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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즐거운 물구나무] 핵폐기장 통화연결음을 수배한다

회사 로고가 새겨진 넥타이를 모두 메고 다녀야 한다? 전 회사원이 회사 상품을 홍보하는 어깨띠를 항상 두르고 다녀야 한다? 게다가 만약 그 회사가 전쟁무기를 만드는 회사라면?

굳이 '사생활을 침해받지 않을 권리'라든가 '양심의 자유'와 같은 '고매한' 말을 꺼내지 않더라도 정상적인 상황에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물론 회사에 대한 충성심과 애사심에 불타 이런 일을 자발적으로 벌이는 '범생이 사원'이 있다면 굳이 말리지는 않겠다. 동시에 동료들의 뒷담화 대상이 되는 것도 말리지 않겠지만. 하지만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에게 강요한다? 단언컨대, 차라리 난 '벌거벗은 임금님'이 되리라.

얼마 전 전력회사에 다니는 한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깜짝 놀라 수화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휴대전화 '통화연결음'(속칭 컬러링)으로 핵폐기장(이른바 원전수거물관리센터)을 홍보하는 내용이 음악과 함께 나오는 것이 아닌가. 휴대전화 통화연결음이라 하면 휴대전화 계의 '아바타'라고 할 수 있는 바로 그것 아닌가. 인터넷 세계에서 아바타는 '나'의 대리인 혹은 분신이다. 아바타의 표정과 패션, 악세사리 등은 바로 '나'의 정체성과 취향을 나타내는 '센스(!)'가 된다. 인터넷 계에 아바타가 있다면 휴대전화 계에는 단연 통화연결음이 있다. 통화연결음을 최신곡으로 '깔아주는' 정도의 센스는 이미 기본이다. 굳이 '얼리어답터'들 사이에서가 아니더라도 요즘 통화연결음이 없으면 거의 '원시인' 취급을 당하기도 한다. 기분이 좋을 땐 댄스음악을, 우울할 땐 발라드음악을 깔아주고 낮 시간과 밤 시간에는 또 그에 어울리도록 통화연결음을 바꿔준다. 사용자의 취향에 맞게 기분에 맞게 설정된 통화연결음은 그 자체가 이미 휴대전화 사용자들 사이에서 새로운 소통방식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그런데 '충분히 듣고, 충분히 토론하고, 충분히 검토'한 후에 건설하는 '주민이 만드는 네모난 병원'이라고 천연덕스럽게 '뻥치는' 핵폐기장 홍보 통화연결음이라니. 이 사람이 이렇게 애사심에 불타는 사람이었나? 아니면 원자력발전 신봉자였던가? 마치 찐달걀을 먹고 목이 메이던 때와 같이 궁금함에 가슴이 답답해올 때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 사람에게 다시 전화해 물어보았다. 그래, 당신이 원자력에 푹 빠져 있는 이유는?

2003년 부안에서 핵폐기장 건설이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쳐 무산된 후 정부는 또다시 다른 지역에 핵폐기장 건설을 추진해왔다. 그 결과 울진, 영덕, 경주, 군산 등의 지역이 핵폐기장 유치 경쟁에 나서고 있고, 정부는 11월 중순 주민투표를 거쳐 찬성률이 가장 높은 지역을 중심으로 11월 말에 유치 지역을 최종적으로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부안에서 '반핵'이라는 여론에 밀려 '쓴 맛'을 본 정부가 '주민들의 자발적인 동의'라는 여론 조작의 신화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핵폐기장의 안전성을 '강요'하는 텔레비전 광고를 시작했고 그 일환으로 전력회사들은 직원들 전원의 휴대전화 통화연결음을 '핵폐기장 홍보'로 깔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들은 결정했고 실행했다.

'원자력발전에 당장 반대는 하지 않지만 차츰 줄여나가는 것에는 동의한다'고 자신의 견해를 수줍게 밝힌 나의 지인은 '핵폐기장의 추가 건설에는 동의할 수 없다'며 회사의 통화연결음을 거부하는 의사를 밝혔지만 회사에서는 '안 하면 안 된다', '하는지 안 하는지 체크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고 한다. '요놈의 노동자 신세…' 어쩔 수 없이 그는 회사 측 통화연결음을 사용했다. 그나마 자신은 들을 필요가 없다는 점을 위안 삼으며. 그런데 회사 측 통화연결음 계약기간 2개월이 지나고 나서도 통화연결음은 계속됐다. 이에 대해 휴대전화 통신사에 문의했을 때 그는 다시 한번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회사측이 직원들의 의사도 묻지 않은 채 통화연결음 계약 기간을 일괄적으로 2개월 연장한 것이다. '이 순간 기가 막히고 화가 났다'는 게 그의 솔직한 심정. 매주 통화연결음을 최신가요로 새롭게 깔아주는 정도의 '센스'를 발휘하던 그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핵폐기장 건설'이 자신의 소통과 취향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니. '핵폐기장 건설' 넥타이를 매고 다녀야 하는 것만큼이나, 어깨띠를 항상 두르고 스스로 '홍보대사'가 되어야 하는 것만큼이나 핵폐기장 건설을 촉구하는 통화연결음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그의 마음, 백만 번 이해하고도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