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하루소식

<논평> 남성·비장애인 중심성을 드러낸 법원의 판결

정신지체 2급 장애 청소녀를 5년간 성폭행한 남성에게 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판결의 요지는 '때리거나 협박한 사실이 없어 성폭력 범죄의 처벌 조건인 자기방어를 할 수 없는 항거불능의 상태에 이른 것으로 판단되지 않고 이를 인정할만한 증거도 없다'는 것이다.

도대체 재판부가 말하는 '항거불능' 상태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재판부가 인정하는 성폭력이란 '정조관념이 투철한 순결한 여성이 목숨걸고 저항했지만 어쩔 수 없이 당한 사건'이라는 대단히 가부장적 가치관이 내포돼 있음을 다시금 확인케 한다. 이 소녀는 가해자가 '어머니와 오빠를 때렸던 것이 기억나서 무섭고 겁이 나 반항하지 않았고, 어떤 해악을 가할지 두려워 소리지르지 않았다'고 분명히 진술하고 있다.

이 소녀가 진술하는 성폭력의 경험은 '성폭력'이 아니란 말인가! '저항' 정도를 잣대로 삼는 재판부의 기준은 성폭력을 경험한 모든 여성에게 목숨을 내놓으라는 것과 다름없다.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여성이 경험하는 성폭력은 '권력'이라는 구조화된 성별(젠더)관계 속에 놓여 있다. 이 사건의 경우도 가해자(어머니 내연의 남자)와 소녀의 관계는 저항할 수 없는 위계가 존재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왜 저항하지 않았는지를 묻는 것은 성별화된 성폭력을 이해하지 못하는 남성주의 시각이다.

게다가 재판부는 이 소녀가 정신지체 2급 장애인이지만 읽고 쓰는 능력이 있고, 강간·낙태의 의미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성교육에 대한 이해능력이 있었던 사실을 들어 '항거불능' 상태에 이른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인지능력이 있는 것'이 곧 '특정상황에서의 대처능력' 이라는 재판부의 이해방식은 정신지체장애에 대한 몰이해이다. 이번 판결은 정신지체를 지닌 여성장애인의 특성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재판부의 '비장애인 중심성'을 그대로 드러냈다.

재판부의 무죄판결로 성폭력 가해자는 거리를 활보하게 됐고, 피해여성은 이중, 삼중의 고통 속에 빠지게 됐다. 사법부는 말로만 '인권의 보루'를 논할 것이 아니라 성폭력 사건 및 장애인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부터 바로 하고, 이들의 고통에 귀 기울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