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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김대중 1년, 그늘진 인권현장의 사람들 ⑤ 김경택(전 동암재활원 원생)


“비리가 드러났는데도 왜 처벌받지 않죠? 그 정도로는 부족한가요?” 전주 동암재활원의 한 원생이 지역 사회단체에 보내온 편지의 한 대목이다. 지난해 12월 전주를 떠들썩하게 했던 장애인복지시설 ‘동암’의 인권유린과 비리 사건은 해방 이후부터 이어져온 우리 사회 복지시설의 고질적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시설장이 사회복지 공로를 인정받아 ‘호암상’을 수상하는 등 겉으로는 호평을 받았던 이 시설에서 성폭행과 구타, 온갖 비리들이 자행되어 왔다는 사실은 한 장애인의 용기와 결단에 의해 밖으로 알려졌다. 그 용기의 주인공이 바로 김경택(33) 씨다.


동암재활원 인권유린 폭로

뇌성마비 1급 장애인인 경택 씨는 초등학교만을 졸업했다. 22살 때 서울의 한 시설에서 전기기술을 배운 뒤 장애인 근로시설에 다녀봤지만, 봉급은 고작 6-7만원 정도. 희망을 접고 다시 고향(전북 함열군)으로 내려온 경택 씨에게 어느 날 희소식이 들려왔다. 전주에 동암재활원이 설립된다는 소식이었다. 대학에 들어가 사회로부터 무시당해 온 한을 풀고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고 싶었던 김 씨는 주저 없이 ‘동암’에 원서를 냈고, 그 후 6년 간 고등학교 졸업의 꿈을 간직한 채 ‘온갖 꼴’들을 견뎌왔다고 한다.

그러나 지난해, 원생에 대한 성폭행 사실을 알게 되면서 경택 씨는 마침내 참아왔던 분노를 터뜨렸다. 경택 씨는 신변의 위협을 무릅써가며 시의회와 언론에 사실을 폭로했고, 이를 통해 ‘동암’의 해묵은 인권유린과 비리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 정도 비리는 괜찮은가요?”

하지만, 경택 씨와 원생들의 노력과 달리 정작 동암에는 변화가 찾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경택 씨는 이 일로 인해 졸업장을 받지도 못하고 매일같이 동암 직원들의 전화에 시달리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무릎꿇고 사과를 해야 졸업장을 주겠다”는 동암 측의 압력 때문에 다시 시설을 찾아가는 것조차 두렵다고 한다.

게다가, 시설이 아니면 갈 곳이 없어 재활원에 계속 남아있어야 하는 한 후배 원생의 하소연은 경택 씨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한다. 사건발생 이후 달라진 것이라곤 식단이 좋아진 것 뿐 원생들은 오히려 정신적 압박을 심하게 받고 있다는 것이다. 또 직원들은 반성은커녕 원생들을 ‘두고보자’는 식으로 대한다고 한다. 재활원의 보호작업장은 통제가 심해져 화장실도 허락을 받고 가야하며, 이제 직원들이 때리지는 않지만 욕지거리를 일삼으며 툭하면 “싫으면 나가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성폭행 가해자로 재판을 받고 집행유예로 풀려난 두 명의 직원들이 버젓이 다시 재활원을 드나들며 원생들과 같이 밥을 먹기도 한다는 소식에는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감시․천대 없는 삶을 꿈꾼다

경택 씨는 말한다. “원생들이 바라는 것은 단 한가지예요. 시설장과 직원들이 바뀌는 거죠. 원생들을 위해주는 사회복지전문가들이 직원으로 들어와 마음 편하게 지내는 것 외엔 더 이상 바라는게 없어요. 그런데 왜 그게 안 되는 거죠? 이미 드러난 비리들로는 그들을 처벌하기에 부족한 겁니까?”

지금까지 동암 문제와 관련, 전주시의회가 특위를 구성해 진상조사를 마쳤으며, 시민단체들도 공대위를 만들어 조사한 결과를 감사원과 검찰에 통보하고 동암 운영자들의 사법처리를 요구하는 진정서를 올린 바 있다. 그러나 아직 이렇다할 반응이 없다. 만약 동암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다면 원생들은 앞으로 시설 뿐 아니라 세상에 대해서도 아무런 희망을 가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어떻게 생활할거냐는 물음에 경택 씨는 말한다. “시설은 이제 지긋지긋해요. 22살부터 전전한 여러 시설에서 우리를 인간적으로 대해준 곳은 없었어요. 그런데 무얼하며 먹고 살아야 할지…. 혹 갈 곳이 없어 다시 시설로 가게 되진 않을지. 걱정이에요.” 그리고 넌지시 자신의 꿈을 얘기한다. 조그만 아파트에 자립작업장을 만들어 시설에서 나오고 싶어하는 후배들과 함께 일하면서 관리와 감시와 천대가 없는 그야말로 평범하고 일반인과 같은 삶을 살아보는 것이라고….

취재: 김영옥(전북평화와인권연대)