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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정희진의 인권이야기

공인vs사생활 혹은 비아그라vs최음제


섹스 비디오든, 혼전 동거든, 마약이든 성 스캔들과 관련하여 피해 여성 연예인을 비난하는 주요 논거는 “(청소년에게 모범이 되어야 할)공인이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옹호하는 시각은 “연예인도 공인 이전에 개인... 개인의 사생활 침해”라는 것이다. 논쟁 구도가 이렇게 진행되기 때문에, 결국은 “연예인의 사생활도 보호되어야 하지만 이는 국민의 알권리와 충돌한다”식으로 언제나 절충을 가장한 공인론이 승리한다(나는 왜 연예인의 사생활이 왜 그토록 중요한 국민의 알 권리인지, 왜 수 조원에 달하는 군수 비리나 의문사에는 알 권리가 적용되지 않는지 이해가 안 되지만 말이다). 이처럼 공인론 대 사생활 보호론은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러한 논쟁 구조에서 후자는 백전백패다. 질문 방식 자체가 이미 공적 세계 우월론(남성 중심적 시각)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우리가 ‘여성의 사회 참여’라는 말은 쓰지만, ‘남성의 사회 참여’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여기서 ‘사회’는 남성들이 활동하고 있는 세계만을 의미한다. 여성들의 세계라고 간주되는 가정은 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여성들은 남성 중심의 공적 세계로 나가야만 ‘사회’로 ‘진출’할 수 있다.

즉 같은 연예인, 정치인이라도 여성과 남성에게 ‘공인’으로서 요구되는 사회 도덕적 규범은 완전히 다르다. 남성 연예인의 정력(성적 쾌락), 혹은 정력에 대한 추구가 현재의 황수정씨 사건처럼 마녀사냥으로 이어질까?(물론 황씨의 최음제 발언은 미확인 추측 보도다) 남성 장관이 기자들 앞에서 울거나 바지에 손을 넣고 인터뷰한다고 해서 가십 거리가 될까? 또한 개인의 사생활 범위는 모든 인간에게 평등하지 않다. 사생활의 범위는 성별과 계급에 따라 다르다. 공사 분리에 근거한 성별 분업의 논리에서 보면, 남성은 공사 영역을 모두 경험하지만 여성이 공적 영역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남성보다 몇 배의 노력이 필요하다. 취업 시 여성 차별, 슈퍼우먼 콤플렉스가 다 그런 문제들이다. 또한 50평 아파트에 사는 사람에겐 50평이 사생활권의 영역이지만, 9평 아파트에 사는 사람에게는 9평이 사생활 보호 공간이다.

내가 보기에 여성 연예인의 성 스캔들은 연예계의 ‘자정’노력과는 상관없이 계속 터질 것이다. 이는 사생활 침해의 문제가 아니라 남성 중심주의의 문제이며, (남성)대중은 그것을 끊임없이 원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성생활에 대한 차별적 규범은, 여성 연예인을 모델로 해 언제든지 얼마든지 여성 개인이 가진 자원, 경제력, 사회적 힘과 상관없이 여성을 너무도 쉽게 사회적으로 매장시켜주는, 계급을 초월한 남성들의 연대이다. 이같은 섹슈얼리티의 권력이 여성이 인간이 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다.

(정희진 씨는 한국여성의전화연합 전문위원,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가정폭력과 여성인권』의 저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