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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국보법 위반자 만들기 '식은죽'

<인권하루소식 캠페인> 국가보안법을 없애라! ④ 국보법 황당 사건

『전환시대의 논리』, 『8억인과의 대화』(이상 리영희), 『페다고지』(파울로 프레이리), 『아리랑』(님 웨일즈), 『자유로부터의 도피』(에리히 프롬), 『해방전후사의 인식』(송건호 외)…이상 나열한 책들은 어느 저명한 기관에서 선정한 교양도서목록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모두 법원에서 확정 판결한 이적도서목록이다. 지난 2001년 인권운동사랑방의 정보공개청구로 공개된 '판례에 나타난 이적도서표현물' 목록에는 모두 1200여종 이상의 책제목이 올라와 있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책들은 물론이거니와 위에서 열거한 책들과 같이 누구나 한 번쯤 읽어보았음직한 책들도 현재까지 버젓이 이적도서로 지정되어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1989년 출간된 이래 1997년에 이미 450만부의 판매부수를 기록한 조정래 씨의 소설 『태백산맥』은 검찰에서 벌써 10년째 이적성 여부를 조사하고 있다. 영화 『실미도』의 강우석 감독은 극중 '적기가' 삽입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관련 피소를 당하기도 했다. 이는 그동안 우리 사법부가 이적, 즉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것에 대한 기준을 얼마나 비상식적이고 자의적으로 설정하고 처벌해왔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웃지 못할 황당 사건 퍼레이드

국가보안법은 비단 학문, 사상과 표현의 자유 영역에서만 비상식성을 드러낸 것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이 무심결에 내뱉는 말 한 마디, 행동거지 하나에까지 그 손길을 뻗고 있다. 1970년 자신의 집에 막무가내로 들어온 철거반원들을 향해 "김일성보다 더 한 놈들아!"라고 무심결에 소리쳤던 김아무개 씨는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했다'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

1980년 연세대생 박아무개 씨는 『무림파천황』이라는 무협소설을 발표했다. 그런데 법원은 소설 내용을 문제삼아 소설 중의 대결구도와 줄거리를 자의적으로 '재해석'해 박 씨를 구속했다. 당시 법원은 "박 씨의 소설이 정파와 사파가 벌이는 대결구도를 '변증법적'으로 설명했고, 강'북'무림이 강'남'무림을 향해 '남진'을 한 것으로 묘사했다"고 주장하며, 이 소설이 북한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추종하고 국내 안보를 위협했다고 시비를 걸었다. 무협소설에서 일반적으로 전개되는 대립의 단순한 서술구조에마저 국가보안법의 잣대를 들이댄, 그야말로 황당한 사건인 것이다. 결국 박 씨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감옥에서 2년을 복역해야만 했다.

1986년에는 친형의 칠순잔치에 참석해 술을 마시고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왜 공산당이 나쁘냐!"라고 말을 내뱉었던 김아무개 씨가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되었다. 김 씨는 '북괴 공산당과 그 수괴인 김일성을 이롭게 했다'는 이유로 1심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최근에 국가보안법은 자유로운 일상 토론 공간인 인터넷 게시판에도 개입해 비상식성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성공회대 학생 전모 씨는 2002년에 인터넷 다음카페의 '민주노동당 성공회대학교 학생위원회' 자유게시판에 신자유주의, 조선일보 등을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가 '이적표현물 제작·배포' 혐의로 구속됐다.


'야만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자

국가보안법은 그동안 수 차례에 걸쳐 지적된 바와 같이 법 조항의 모호함과 비상식성으로 인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와 같은 자의적인 해석을 가능하게 했다. 무엇보다도 국가보안법은 평범한 사람들의 개인적인 영역, 일상적인 영역까지 일일이 간섭하고 속박해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스스로의 사고방식과 양심을 국가보안법의 틀 속에 가둬두게 했다.

국가보안법의 대표적인 피해자 중 한 명인 송두율 교수의 스승이었던 위르겐 하버마스는 언젠가 대한민국을 가리켜 "국가보안법이 살아 숨쉬는 야만의 땅"이라고 했다. '야만의 땅'에서는 결코 평화와 인권의 싹을 틔울 수 없다. 지금 이 순간, 국가보안법 폐지만이 결코 웃을 수만은 없었던 지난날의 황당한 이야기들을 되풀이하지 않는 유일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