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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윤현식의 인권이야기

감추어진 세계


아시안게임이 한창이다. 메이저급 국제스포츠행사에서 아마추어리즘을 기대한다는 것은 '웃기는 이야기'가 된지 오래지만 언론을 통해 쏟아지는 아시안게임 관련 뉴스들은 그 자체로 돈 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다.

아시안게임의 경기종목은 모두 38개. 그러나 한국메달의 유망종목이거나 폭넓은 시청자층을 확보하여 시청률을 올릴 수 있는 경기가 아닌 종목의 경우에는 생중계는 아예 하지도 않으며, 하이라이트 시간에도 명함을 내밀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이번 아시안게임에는 모두 44개국이 참가하고 있다. "하나의 아시아"라는 캐치프레이즈에 걸맞게 회원국 전체가 참여했다. 그러나 44개국이라는 나라들 가운데 소위 '돈 안 되는 나라들'은 개막식 이후 언론매체에 나오지 않고 있다.

아시안게임 덕분에 언론매체에서 감추어지는 모습들은 또 있다. 역시나 배고픈 사람들이다. 생존권을 걸고 장기파업을 하다 공권력에 무참히 짓밟혔던 병원 노동자들이 지금 어떻게 됐는지, 앞날이 창창한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청춘의 정점을 어떻게 사장당하고 있는지, 철거촌에 들이닥쳤던 깡패들이 아직도 쇠파이프를 들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주민들을 위협하고 있는지, 지하철역마다 썩어 들어가는 몸뚱이를 신문지 한 장으로 보전하며 누워 있는 노숙자들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언론은 종내 입을 다물고 있다. 한반도를 시뻘겋게 물들였던 월드컵의 흥분 뒤에 감춰진 아픔들이 불과 몇 달 상간을 두고 또 다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종합순위를 두고 벌어지는 국가 간의 대항전이 전 국민을 '하나'로 만들고, 남북 간의 스포츠 교류가 곧 통일의 물꼬를 트는 위대한 역정으로 승화되면서 시청자를 매료시키는 그 순간, 미국은 이라크를 폭격하기 위해 잔혹한 대량살상무기를 준비한다. 각 국의 국가가 울려 퍼지면서 그 나라의 깃발이 올라가고 휘황찬란한 금빛 메달이 선수의 목에 걸리는 그 순간 경찰의 방패에 찍혀 넘어지는 노동자의 모습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개막식 선수단 입장과정에서 팔레스타인 선수단이 아라파트의 대형 사진을 들고 입장했다. 단지 스포츠 행사일 뿐인 아시안게임에 정치적 입장을 표명하는 일이 옳은가라는 비판도 제기됐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이다. 어떤 나라에 11대 0이라는 스코어로 참패를 당한 아프가니스탄 축구팀을 보면서 단지 선수들의 기량이 떨어진다는 평가만을 할 수 있을까? 그들의 참패 뒤에 어떤 현실이 숨어 있을까?

어떤 미개한 나라의 군수재벌이 돈벼락을 맞고 있을 때, 이 찬연한 중동의 문화를 간직하고 있던 나라는 날벼락을 맞고 있었다. 그리고 이 순간 더 많은 돈벼락을 맞고자 하는 어떤 미개한 나라의 군수재벌과 석유재벌이 수백만이 될지도 모를 희생자를 만들기 위해 폭탄을 준비하고 있다. '돈 되는' 뉴스거리를 만들기 위해 오늘도 신문과 TV에서는 현실과 세상이 감추어지고 있다. 세상이 뒤바뀐다고 해도 스포츠라는 '각본 없는 드라마'가 사람들의 관심에서 아예 멀어지리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나 월드컵이나 아시안게임이 우리의 눈과 귀를 가리고 우리의 입을 봉하고 있는 이 이상한 현실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비판을 제기하는 일은 멈추어서는 안 된다. 굳이 3S라는 고전적 우민화정책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하나의 아시아'라는 그럴듯한 이데올로기 속에 감추어진 불손한 우민화 정책은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윤현식, 지문날인반대연대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