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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인권하루소식 창간 10주년 기획 '그때 그 사건' ⑨ : 한국통신 비정규직 노조 투쟁

2000년 한겨울의 외침, "우리는 물건이 아니었어"


전화·인터넷 따위를 설치하고 보수하는 노동자들, 우리는 그들을 길에서 심심지 않게 볼 수 있다. KT가 박힌 작업복을 입고 있지만, 그들 대부분은 더 이상 한국통신 소속 노동자가 아니다. 예전처럼 똑같이 한국통신 일을 하지만, 이제 그들은 한국통신과 도급 계약을 맺은 다른 업체들에 속해 있다. 2000년 5월께부터 12월까지 7천명에게 일방적으로 전달된 '계약 해지 통보서'가 그 이유를 설명해준다.

서류 상 계약직이다 뿐이지, 10년에서 20년을 일해 온 그들이었다. "한국통신에 입사할 때 1년짜리 계약직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들어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평생 직장이 되겠거니 했었다." 윤백희 씨는 한창 해고 바람이 불던 2000년 6월 당시 인권하루소식 기자에게 이렇게 말하며 허탈해 했었다. "이제껏 공휴일도 없이 일한 대가가 일방적 해고라니…. 우리가 소모품도 아닌데 너무한 거 아닌가요?" 20년 넘게 한국통신에서 일해 온 구강회 씨는 분노를 감추지 못했었다. IMF 이후 뭉턱뭉턱 잘려 겨우 80만원을 넘기는 임금도 참아온 이들이었다. 그 해 10월 한국통신(아래 한통) 계약직 노동자들은 노조를 설립했고, 12월 13일 계약 해지 철회와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중앙노동위원회까지도 부당해고등 사측의 책임이 크다고 인정한 합법파업이었다.


한 겨울 외침, "비정규직 철폐하라!"

유난히도 추웠던 그 해 겨울 노동자들은 분당 한국통신 본사 앞에서 노숙 농성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혈액 순환 장애로 뇌에 손상을 입은 한 노동자는 지금도 말을 못 한다. 이듬해 봄 진눈깨비가 내리던 날, 목동 전화국을 점거하기도 했다. 이 일로 홍준표 노조위원장 등 여럿이 구속됐다. 한강철교 위에서 현수막을 내걸어 보기도 했다. 파업 투쟁에 열심이던 동료 한 명이 죽는 아픔도 있었다. 국회 본회의장에 들어가 기습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노동자들은 실업과 비정규직 사이를 짐짝처럼 오가게 하는 비정한 사회구조에 금을 내기 위해 몸뚱이를 내던졌다. "우리는 물건이 아니다! 비정규직 철폐하라!"

그러나 사측은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는 말만 지겹도록 되풀이할 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정부도 뒷짐마 진 채, 공기업의 인력감축을 재촉하며 비인간적인 대량해고를 방조했다. 비정규직 문제가 자신의 문제라는 인식에 눈뜨지 못한 한통 정규직 노조의 냉대도 계약직 노조를 힘 빠지게 하는 일이었다. 2002년 5월 13일 노동자들은 끈질기게 지속해 온 파업을 끝낼 수밖에 없었다. 파업을 시작한 지 517일만의 일이었다.


노동유연화가 노리는 것

그러나 한통 계약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패배'로만 기록되지는 않는다. 2001년은 비정규 노동자들의 투쟁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면서, 비정규 노동자들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널리 알리게 된 해였다.

비정규직이란 항상적인 고용불안을 의미하고, 삶의 불안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위축된 상황에서 노동자는 임금과 노동조건의 열악한 상황을 감수하게 한다. 그리고 노동자들 사이에 위계를 만들어 서로 경쟁하도록 만드는 것, 이러한 것들이 비정규직을 늘리는 '노동유연화'가 노리는 바다. 2000년∼2001년 이랜드 노동자, 방송사 비정규 노동자, 대학 시설관리 노동자, 학습지 교사, 레미콘 노동자, 린나이 코리아, 캐리어 사내하청 노동자 등은 비정규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을 투쟁으로 증거했다. 한통 계약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여기서 중요한 일부를 이루는 것은 물론이다.

나아가 불안정노동철폐연대 김혜진 집행위원장은 한통 계약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해 "한 사업장 차원의 대응에 그치지 않고, 정부와 자본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대항한 것이었다"는 평가를 덧붙인다. 노동자를 대량해고하고 하청노동자로의 전환을 강요하는 한국통신이라는 공기업 뒤에는 인력감축을 재촉하는 정부의 정책이 자리잡고 있었다. 한통계약직 노동자들은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 비정규직은 더욱 열악한 지위로 떨어지게 하는 구조조정에 정면으로 맞서 싸웠던 것이다.


비정규직 양산하더니 위하는 척…

최근 들어 정부와 재계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상태와 비교하며 정규직 노동자들을 탓하는 데 팔 걷고 나섰다. "정부와 자본이 비정규직 노동자를 양산하고 더 열악한 상황으로 내몰면서, 비정규직 위하는 척 이야기하는 건 말이 안 된다." 파업 당시 한통계약직 노조 조직국장이었던 이승환 씨는 이에 대해 어이없어 한다. 비정규직과 정규직 간의 연대의 모범인 이랜드노조의 유상헌 씨는 "노동자들이 원해서 정규직, 비정규직으로 갈라선 거냐? 자본이 더 많은 이윤을 위해 임금으로, 복지로 노동자들을 갈라놓은 거지"라며 혀를 끌끌 찬다.

김 집행위원장은 "정부와 자본의 이데올로기 공세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볼모로 전체 노동자들의 상태를 끌어내리려는 의도"라고 분석한다. 정부가 최근 노사관계 선진화 방안, 비정규 보호대책 등의 이름으로 내놓는 방안에는 정리해고를 더 쉽게 할 수 있도록 하고, 중간착취가 필연적인 파견노동이 가능한 업종을 더 확대하고, 계약직과 파견직의 고용불안 기간을 더 늘리는 내용 등이 포함된다. 정부와 재계가 과연 비정규노동자의 편인지, 아닌지 답은 분명하다.


'노동자는 하나다'

정규직 노동자들이 자본이 정한 위계의 틀을 깨고 비정규 노동자들과 동등한 주체로 만나야 한다는 당연한 원칙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또 비정규직의 확산을 막고 노동3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모든 노동자들이 공동의 힘을 모으지 않으면 안 된다. 한통계약직을 비롯한 지난 몇 년간의 비정규 노동자 운동은 단순한 진실을 온몸으로 증거한다. '노동자는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