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사무실이 홍대 부근에 있던 시절, 퇴근하고 연락을 하면 왠지 홍대 부근에서 공연을 보고 있을 것만 같은 장면이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활동가가 있었습니다. 근데 이제 그 활동가는 혼자만이 아니라 자신이 활동하던 단체까지 함께 짐을 싸서 전라북도 장수로 이주해 벌써 3년 차를 마주하고 있는데요. 누구보다 홍대와 어울리던 사람이 어쩐 일로 장수까지 가게 되었는지, 장수에서는 어떤 고민을 하면서 지내고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자기 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교육공동체 나다’에서 활동하고 있는 쩡열이라고 하고요. 2013년부터 나다에서 정식으로 활동을 시작해 2023년 나다와 함께 장수로 이주해 왔어요. 수도권에서만 살다가 이제 장수 살이 3년째 이어가고 있습니다.
2013년이면 정말 오랫동안 나다에서 활동을 해오셨네요. 쩡열님은 나다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었나요?
제가 나다를 처음 만난 건 2007년이었어요. 제가 홈스쿨링을 하고 있을 때 우연한 기회에 학교 밖 청소년을 위한 캠프를 가게 되었고, 그때 나다를 처음 만났어요. 당시는 나다가 무엇인지는 몰랐고, 그냥 프로그램 진행하는 이상하고 재미난 선생님, 또는 사람들이라고만 생각했거든요. 그렇게 캠프는 별일 없이 지나갔는데, 같은 해 말쯤에 친구가 저에게 잘 맞을 거 같은 곳이 있다고 가보라고 추천을 해줘서 갔더니 그 이상하고 재미난 사람들이 있는 거예요. 그때부터 나다에서 수업을 계속 들었어요. 저는 학교를 안 다니고, 나다는 홍대에 있으니 너무 좋잖아요. 낮에 홍대에서 돌아다니다가 나다에 가서 밥 먹고, 수업 듣고, 저녁에는 클럽 공연 보러 다시 나가는 거죠. 집이 홍대에서 머니까 엄마한테는 나 선생님 집에서 잔다고 하고 나다 활동가의 집에서 잤어요. 그렇게 청소년기부터 나다, 그리고 나다 활동가들과 친하게 지냈죠.
지금 와서 보면 나다의 타이밍과도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원래 나다가 성남에 있었거든요. 그러다가 2007년에 청소년 운동을 포함하여 여러 실천 활동에 대한 연대를 고민하면서 서울로 이사를 막 왔던 때거든요. 그러면서 교육 운동, 인권 운동의 의제를 고민 해왔고, 2008 촛불집회까지 거치면서 나다에는 청소년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나다 사무실에서 회의도 하고 잠도 자면서 자연스럽게 저도 활동하는 친구들과 친해진 거죠. 그러다가 나다에서 2009년부터 청소년 자치 공간 실험을 하면서 더 편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죠.
우연 같은 만남이 끊어지지 않고 이렇게 길게 이어지다니 너무 신기하네요. 그럼 나다에서 활동은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거에요?
청소년 시기에 다양한 사회운동을 만나면서 고민이 무척 많았어요. 사회 문제나 입시 경쟁 교육에 대해 내 일이 아니라고 여기는 또래 친구들도 내 편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세상을 바꾸는 활동을 하고 싶긴 한데 막상 청소년 운동에서 하는 실무는 좀 안 하고 싶었던 거 같아요. 그 덕에 너는 맨날 놀기만 좋아한다고 싫은 소리도 듣고 그랬던 기억이 나네요(웃음). 근데 저는 법을 바꾸는 일보다는 사람들을 만나서 그 사람의 변화를 함께 만드는 활동에 더 관심이 많았던 거 같아요. 제가 제 안의 불안 같은 것을 줄여나가는데, 나다의 활동가들이 저를 붙들고 돌봐주던 시간들 덕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저도 그런 역할을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었어요.
그래서 막무가내로 나도 이제 나다에서 일하겠다고 선언했어요. 그때가 열일곱 살이었죠. 돌이켜 생각하면 나다 활동가들은 큰 시도이자 도전을 한 거 같아요. 나다에서 이야기해 온 인문학 공부라는 것이 철학 사상을 학술적으로 가르치는 것이기보다는 약자들이 말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그 인문학 공부를 함께 했던 청소년이 스스로 이 조직-공간을 함께 책임져나가고 싶다고 손을 든 거잖아요. 나다는 그 손을 그저 땡깡이 아니라 교육과 운동의 재생산 과정으로 여기고 직시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저를 소중하게 대하며 받아준 거죠. 물론 나다가 크고 여유 있는 단체가 아니라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고 중간에 잠시 휴식기를 가지며 공간을 정리하기도 했지만, 결국 다시 문을 열고 2013년 다시 활동을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저는 정식 활동가로서 상근비를 받고 본격적으로 활동했죠.
