력하기를 멈추지 않는 인권운동사랑방 덕분에 저는 제 삶에 다시 없을 좋은 시간을 보낸 거 같습니다. 무지 고마운 마음입니다. 이제 더 열심히 치열하게 운동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의 준비를 마친 것 같습니다. 이건 분명 안식년의 바람직한 기대효과이겠지요? 이제 그 착실히 쌓은 ‘잘 쉼’ 의 힘을 믿으며, 사랑방 활동의 2막을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모두 고맙고, 반갑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