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후원하기

인권하루소식

청각언어장애인의 인권을 '말' 하다

의사소통권·교육권·방송접근권 등 요구하며 길거리 나서

"다섯 살 때 열병을 앓고 난 후로는 세상의 소리를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게 됐다. 대학에 들어가서 농아인 동료를 만나고 뒤늦게 수화언어를 배우기 시작했지만 비장애인 중심으로 전달되는 대학 강의를 따라가기 위해 몇 배의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졸업 후에는 모교 교수의 추천을 받아 여러 회사의 문을 두드렸지만 서류전형은 통과해도 면접에서는 탈락되기 일쑤였다. 이 사회는 너무나 견고했다."

충남에서 19년째 간판 제작업을 하고 있는 이호문 충남 농아인협회 공주시지부장은 장애를 극복하도록 요구하면서도 동시에 장애를 이유로 철저히 차별하는 사회를 담담하게 설명했다. '청각언어장애인의 생존권 및 교육·정보접근권 등 각종 권리보장'을 촉구하며 지난 3일과 4일 이틀에 걸쳐 열린 집회에 참석한 그는 "같은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다 많은 직업선택의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내가 습득한 기술을 알려주고 싶다"며 "농아인도 똑같은 사람으로서 인권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상경한 이유를 밝혔다.

(사)한국농아인협회(아래 '협회') 주최로 국회 앞과 혜화동 마로니에 공원에서 열린 집회는 전국의 협회 회원 등 2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자회견과 삭발식, 거리행진, 결의문 낭독, TV 장례식, 문화공연 등을 펼쳐 보이며 청각언어장애인 당사자들에 의한 본격적인 권리쟁취 운동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무자막 TV가 장례식을 치루고 파괴되는 의식은 현재 청각언어장애인들이 겪고 있는 정보접근 단절의 심각성을 여실히 보여줬다.

▲ 무자막 TV가 장례식을 치루고 파괴되는 의식은 현재 청각언어장애인들이 겪고 있는 정보접근 단절의 심각성을 여실히 보여줬다.



장애인이동권쟁취투쟁은 철저히 비장애인위주로 설계된 대중교통시설이 장애인을 '사회적 약자'로 구조화 시켜왔음을 폭로했다. 이렇게 장애인을 배제하는 사회구조적 요인은 비장애인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의사소통방식의 획일성에도 깊숙이 내재하고 있다. 협회는 '많은 청각언어장애인이 실업상태'에 있으며 그나마의 취업분야도 '농업과 단순노무직에 편중되어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장애인의 노동을 비생산적인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사회전반의 인식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농아인들이 의사소통할 수 있는 체계는 애초에 배제한체 무조건 '의사소통 제약'만을 문제삼는 취업현장에서의 차별실태를 반영한다.

또 지난해에는 국회에 상정된 청각언어장애인들의 1종 운전면허취득을 합법화하는 내용이 담긴 도로교통법 개정안이 제출됐으나 폐기된 바 있다. 이에 대해 협회는 "외국의 일부 법령사례와 농아인들의 현실을 도외시한 형식적 연구보고서를 근거로 청각언어장애인들에게 꼭 필요한 생계수단과 그나마의 일자리 선택권을 빼앗은 처사"라며 "국회와 정부는 1종 운전면허 제한을 폐지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와함께 협회는 △청각언어장애인들이 취업장에서 원활히 작업할 수 있도록 수화통역사를 의무적으로 배치할 것 △청각언어장애인의 취업 직종을 개발하고 공공기관등에 고용할당제를 실시할 것 등을 요구사항으로 내걸고 있다.

또한 협회는 수화를 언어로 인정하고 이를 지원할 수 있는 법률 제정을 강력히 요구했다. 4일 마로니에 공원 집회에서 변승일 협회 회장은 "청각장애아동에게 고가의 인공와우(청력을 높이기 위해 귀에 삽입되는 보조기구) 시술 등 물리적 대안이 권유되고 있는" 현실을 꼬집으며 이는 "의업계의 상술이며 장애를 개인에게만 책임지우려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협회는 "특례입학을 통해 문을 연 대학에서조차 강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어 중도에 휴학이나 자퇴를 통하여 학습을 포기하는 청각언어장애인 대학생이 상당수"임을 들며 "수화통역, 자막, 보청시스템, 영상 등 다양한 학습지원 형태가 절실"함을 역설했다.

이밖에 협회는 △농학교에 농교사 배치를 확대하고 수화 가능한 일반교사를 배치할 것 △공공기관·대중이용시설·교통시설에 청각언어장애인 편의시설을 확대할 것 등을 요구하고 있다.

대오 가운데로 곳곳에 배치된 수화통역사들이 집회내내 긴박한 순간순간을 놓치지 않고 수화로 전달하고 있다.

▲ 대오 가운데로 곳곳에 배치된 수화통역사들이 집회내내 긴박한 순간순간을 놓치지 않고 수화로 전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들은 방송·영상·정보에서의 배제 실태를 낯낯이 고발하고 이의 시정을 요구했다. 협회는 "(방송의 경우) 최근 몇 년 전부터 극히 일부 방송에만 폐쇄자막방송이 실시되고 있으며 이 또한 지역, 위성, 케이블 방송 등을 배제한체 중앙방송사에서만 이루어지고 있음"을 지적했다. 더불어 "TV판매에 붙는 세금은 농아인들 모두에게 똑같이 부과되는데 이에반해 농아인들에게 TV를 시청할 권리는 없는" 것이 현실이라며 일부방송만을 자막수신기를 통하여 보는 방식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자체에 자막이 덮여 나오는 칩이 내장된) TV를 통한 자막방송을 볼 권리가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협회는 영상물 접근권에 관해 "수화통역이나 자막, FM보청기 지원등이 전무"하고 특히 "한국영화에 자막 삽입이나 보청시스템 등 서비스가 없어 한국영화를 관람할 수 있는 청각언어장애인이 거의 없음"을 지적했다. 협회는 △영화진흥법 개정을 통해 한국영화에 한글자막서비스를 실시할 것 △방송법 개정을 통해 수화통역방송을 확대하고 자막방송을 100% 실시할 것 △통신중계서비스 정착을 위한 관련정책 제정 등을 대안으로 대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