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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집회 및 시위의 자유, 현 주소를 진단한다-③

“허위, 위장 집회가 판친다”


“매일 건물 앞에 와서 집회를 하니까 은행에서도 한 달 짜리 집회 신고를 냈더군요. 이제 어디 가서 하소연해야할지…” 시그네틱스 노조 정상우 조직부장은 지난 24일 집회신고를 내러갔다가 신고를 못하고 돌아왔다.

시그네틱스 노조는 지난 8월부터 시그네틱스 주거래은행인 산업은행 본점 앞에서 집회를 열었는데 오는 29일부터 산업은행 본점 앞에서 집회를 못하게 됐기 때문이다. 산업은행 본점이 29일부터 12월 31일까지 자신의 건물 앞에서 집회를 하겠다고 집회장소를 선점한 것이다. 집회는 대부분 ‘주장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열리기 마련인데 이처럼 집회할 장소를 잃어버리면 집회를 여는 사람들은 맥이 탁 풀려 버린다.


해당기업, 집회장소 선점

이 같은 경우는 비단 시그네틱스 뿐이 아니다. 건설운송노조도 마찬가지 경우를 당했다. 건설운송노조는 ‘노조 인정, 사업주 구속․처벌’을 요구하며 지난 6월부터 서울 광화문 앞에서 집회를 해왔다. 8월초까지는 예정대로 집회를 진행했으나 8월 초 집회기간을 연장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같은 장소에 레미콘 회사 유진개발이 집회신고를 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건설운송노조 윤봉하 조직부장은 “사측에서 집회신고를 했다는데 9월이 다 지나가도록 실제로 집회가 열리는 모습은 한 번도 못 봤다”며 “이는 분명히 집회방해 목적으로 허위․위장 집회 신고를 낸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한편 유진개발 관계자는 “집회신고는 12월말까지 내놓은 상태며, 1주일에 한 번 정도 회사이전 홍보와 광고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유진개발은 99년에 광화문 미 대사관 근처로 사무실을 옮겼는데, 이전 후 2년도 더 지나서 회사이전 홍보를 한다는 말이 쉽게 납득되지는 않았다.


경찰이 ‘위장집회신고’ 종용하기도

한 장소에서 2개 이상의 집회가 있을 때 집회를 제한하는 법적 근거는 집시법 8조다. 집시법 8조는 “시간과 장소가 경합되는 2 이상의 신고가 있고 그 목적으로 보아 서로 상반되거나 방해가 된다고 인정될 경우에는 뒤에 접수된 집회 또는 시위에 대하여 … 그 집회 또는 시위의 금지를 통고할 수 있다”고 돼있다. 이에 대해 민주노총 권두섭 법규차장은 “경찰이 두 집회가 서로 목적으로 보아 상반되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무조건 나중에 신고된 집회를 금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권 차장은 또 “많은 관변단체들이나 민간기업들이 이 조항을 악용해 자신과 이해관계가 있는 집회를 막으려고 허위․위장집회를 장기간 신고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심지어는 경찰 스스로 이 조항을 악용해 사회단체들의 집회를 막는 경우도 있다. 아셈이 열린 지난해 10월 강남경찰서는 강남일대 주요도로에 있는 공기업․민간기업 등에 연락을 취해 회의장 및 숙소주변 지역에 집회신고를 하도록 요청해 집회를 원천봉쇄한 바 있다. 이는 일반언론을 통해서도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당시 경찰은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아셈 기간동안 사회․노동 단체들의 집회와 시위가 예상된다”며 “이를 막기 위해 먼저 집회신고를 해달라”고 협조를 구한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집회신고를 낸 기업들 대부분은 경찰 측 요구에 따라 ‘집회방지용’ 신고를 내기만 했지 실제 집회는 거의 하지 않았다.

한편 국회 행정자치위원회 소속 한나라당 박종희 의원이 낸 자료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5월까지 집회기간이 1주 이상 신고된 집회 가운데 36.7% 는 집회가 열리지 않았다. 이에 대해 집회신고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종로경찰서 정보계 관계자도 “지금은 노조․사회단체나 기업들이나 할 거 없이 대부분이 1개월 이상 장기집회 신고를 하고 있는 추세”라며 “이해관계가 얽힌 기업주변이나 주요 집회장소에는 여러 단체들이 한꺼번에 장기집회 신고를 하려고 해, 1주일 단위나 1개월 단위로 신고하라고 권유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또한 ‘집회 방해용 집회신고’에 대해서는 “경찰이 집회 방해목적인지 아닌지 판단하고 신고를 접수하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밝혔다.


“절박한 호소, 불법 덫에 걸린다”

건설운송노조 윤 조직부장은 “명백하게 집회방해를 목적으로 낸 집회신고는 타인이 집회를 열고 싶어도 열 수 없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전국에 흩어져 있는 조합원을 모아 서울에 와도 집회를 열 만한 장소가 없어 ‘여의도공원’ 같이 엉뚱한 곳에서 집회를 해야되는 상황”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윤 조직부장은 덧붙여 “관변단체나 기업들이 ‘집회방해용’ 허위․위장 집회신고를 한다면 생존권 투쟁에 직면한 노동자․민중들은 결국 ‘불법 아닌 불법’ 집회를 열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집시법 개정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