그렇게 제가 나다에서 활동을 시작하면서 만들어진 활동이 나다의 ‘책 언니’에요. 저랑 엠건이라는 활동가 둘이 20대 활동가로 새롭게 나다에 결합했고 이 둘의 특징에 맞는 교육 활동을 만든 것이거든요. 둘 다 대학 거부를 하고 인문학 공부는 시작에 가까운 상태잖아요. 동시에 청소년 인권운동을 경험하고 어린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가진 상태이기도 했고요. 물론 인문학 세미나, 스터디는 그 이후로 정말 많이 했지만, 당시에 새롭게 나다 활동을 시작한 사람들이 나다의 활동으로 함께 할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한 결과였던 거죠. 여덟 살 어린이와 이십 대 초반의 활동가가 만나면 기존의 교육과는 또 다른 새로운 거리감을 만들어 낼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시작한 거죠.
▲여덟살 인문학 토끼굴 '책 읽어주는 언니'는 초등 저학년 어린이와 함께 그림책을 통해 인문학 공부를 시도하는 교육공동체 나다의 실험적 기획 활동
멋진 단체의 더 멋있는 시도를 함께 만들어오셨네요. 그런 나다가 지금은 홍대가 아니라 장수라는 지역에 있잖아요. 어쩌다가 단체를 지역으로 이주하게 되셨나요?
나다는 단체면서 동시에 공동체적 삶의 고민도 꾸준히 이어왔거든요. 근데 도시에서 이 공동체적 삶이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계속되는 와중에 코로나가 터졌어요. 교육 단체들이 많이들 그랬을 텐데 대면이 안 되던 시기니까 교육 활동이 멈추면서 정말 고난의 시기였거든요. 몇 년을 열심히 수업해서 단체 적자나 출자금 갚으려고 모아둔 돈을 6개월 만에 다 까먹게 되는 거예요. 다들 이런 팬데믹과 거리두기 경험이 없으니까 언제까지 멈추게 될지 모르고 이번 주 교육 취소하고 다음 주는 또 미정으로 두었다가, 다시 취소하는 이런 반복을 이어가면서 다른 대비책도 없이 계속 돈만 빠져나가는 거죠. 그렇게 몇 달을 보내고 다시 교육이 시작될 때는 기존과는 달리 비대면 교육의 방식으로 이루어졌잖아요. 근데 나다의 교육에서 눈을 보고, 포옹하고, 온기를 주고받으면서 관계성을 만드는 것이 핵심적인 요소 이거든요. 비대면에서는 이게 어렵잖아요. 코로나 시기는 돈도 돈인데 교육을 이어가는 데도 너무 힘들고 어려운 시간이었어요. 그러다가 지역의 상황은 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거리두기 규제의 기준이 인구 밀집도이다 보니 지역의 작은 학교는 서울과는 다르고 조금은 움직일 여유가 있다는 이야기도 듣게 되었죠. 과거의 나다가 성남에서 서울로 이사한 이유가 더 많은 청소년과 인문학 공부를 함께 하기 위해서였다면, 펜데믹 이후 비대면이 일상이 된 서울에서 우리는 새로운 활동 방향을 고민할 필요가 있었어요. 그렇게 지역 이주에 대해 구체적인 논의가 시작됐어요.
막상 이주해 보니 어때요? 기대보다 좋았던 점도, 기대와는 달랐던 점도 있을 것 같은데요.
물론 처음에 자리 잡고, 적응하는 게 쉽지는 않았어요. 지역에서 일하는 방식도 잘 몰랐고, 기존 활동하던 분들과 알아갈 시간도 필요했고요. 그래도 이런저런 자리 가리지 않고 찾아가면서 설득해왔던 거 같아요. 그래서 나름 신뢰하는 관계도 쌓고요. 무엇보다 친해진 청소년이 많다는 것이 가장 큰 성취가 아닐까도 싶네요. 최근 있었던 에피소드가 떠오르는데요. 올여름 특강에 참여했던 청소년들이 마지막 날 다들 우는 거예요. 경쟁교육에서 자본주의까지 이어지는 이야기를 하면서 ‘이 사회가 인간을 상품화-부품화시키고, 우리를 언제든 대체시킬 수 있도록 만든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대체될 수 있는 인간이냐’는 말을 했더니 한 친구가 자기는 늘 뭔가 못하면 스스로를 탓하게 되고, 자신에게 특별하다고 이야기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면서 우는 거예요. 한 친구가 우니까 다른 친구들도 서로 위로하면서 울고, 그때 저도 ‘아, 지역에서도 여전히 우리의 활동이 필요하고, 계속 잘해 나가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럼에도 여전히 지역에서 어려운 점은 기관을 통해야 한다는 점인데요. 장수에서는 사람이 너무 적어서 모집의 방식으로는 교육을 진행하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보통 교육청이나 학교 같은 기관을 통해 연계하여 진행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요. 그 교육을 대하는 방식이 너무 아쉬운 거죠. 제일 적은 단가로, 방과 후 시간을 때우는 식으로 교육을 진행하는 거죠. 근데 그 시간을 통해서라도 하지 않으면 저희도 청소년을 만나기 어려우니 울며 겨자 먹기로 들어가고, 단체 운영비가 줄어든 만큼 수입도 같이 줄어드는 조건이 만들어지는 거죠.
