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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즐거운 물구나무] '국가 표준'과 고정관념

안내표지판이 말하고 있는 것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지하철과 공항 같은 공공시설이나 큰 상점 등을 이용하다 보면 갖가지 종류의 안내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이들 안내표지판은 간단한 상징 그림을 활용하여 외국인이나 내국인이나,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누구나 손쉽게 그 뜻을 읽어내고 기억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이들 표지판에 사람이 등장하는 경우, 기존 사회의 고정관념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으로 안내 표지에 등장하는 사람은 바지를 입고 있다. 남자화장실, 남자탈의실 등을 가리키는 경우를 제외하면, 바지를 입은 사람은 대개 남성이 아닌 '사람 전체'를 대표하고 있다. 반면 치마를 입은 사람, 곧 여성이 등장하는 표지도 간혹 있다. 그런데 이들 여성이 등장하는 표지에는 기존의 성별분업이나 가족관 등이 개입되어 있는 경우가 흔하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내리는 동안 시선을 붙잡는 이 표지는 "아이를 잡고 타시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어린이와 함께 길을 가는 사람은 여성일 수도 있고 남성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어린이의 손을 잡아주어야 할 어른의 모습에다 굳이 치마를 입힌 것은 아이를 데리고 다니고 보호해야 할 책임이 여성, 더 정확하게는 엄마에게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호텔이나 공항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이 표지는 "예약"을 할 수 있는 곳을 나타낸다. 가만히 보면 데스크 너머에서 예약을 받는 노동자는 여성으로, 예약을 요청하는 고객은 남성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수화기 방향을 따져보면 틀림없다. 이 표지 역시 서비스는 여성의 몫이라는 고정관념이 없었다면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나타내는 이 표지에는 어른인 남성과 여성, 그리고 어린이가 등장하고 있다. 여성용 엘리베이터가 따로 있거나 어린이용 엘리베이터가 따로 있어서 "이 엘리베이터는 남녀노소 모두가 이용할 수 있습니다"라고 따로 얘기해줄 필요가 있는 게 아니라면, 사람을 대표하는 '바지를 입은 사람'만 여럿 그려 놓아도 충분히 뜻을 전달할 수 있다. 그런데도 유독 여성, 어린이, 남성을 등장시킨 데는 다른 특별한 뜻을 더 담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족 여러분, 아이를 가운데 세우고 잘 보호해주세요~!" 엄마와 아빠, 자녀로 구성된 가족만이 현실에 존재하는 것도 아닌데, 이른바 '정상가족'을 가족의 대표로 상징화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안내 표지판은 우리의 일상 곳곳을 차지하고 있다. 어린이들도 거의 날마다 이런 표지판을 보며 자란다. 물론 이런 표지판은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실제 어린이를 보살피는 책임은 여전히 여성에게 돌아가고 있고, 노동시장의 성별 장벽은 높디 높고, 이른바 '정상가족'의 특권만을 보장하는 질서 속에서 '정상가족'이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가족형태인 것도 분명하다. 문제의 본질은 '관념'이 아닌 '현실'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 표지판이 사람들의 인식에 미치는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다. 기존의 고정관념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고, 기존 현실을 넘어서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게 만들기 때문이다.

공공안내 표지판의 픽토그램(Pictogram), 곧 그림문자를 개발하고 보급하는 주체는 산업자원부 기술표준원이다. 고정관념을 고스란히 반영한 그림문자가 정부기관에 의해 '국가 표준'으로 지정되고 있는 것이다.



아이를 돌보고 예약을 받는 역할로만 등장하는 여성을 보다 보니, 문득 이 표지판에 등장하는 "회의실"에서는 남성들만 앉아있는 듯이 보인다. 여성은 회의실 바깥에서 커피를 타고 있으려나. 성 불평등이나 가족형태에 따른 차별을 넘어서고자 한다면, 국가 표준을 만들고 지정하는 과정에도 좀더 세심한 인권감수성이 요구된다. 대안적인 그림문자가 개발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면, 과도기적으로 치마를 입은 여성들만 있는 회의실, 아이와 남성이 손을 잡고 있는 에스컬레이터 표지판을 '국가 표준'으로 보급해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