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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정욱식의 인권이야기

히로시마에서 만난 두 노인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44년 9월에 히로시마로 강제징병된 곽귀훈 씨는 행군중에 큰 폭발 소리와 커다란 불기둥을 목격했다. 잠시후 뜨겁고 강한 바람이 자신의 몸을 엄습했지만, 단순히 “또 폭격이 시작됐구나”라고 생각했다. 그 후 3일동안 계속된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서야 그것이 핵폭탄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로부터 56년이 지난 2002년 8월 6일 히로시마 평화공원에서 만난 이 조선인 청년은 이제 78세의 백발노인이 됐고, 그 때 입은 상처 때문에 불볕더위에도 긴 팔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히로시마가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핵폭탄 공격을 받은 지 3일후, 나가사키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17세의 시게토시 이와마쓰 씨도 곽 씨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 당시 일본 전시법에는 징집대상을 20세 이상의 청년으로 명시하고 있었으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중고등학생도 징집했다. 미쓰비시 공장에서 강제노역을 하던 이와마쓰 씨는 공장창문 너머로 섬광을 보았고, 유리창을 깨뜨리고 밀려오는 강한 바람과 고열에 본능적으로 눈과 귀를 막고 선반밑으로 몸을 숨겼다. “신을 믿지 않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신이 나를 살린 것 같다”며 “핵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일생을 바치라는 신의 계시라고 생각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도쿄에서 만난 이와마쓰 씨 역시 이제 칠순이 됐고, 56년전 ‘알 수 없는 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평생 반핵평화운동에 몸담고 있다.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일본의 군국주의와 미국의 핵폭탄에 의해 고통을 겪어온 두 노인은 이제 한국과 일본의 반핵운동의 중심에 서 있다. 곽 씨는 지난 6월 1일 “일본이 아닌 다른 나라에 거주한다는 이유로 원폭 피해자에게 피폭자원호법에 따른 건강관리수당을 주지 않는 것은 위법”이라며 일본정부와 오사카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이겼다. 일본정부는 그동안 일종의 행정명령인 ‘통달 402호’를 통해 “해외에 거주하는 원폭피해자는 수당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해석해왔다. 즉 같은 피폭자라도 일본에 있을 때는 보상을 받을 수 있으나, 일본 밖으로 나가면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이번 판결로 곽 씨를 비롯한 생존 중인 약 5천명의 일본 ‘밖’ 원폭피해자들이 보상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은 아니다. 일본정부가 오사카 지방법원의 판결에 불복해 항소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곽 씨는 일본 대법원까지 가더라도 이길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이른바 ‘통달’이 위헌소지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정부가 계속 해외 원폭피해자 문제를 외면할 경우 유일한 피폭국가로서의 일본이 주창해온 ‘핵없는 세상’은 공염불에 불과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본언론이 곽 씨의 행보에 초미의 관심을 보이고 있는 이유도 재판결과에 따라 해외 원폭피해자는 물론 대부분 패소로 끝난 일제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전후배상소송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욱식 씨는 「한반도 평화를 위한 시민네트워크」 대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