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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이우갑의 인권이야기

창해와 일남이


나는 천주교 신부이다. 그렇지만 난 동성애에 대해 찬성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동성애자의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편에 찬성하는 편이다. 사실 동성애자의 인권 문제는 오늘날만의 주요 '이슈'는 아니다. '성서'에 기록된 역사로만 따져도 3천년 이상 미루어져 왔던 과제이다. 내가 만난 동성애자들은 그들은 후천적 욕망을 호소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동성애자들은 '하느님이 날 이렇게 만들었는데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였다. 그렇다. 그런 면에서 나는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언젠가는 바뀔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천주교 신부가 동성애에 대해 찬성한다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소위 '가르침'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편 쉽기도 하다. 이미 동성애의 문제는 ꡐ사회적 관심ꡑ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그런 관심은 유행이다.

사실 동성애 문제보다 더 말하기 어려운 문제는 일상적인 문제이다. 더 말하자면 '가난'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실 '가난'한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갖자거나 그들과 함께 하자라는 이야기는 3천년이 아니라 5천년이상 묵은 문제이다. 그 문제는 굳이 법적인 문제를 떠나서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윤리에 속한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이렇게 발전한 사회에 '가난'이라는 말을 꺼내는 것은 왠지 촌스럽게 느껴진다. 얼마 전까지 수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져왔고 수없이 많은 '정치적 약속'들이 넘쳐난 주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막상 주위를 둘러보면 그 '반짝 관심'은 하늘의 무지개 같을 뿐 여전히 실제적인 가난으로 한숨을 쉬는 이들은 넘쳐나고 있다. 물론 더 이상 '가난'을 말하는 사람은 없다. 지금 가난한 사람, 혹은 가난이라는 사회적 문제는 사실 '잊혀진' 주제처럼 여겨진다.

가령 우리동네 일남이와 창해 같은 아이들이다. 각 각 고등하교 2학년, 1학년인 이 두 형제는 탄광을 다니다가 몸을 다친 후 알코올 중독에 빠진 아버지, 그 뒤 가출하여 행방을 감춘 어머니, 그리고 생계 때문에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해야하는 할머니를 둔 ꡐ전형적인ꡑ 탄광촌 아이들이다. 그런 가정에서 자란 일남이와 창해, 보란듯이 멋진 모범 청소년이 되면 좋겠지만 미안하게도 폭행과 절도로 둘 다 이미 한차례씩 ꡐ별ꡑ을 달고 있다. 내일도 창해는 지난 1월 오토바이를 훔쳐 탄 죄로 재판을 받으러 춘천까지 가야하고 나는 그 보호자로 동행해서 탄원하고 용서를 청해야 한다. 그렇지만 나는 창해에게 나무라는 말을 도무지 하지 못하고 있다. 창해가 겪는 그 죄의식과 처벌과 고통이 분명 '창해'라고 하는 한 아이에게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 아니다! 오히려 수 천년 입에 떠올려진 '가난'이라는 문제가 촌스러워진 오늘, 이런 아이들의 이야기는 '동화' 속 이야기처럼 여겨지는 오늘의 세상이 '창해'를 버려두고 심판하고 고통 속에 가두어 두는 것이다.

동성애자의 문제, 양심적인 군대 징집 거부의 문제, 아니 혹은 그 이전 여성의 권리에 대한 문제, 나는 그런 문제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온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주제들 뒤로 자꾸 자꾸 밀려나는 창해와 일남이 같은 '가난한 이들', 이제는 시들해지고 촌스러워진 '가난'이라는 묵은 화두, 그것을 막상 앞에 두고 나면 속상해진다. 아, 운동도 사랑도 유행이었던가?

(이우갑 씨는 고한성당 주임신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