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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집회·시위 자유 질식시키는 아펙

보수관변단체 무더기 장소 선점…경찰 "불법집회 엄정조치"

다음달 부산에서 열리는 아펙(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 Asia-Pacific Economic Cooperation:APEC)정상회의를 앞두고 아펙반대 집회가 불법집회로 몰릴 위기에 처했다.


해운대 일대 집회신고 237곳 모두 불허

'APEC 반대 부시 반대 부산시민행동'(아래 부산시민행동)은 아펙정상회의에 맞춰 다음달 18일과 19일 2차례에 걸쳐 열릴 '전쟁과 빈곤을 확대하는 아펙반대 부시반대 국민대회'를 위해 해운대 일대 237곳에 대한 집회신고서를 19일 해운대경찰서에 제출했다. 하지만 경찰은 "이미 모든 장소에 집회신고가 돼 있다"며 금지통보했다. 부산시민행동은 해운대 일대 외에도 20여 곳에 집회신고서를 냈지만 같은 이유로 해운대와 멀리 떨어진 서부시외버스터미널, 교대전철역 등 4곳만 허용됐다.

현행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아래 집시법)은 집회 또는 시위의 주최자는 720시간 전부터 48시간 전에 신고서를 관할 경찰서장에게 제출하도록 하고 있다. 또 집시법 제8조 제2항은 "시간과 장소가 경합되는 2 이상의 신고가 있고 그 목적으로 보아 서로 상반되거나 방해가 된다고 인정될 경우에는 뒤에 접수된 집회 또는 시위에 대하여…금지를 통고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부산시민행동에 따르면, 아펙정상회의 기간을 720시간 앞둔 지난 13일부터 한국자유총연맹·해병전우회·북파공작원동지회 등 보수관변단체와 롯데호텔·롯데백화점·농심 등 대형업체들이 해운대와 서면 등 주요도심에 대해 날마다 집회신고서를 접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부산해운대경찰서(서장 김석구) 정보과 관계자는 "(장소선점 때문에) 아펙행사장 주변에 추가로 집회신고를 할 수 있는 비어있는 자리는 없다고 보면 된다"면서도 "현행법에 따라 집회신고서를 먼저 접수한 쪽에 우선권을 준 것이므로 적법한 처리"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부산시민행동은 24일 부산시청 앞 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경찰이 보수관변단체를 관제동원해 집회자체를 보장하지 않는 것"이라며 "치졸하게 집회를 막다가 경찰과 부산시가 전 세계적으로 망신을 톡톡히 당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지적했다. 또 △집회금지 통보에 대한 이의신청 △국가인권위에 긴급구제신청 △민주노동당 이영순 의원을 중심으로 진상조사단 활동 △해당 경찰서에 정보공개청구 등을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박진현 부산시민행동 홍보팀장은 "대회 성사를 위해 가능한 모든 공터에 집회신고를 냈지만 이미 선점돼 있었다"며 "진상조사단을 구성해 집회신고 과정의 경찰 개입여부를 반드시 밝혀낼 것"이라고 말했다.


부산지역 기관장들 "아펙반대 활동 자제해야"

무더기 집회장소 선점 때문에 정상회의 기간 아펙반대 집회는 '미신고' 상태로 열릴 가능성이 높고 경찰은 이를 이유로 집회 자체를 봉쇄할 전망이다. 이미 경찰은 △아펙정상회의장과 숙소가 집중된 해운대권 △롯데호텔을 중심으로 한 서면권 △농심호텔 주변의 동래권 △김해공항 주변 등 4개 '특별치안강화구역'을 설정했다. 이어 지난 19일 부산지방경찰청(청장 어청수)은 지휘부 회의를 열고 "지정된 4개 권역에 대해서는 가용경력을 총집중하여, 행사안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어떠한 행위에 대해서도 사전에 엄정 차단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24일에도 부산시장·부산시의회의장·부산시교육감·부산지방검찰청검사장·부산지방경찰청장 등이 공동기자회견을 열고 "APEC 반대활동은 부산 APEC에 대한 범시민적 기대감, APEC 정상회의가 부산발전과 나라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점 그리고 원만한 행사진행에 지장을 주는 불법적인 집회나 시위에 대하여는 법에 따른 엄정한 조치가 불가피한 점 등을 감안하여 반드시 자제되어야"한다고 경고했다.

이에 대해 권두섭 변호사(민주노총 법률원)는 "현행법을 따르더라도 집회목적이 상반되거나 충돌문제가 발생할 우려가 없을 때는 동시집회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법을 운용할 수 있는데도 그러지 않는 것"이라며 "하루빨리 동시집회가 보장되도록 집시법을 개정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경찰개입 여부가 밝혀진다면 직권남용에 따른 처벌이 가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권 변호사는 "집회·시위의 자유를 보장한 취지가 사회 일반의 견해와 다른 견해가 있다 하더라도 사회적 약자·소수자의 의사표현 자유를 보장하는 것인데 그 자체를 원천봉쇄하겠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한편 24일부터 다음달 16일까지 '전쟁과 빈곤을 확대하는 아펙반대 부시반대 전국순례단'(아래 순례단)이 전국을 순회하며 아펙과 부시 미 대통령의 방한을 반대하는 여론을 불러일으킬 예정이다. 순례단은 서울, 강원, 대전, 대구·경북, 경남을 거치는 팀과 서울, 인천, 경기, 충청, 전북, 광주·전남을 거치는 팀으로 나뉘어 아펙정상회의 기간 부산에서 합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