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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즐거운 물구나무] 장애를 짓누르는 '인간승리'의 신화

뇌출혈로 편마비 상태인 엄마를 바라보는 시선은 엄마 자신을 비롯해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아빠를 비롯한 가족구성원은 "당신은 할 수 있어!"라는 '장애극복'의 강렬한 희망으로 엄마를 대하는가하면, 엄마의 역할을 되찾고 다른 가족구성원을 위해 "어서 걸어야 한다"라고 부추기는 친척들도 있었다. 이 부분에서 나 역시 자유롭지 못한 데 엄마의 상태를 묻는 답변으로 "조금씩 걸어요"라는 말을 하곤 한다. 뇌출혈 급성기 치료를 마치고 많은 사람들의 관심은 향후 3∼6개월 내 과연 엄마가 걸을 수 있느냐로 모아졌다. 이런 희망이 사실 환자에게 얼마나 큰 스트레스를 주는지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 엄마는 외로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대개 '장애'는 '극복'의 대상이다. 비록 장애를 입었지만, 노력하면 정상인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는 이런 관념이 내 느낌으로는 '독이 되는 희망' 같다. 왜 이런 인식이 가득해졌을까? 아마도 비장애인이 득실거리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장애인은 장애를 넘어 '인간승리'의 신화를 남겨야 그나마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 환경과 통념 때문일 것이다.

2004년 한국영화 흥행작 '말아톤'에서 주인공이 이른바 마라톤 완주이라는 정상성에 대한 도전을 통해 보여준 모습은 또 다른 한편에서는 장애에 관한 '왜곡'된 인식을 유포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비장애인도 하기 힘든 마라톤 완주를 장애인이 해냈고, 따라서 장애인이 어떠한 조건에도 굴하지 않고 노력하면 '정상성'은 충분히 획득할 수 있는 그 무엇으로. 물론 사람마다 처한 조건에서 재활을 통해 기능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은 필요하다. 그 노력까지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금'의 '장애' 그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는 환경 즉 부족한 편의시설, 취약한 사회복지 서비스, 비장애인 중심의 주거환경, 장애인에게 결코 평등하지 못한 교육·노동·문화 등 사회인프라가 여전히 장애를 '극복'의 대상으로 이해하게 하는 주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국어사전에서 '장애인'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니, "신체의 일부에 장애가 있거나 정신적으로 결함이 있어서 일상생활이나 사회생활을 하는 데 상당한 제약을 받는 사람"으로 서술되어 있다. 눈을 크게 뜨고 보자. 누가 '상당한 제약'을 만들었는지. 그 제약은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가 만든 것이고 그 환경에서 장애인의 이미지는 무력한 존재, 누군가에게 짐이 되는 사람으로 고정됐다.

엄마는 지금도 '놀러나간' 왼쪽 팔과 다리를 기다리고 있다. 편마비로 팔과 다리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을 엄마는 "팔과 다리가 놀러나가서 돌아오지 않고 있다"라는 식으로 이해한다. 놀러나간 팔과 다리가 다시 돌아올지 아님 돌아오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엄마는 멈추지 않고 재활훈련을 하고 있다. 엄마가 병원을 나설 즈음, 장애인을 가두는 '상당한 제약'을 이 사회는 얼마나 거두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