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후원하기

인권하루소식

<분석> 인권위법 물밑 개정 중 (상)

비대화·관료화 규정, 공론화 시급

[편집자주] 인권의 보호와 신장을 목적으로 설립된 국가인권위원회(아래 인권위)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인권위법 개정안이 발의됐다. 하지만 개정안에는 인권위의 비대화와 관료화를 낳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어, 인권단체들의 관심과 비판이 절실히 요구된다. 이에 본지에서는 인권위법 개정안에 대해 2회에 걸쳐 분석, 소개한다.


지난해 12월 10일 열린우리당 최재천 의원은 국회의원 찬성자 150명을 대표해 인권위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 개정안은 과반 의석의 열린우리당 당론으로 정해진 것이고 한나라당도 반대의 명분을 찾기 힘들다는 점 때문에, 일부 내용이 수정되거나 제정 시기가 늦춰질 수는 있을지언정, 개정안의 국회 통과 자체가 어려울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번 개정안은 인권단체와의 협의과정 없이 인권위를 포함한 정치권 내부의 물밑 협상으로 마련됐기 때문에, 인권위의 비대화와 관료화를 초래할 수 있는 몇몇 규정들이 성급하게 포함됐다. 이로써 국가기관들의 끈질긴 반발로 반쪽자리 권한만 갖고 출범한 인권위를 다시금 바로 세우려는 역사적인 작업이, 인권위의 '제 밥그릇 키우기'라는 왜곡된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르게 됐다.


차별업무 인권위로 몰아주기?

분산되어 있는 권리구제 절차들을 적절히 통합하는 것은 권리구제의 접근성과 효율성을 높일 수 있지만, 무원칙하게 통폐합한다면 기구의 비대화와 관료화를 낳으면서 오히려 권리구제의 실효성을 떨어뜨리게 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여성부 등 각 부처에 분산되어 있는 차별시정 기능을 인권위로 단일화하는 이번 개정안의 내용은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개정안에 따르면, 인권위는 인권위원 3∼4인으로 구성되는 차별시정위원회를 두며(제12조), 여기에서 여성부 산하 남녀차별개선위원회와 노동부 산하 고용평등위원회의 차별 관련 업무를 수행한다(부칙 제3조). 쉽게 말해, 남녀차별개선위원회는 없어지고 고용평등위원회는 축소되며, 앞으로 그 업무는 인권위가 수행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규정은 인권위가 기존 차별 관련 단체들로부터 심각한 불신을 받고 있는 현실을 도외시한 결과다.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는 장애인 단체들은 최근 대통령 직속으로 장애인차별시정기구를 설치하자는 데 합의했다. 이들 장애인 단체는 인권위에 대해 애초부터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인권위는 진정 1호 제천시장 장애인차별 사건에서부터 장애인 차별 문제에 대해 전문성도 떨어지고 실효성있는 구제권고도 하지 못했다는 판단 때문이다.

한국여성단체연합 관계자도 "남녀 차별의 문제가 인권위법상 18대 차별 사유 중 하나로 다뤄지는 것은 (남녀차별 개선 업무의) 전문성이란 측면에서 (지금보다) 좋지 않다"며, "여성단체들은 정부조직 개편 논의 과정에서 반대 의견을 제출한 바 있다"고 밝혔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인권위원 3∼4인으로 구성되는 차별시정위원회가 11명의 남녀차별개선위원회와 15인의 고용평등위원회의 업무를, 그것도 다른 차별 업무와 함께, 수행한다는 것은 무리 있어 보인다.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다양한 차별의 문제를 국가적 차원으로 해결하기 위해 차별시정기구의 위상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합의는 물론 제대로 된 공론화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차별시정기구의 위상을 인권위처럼 독립기구로 할 것이냐, 대통령 직속으로 할 것이냐, 인권위 산하에 둘 것이냐? 이 문제는 인권위가 차별금지법제정추진위를 구성해 2년 가까이 논의를 진행하고서도 아직까지 합의안을 공표하지 못하고 있을 정도로 어려운 주제다.

이런 상황에서 차별시정 기능을 인권위로 단일화하자는 이번 개정안의 내용이 그대로 통과된다면, 차별시정기구의 위상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폭력적으로 막게 되며, 국민들은 바람직한 차별시정기구에 대한 선택의 기회를 박탈당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차별 관련 단체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 채 인권위는 차별 관련 업무로 더욱 비대해지고, 최악의 경우 인권위는 다양한 영역에서 쏟아지는 차별 문제들을 제대로 해결하지도 못하면서 대안적인 권리구제 절차도 봉쇄해 버리는 상황이 초래될 수도 있다. 이 문제에 대해 차별 관련 단체들의 심각한 고민이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관료화의 첩경: 상임위원·사무총장 겸직

이번 개정안에는 위원장이 지명한 상임위원이 사무총장을 겸직한다(제16조)는 다소 뜬금없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위원회와 사무처의 엄격한 분리를 주장했던 1기 인권위의 입장과도 배치되는데, 이 개정안이 1기 인권위 사무총장이 상임위원으로 임명되고 1기 위원장의 연임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던 당시 발의됐다는 사실은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인권위원 한명한명이 인권옹호를 위해 필요한 집행력을 갖는다는 일은 바람직하다. 하지만 이번 개정안의 상임위원·사무총장 겸직 규정은 위원장이 지명한 상임위원만이 사무처의 집행력을 독점한다는 측면에서 인권위원 모두의 권한 강화라는 문제의식과는 거리가 멀다. 인권위의 특정 몇몇에게 집행력이 집중되는 것은 폐쇄적 운영과 함께 관료화의 지름길임을 1기 인권위는 극명하게 보여줬다.

개정안의 내용과는 별도로, 2기 인권위 사무총장으로 곽노현 방통대 법학 교수가 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위원장의 제청으로 대통령의 임명을 기다리고 있다. 이에 따라 개정안의 상임위원·사무총장 겸직 규정은 현실화될 가능성이 희박해 보이지만, 인권단체들은 관심의 끈을 놓지 않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