여기에 기관은 담당자의 성향에 따라 교육의 방향이 멋대로 정해지기도 하는데요. 한 번은 교육청 산하 기관에서 제가 나이에 비해 경력이 많은 것이 이상하다며, 대학 졸업장을 요구하더라고요. 대학교 1학년 나이에 무슨 경력이 시작되냐고. 그래서 결국 대학비진학자인 저는 교육이 취소됐어요. 매년 해왔던 곳인데 갑자기 통보받은 거죠. 정말 너무 열받았는데 차별을 받아서만이 아니라, 장수는 인구감소지역으로 맨날 어떻게든 청/소년, 어린이를 늘리려고 온갖 정책이 나온단 말이에요. 근데 대학 안 나왔다고 일자리 자르는 동네에서 어떤 청년이 지속해서 살아갈 생각을 하겠어요.
▲ 송전탑 건설 반대 활동에 연대하는 쩡열
너무 속상했겠어요. 그래도 이야기를 쭉 듣다 보니 쩡열과 나다의 관계는 교육 단체와 활동가만의 관계가 아니라 10대 청소년이 한 단체의 살림살이를 이고 지고, 좌충우돌하며 함께 성장해온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번에 슈렉 활동가가 나다의 활동을 정리하면서 이제 나다에 저보다 오래 활동한 사람이 없거든요. 슈렉이 그만두면서 슬프기도 했지만, 이제는 제가 10대, 20대 때 나다 활동가들이 저에게 해주었던 역할을 해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근데 막상 제가 그 역할과 책임이라는 것을 마주했을 때 그렇게 일방적이지 않더라고요. 지금 나다에 저와 ‘박씨’ 두 명의 활동가가 있는데 박씨는 제가 처음 활동을 시작할 때 중학생이었거든요. 마치 제가 나다에 처음 찾아갔을 때 나다 활동가와 제 관계처럼 박씨와 저의 관계가 이어진 거죠. 현재 박씨와 같이 살고, 활동을 함께 하다 보니 박씨는 저를 가장 버티게 해주는 존재가 되어있더라고요. 박씨가 나다에서 이 활동을 선택해 나가는 과정을 함께 하면서 든든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있어요.
이런 나다의 활동과 고민이 어디에 있더라도 여전히 이어져야 하는 이유를 잘 설명하고 또 전달하기 위해서 이번에 후원캠페인도 시작했어요. 후원을 요청하는 일은 언제나 힘들지만 나다 활동의 필요성을 스스로 설득하고, 또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과정이기도 하잖아요. 이번 후원 캠페인은 나다가 지금 하고 있는 활동을 중심으로 설명해 보려고 기획했어요. 장수 이주 이야기, 책 언니로 만났던 사람들과의 인터뷰, 나다움 활동에 관한 다큐, 마지막은 나다 활동의 재생산에 관한 고민까지 담은 토크쇼를 진행했거든요. 이 과정을 준비하면서 박씨가 너무 힘든데 좀 좋고 즐겁다고 이야기하니까 저도 너무 든든한 기분을 느꼈어요. 이제 막바지인데, 이 인터뷰를 보시는 분들도 많은 관심과 참여도 함께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2025년 나다 후원캠페인
"어디에 있더라도 나다답게"(~8/15)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https://litt.ly/nada_education
마지막까지 힘내어 성공적인 후원캠페인으로 마무리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사랑방 활동가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까요?
지역에 이주하면서 아쉬운 게 저와 같은 고민을 나누는 동료들이 가까이 있지 않다 보니 자주 만나기 어렵다는 점인데요. 그럼에도 사랑방은 다른 세상에 대한 상상을 만들어가는 동료들 중에서 제가 신뢰할 수 있는 입장을 제시 해주는 곳이거든요. 그게 사랑방 활동가들을 늘 어렵고 힘들게 만드는 지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제가 궁금한 지점이 생기면 가장 먼저 사랑방의 입장을 찾아봐요. 늘 응원합니다. 하지만 너무 힘들지는 않게 ‘적당히’ 힘들게 이어 나가시길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